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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경주여행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진평왕릉과 설총묘

by 황교장 2015. 7. 5.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진평왕릉과 설총묘

-명리학으로 열어가는 진로상담 현장연수-1

 

2015학년도 부산광역시교육연수원 지정 특수분야 연수인 ‘명리학으로 열어가는 진로상담’의 현장 답사로 경주 일원으로 다녀왔다. 여정은 황복사지3층석탑 – 진평왕릉 – 설총묘 – 점심 – 옥산서원 - 독락당이다.

2015년 6월 27(토) 오전 9시에 신도중학교 정문에서 모여 출발하였다. 연수생들은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는 것처럼 다들 밝은 표정들이다.

 

 

 

경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신라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했다. 신라는 진한의 한 부족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여 경주지역의 토착민세력과 유이민집단의 결합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에 의해 건국되었다. 부족국가로 출발하여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왕의 칭호가 바뀐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첫 글자만 외웠던 ‘거-차 -이-마-왕’ 이다. 

 거서간(군장) – 차차웅(제사장) - 이사금(계승자) - 마립간(대수장) -왕 

 

 왕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쓴 22대 지증왕은 옥경(玉莖, 남근)의 길이가 1자 5치(약 45cm)로 되어 있다. 이는 옥경의 실물 크기라기보다는, 부족연맹체로 출발한 신라가 500년이 지난 뒤에야 왕권이 확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옥경의 크기는 힘의 상징이므로 실물보다 과장되게 기술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증왕과는 달리 경덕왕은 실물크기였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다. 경덕왕은 8치(약 24cm)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씨왕 10명, 석씨왕 8명, 김씨왕 38명 총56대로 이어진 신라역사 천년은 세계역사상 로마 다음으로 오래된 역사라고 한다.

 

이번 현장연수에서 장소를 선정하는 데 많은 고심을 하였다. 첫째, 장마철이라 설령 비가 와도 우산을 쓰고 걸어갈 수 있어야 하고, 운치 또한 있어야만 된다. 둘째는 명리학의 기초를 익히고자하는 연수의 목적과 일치해야 된다. 연수 일정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곳으로 선정하였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다. 경주를 자주 찾는 사람들도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잘 모른다. 그만큼 구석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큰 도로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지만 낭산(狼山)의 북쪽 끝자락 모퉁이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논길을 따라 가자 모내기를 한 지 한 달 정도 된 논에는 벼가 제법 땅내를 맡아서 푸르름을 더해주고 있다. 논둑길을 걷는 정취에 취해 다들 소녀 소년 같은 표정이다. 낭산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 입구로 들어가자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37호)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전혀 탑이 있을 것 같지 않는 곳에 탑이 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서 있다.

 

 

 

연수생 대부분이 이곳은 처음이라고 한다. 탑이 있는 낮은 언덕에서 바라보는 들판이 보문들판이다. 경주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니 현대식 건물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맞은편 산은 명활산성이 있는 명활산이다. 명활산 밑에는 전통가옥으로 된 마을이 있고 그 앞에는 오래된 고목으로 둘러싸인 진평왕릉이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진평왕릉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이는 아기자기한 시골논밭이 있다.

 

요즈음 면소재지만 가도 제법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시골이라는 맛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곳은 경주시 중심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명활산에서 뻗어온 맥과 낭산 사이의 넓은 보문들판은 짙은초록색은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황복사가 언제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의상대사가 진평왕 47년에 19세의 나이로 머리를 깍은 절로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이 탑은 32대 효소왕 원년(692)에 세워졌다.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다.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 5년(706)에 사리와 불상들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인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2년 탑 해체수리과정에서 2층 옥개석과 3