재송여중 부장 워크숍5-경주 최부잣집
불곡석불좌상을 끝으로 경주 남산의 일정을 마치고 경주에서 가장 경주다운 곳인 교동으로 향했다. 일반적으로 향교가 있는 동네를 교동이라고 부른다. 특히 경주의 교동에는 경주향교와 경주 최부잣집이 담장 하나 사이로 같이 있다.
경주향교 표지를 따라가면 경주 최부잣집이 나온다. 청송 심부자와 함께 영남을 대표하는 양대 부잣집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12대 만석과 9대 진사를 배출했고, 청송 심부자는 9대에 걸쳐 2만석꾼을 배출했다고 한다.
대문
우리 일행은 최부잣집 대문 앞에 다 모였다. 최부잣집 대문 앞에서 보는 남산이 참 평화롭다. 남산은 화강암이 많은 바위산이지만 이곳에서 보면 아주 유순하게 보인다. 앞에 있는 도당산 뒤에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산이 경주 남산이다. 우리 선생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집 풍수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일반적으로 양택(陽宅, 집터) 풍수에서 명당의 기본 조건은 대체로 다음의 3가지다.
1. 배산임수(背山臨水): 뒤에는 산 앞에는 물이 있는 형국
2. 전저후고(前低後高) : 앞은 낮고 뒤는 높은 지형
3. 전착후관(前窄後寬) : 출입문은 좁고 뒤 뜰 안이 넉넉한 구조
1. 배산임수(背山臨水)
배산, 즉 집 뒤에는 신라 고분군이 있는 넓은 들판으로 되어 있어 허하다. 그래서 이 집을 짓기 전에 괴목으로 불리는 느티나무를 빽빽이 심어 보완하였다. 그리고 임수인 남천이 반월성 앞에서 동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일반적으로 풍수에서 동출서류(東出西流)는 부자가 많이 나고, 서출동류(西出東流)는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한다.
이 집에서 보면 집 앞에 흐르는 남천이 전형적인 동출서류인 부자터다. 또한 남주작 역시 이중으로 되어 있다. 앞에 있는 도당산과 뒤에 있는 경주 남산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 교과서적인 남주작의 풍수를 나타내고 있다. 안산이 좋으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보아도 이곳의 안산이 가장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2. 전저후고(前低後高)
앞은 낮고 뒤는 높은 것이 양택 풍수의 교과서다. 그러나 이 집은 그 점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집을 지을 때 원래의 자리에서 3자 정도 깍아서 지었다고 한다. 즉 후고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풍수에서는 이처럼 비보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더욱이 후고를 확실히 할 욕심으로 느티나무를 빽빽하게 심었다.
집 뒤의 느티나무들은 집터를 비보하기 위하여 심은 것이다. 그런데 일제 말엽 일본인들이 괴목을 많이 베어 공출해 갔다. 이 때문에 12대 만석에서 멈추지 않았는가 생각될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다.
3, 전착후관(前窄後寬)
출입문은 좁고 뒤뜰 안이 넉넉한 구조를 일컫는다. 이 집 대문은 12대 만석을 할 정도로 크고 화려하지는 않다. 천 석 할 정도의 대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전착후관에 가장 알맞게 되어 있다.
결국 최부잣집의 풍수는 자연적인 풍수로는 완벽하지 않지만 인위적으로 비보를 하여 그 불완전함을 보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몇 년 전에 복원한 사랑채가 나온다. 이 사랑채는 197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화강암으로 된 주춧돌만 드러나 있었는데 그 주춧돌이 대단히 화려했다.
이 주춧돌들은 200년 전에 반월성에 있던 것인데, 집을 지으면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돌들은 원래 왕궁의 기둥을 받치던 돌들이라고 한다.
사랑채 앞에는 화강암으로 된 특이한 석조물이 있다. 늘 이것의 용도가 궁금하였는데 마침 이 집 사랑에 기거하는 친척분을 만날 수 있어 물어보니 불을 피우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석등인 셈이다.
사랑채 앞에는 또 다른 석조물이 눈에 뛴다. 연꽃 모양의 석조다.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신라시대의 석조라고 한다. 고려대학교 설립자인 김성수님이 최부자에게 이 석조를 고려대로 옮기자고 사정사정을 하는 데도 거절할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이 집은 대지 2천여 평, 99칸 집, 노비 100 여명에, 후원이 1만여 평에 이르는 큰 집이였다. 이 집의 특이한 점은 사랑채와 안채를 완전히 구분해 놓았다.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선 또 하나의 대문을 통과해야 된다. 남녀의 생활공간을 구별해 놓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한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 중에 스웨덴 의료 참전단의 간호사들이 경주 교동 최부잣집을 찾았다. 그들은 곧 최부잣집 안채와 부엌 곳곳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웨덴 국왕의 특별명령을 수행 중이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는 황태자였던 1926년에 황태자비인 루이즈와 함께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구스타프는 신라고분 발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고분이 서봉총이다. 이는 황태자의 참가를 기념하여 위하여 스웨덴의 한문표기인 서전(瑞典)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 모양이 장식된 데서 각 1자씩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라 했다고 한다.
안채
황태자부부는 당시 경주 최부잣집에서 숙식을 했다. 이들은 전통음식으로 뜨겁게 환영해준 조선의 명문가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구스타프 6세는 간호사를 지원하며, 여성 전용공간이라 둘러보지 못한 최부잣집 안채와 부엌을 촬영해오라 한 것이다. 스웨덴의 황태자도 보지 못할 정도로 안채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장소였다.
마당 가장자리에 큰 창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뒤주로 쌀 800석이 들어간다고 한다. 뒤주 앞에는 이 집의 가훈이 전시되어 있다.
뒤주
가훈
1. 과거는 보되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2. 재산은 만 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4.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5. 며느리가 시집오면 삼 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혀라.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을 없게 하라.
이 집의 또 다른 수신의 가훈인 처세육연(處世六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처초연(自處超然) : 처신함에 있어 초연하게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을 대할 때는 화기애애하게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는 물이 맑듯이
유사감연(有事敢然) : 일이 있을 때는 과단성있게
득의담연(得意淡然) : 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
실의태연(失意泰然) : 뜻을 잃었어도 태연하게
이는 가슴속에 한 번 새겨볼 만한 것이다.
최부잣집이 12대 만석을 한 중요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다.
최근 발견된 최씨 집안의 고문서들에 의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최부잣집이 처음 터를 잡은 형상강 상류 지역은 전쟁 이후 버려진 농토와 습지들이 널려 있었다.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농토개간을 독려했고 최부잣집은 이런 정책에 힘입어 이 지역들을 경작지로 확보했다.
확보한 경작지에 새로운 영농기법인 이앙법을 도입했다. 이앙법은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 대신 모판에 모를 심어 이앙하는 모내기법이다. 이앙법의 도입은 노동력을 1/10로 줄였다. 그리고 모판에서 모가 자라는 동안 논에서 보리를 키우는 이모작이 가능해져 생산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또한 고문서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뒤 큰 논은 종들에게 나눠 짓게 하라."
이 말 속에 최부잣집의 또 다른 농업경영법이 들어 있다. 종들에게 경쟁을 시켜 열심히 노력해서 많이 생산한 노비는 많이 가지게 했다.
이것은 최부잣집이 '마름'을 두지 않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 '마름'은 소작인들의 관리권을 쥔 사람으로, 소작인들에게 횡포를 부려 소작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최부잣집은 중간관리인 '마름'을 배제하고 그 이윤을 소작인에게 돌려주었다. 마름을 두지 않은 것은 소작료 인하와 더불어 부수적인 효과를 주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직접적 만남은 소작인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게 했고 지주의 신뢰를 받게 했다.
3대조인 최국선(1631-1682)의 무덤 비문에는 또 다른 최씨 집안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사람들이 어렵고 급한 사정으로 공에게 담보 잡힌 문서들이 책상 가득하였다...공이 문서를 태워 버리고 더 이상 묻지 않으니..."
각종 담보 잡힌 사람들의 문서를 모두 불태움으로써 담보 잡힌 사람들의 불안을 덜게 해준 것이다.
"갚을 사람이면 이런 담보가 없어도 갚을 것이고 안 갚을 사람이면 이런 담보가 있어도 갚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맹상군열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작료를 만 석으로 고정하자 땅이 늘면 늘수록 최부잣집의 소작료는 낮아졌다. 최부잣집이 부유해지면 소작인의 곳간도 덩달아 불어나는 독특한 경제 형태였다. 이른바 '상생의 경제'였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최부자가 더 많은 땅을 가지길 바랐고, 주변에 팔 땅이 있으면 앞 다투어 최부잣집에 알렸다. 소작인들도 함께 부유해지고, 서로 안정적으로 부를 유지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독특하게 재산운영 방식이다.
안정적인 부를 유지하고 지역사회에서 신망을 얻자, 전국 각지의 손님들이 최부잣집 사랑채를 드나들었다. 그것은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는 최부잣집의 독특한 철학 때문이었다.
숙박시설이 많지 않던 시절. 최부잣집은 길손들에게 최고의 숙박처였다. 많게는 하루 백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 당시 최부잣집에는 특별한 뒤주가 하나 있었다. 사랑채에 손님이 넘치면, 이 뒤주에서 쌀 한 줌과 과메기 한 마리를 가지고 하인집이나 소작인집으로 가면, 최부잣집 손님인 줄 알고 밥을 지어주고 잠자리도 제공해주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하인이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내지 않는 특권을 주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손님은 독상으로 대접했다. 최부잣집이 직접 재배한 미역과, 인근 특산물인 과메기가 기본 반찬이었다.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천 석 정도라고 한다. 이 중 천 석은 가용으로, 천 석은 과객 접대용으로, 나머지 천 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썼다고 한다. 즉 수입의 3분의 2는 남을 위해 쓴 셈이다.
지금 우리나라 재벌들은 과연 자신들이 벌어들인 돈의 몇%나 기부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상상이 안 되는 적선이다.
남들에게는 이렇게 적덕을 쌓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는 엄격했다. 보릿고개 때에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다. 이 집 7대 조모는 삼베치마를 하도 오래 입어 이곳저곳을 기워야 했는데, 서 말의 물이 들어가는 ‘서말치 솥’에 이 치마 하나만 넣어도 솥이 꽉 찬다고 하여 ‘서말치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기 식구들에게는 절약을 강조하면서 남들에게는 적선을 한 것이다.
주역의 10익 중 하나인 문언전에 곤괘를 해설하는 글 가운데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다.)’이 있다. 이 말은 만고의 진리인 것 같다. 적선을 한 집안은 반드시 후손이 잘 된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주명리상담을 해 주었다. 그중 안 좋은 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이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조상이 적덕을 한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종교적인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종교적 신념이 없어도 무난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 조상들의 음덕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자자손손 복을 누리고 살고 싶거든 돈을 쌓을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쌓을 일이다.
내가 지금 쌓은 적덕이 먼 훗날 나의 후손들의 경사로 드러날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이 바로 이와 같은 적덕의 마음일 것이다.
학교 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다. 학생, 학부모, 동료교사, 관리자와의 관계 등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도 적선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 어려움도 잘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날마다 적덕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베풀다보면 그 덕이 나의 당대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 보답이 올 것이다.
최부잣집을 나와 경주향교를 거쳐 계림 산책을 한 후 요석궁에서 저녁을 먹었다. 숙소에서는 2013학년도 교육계획 수립을 위한 진지한 워크숍을 가졌다.
1박2일의 워크숍이 성황리에 마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준비한 교감선생님, 행정실장님, 여러 부장선생님께 -특히 3부 부장 선생님-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린다. 이분들의 적덕 덕분에 여러 사람들이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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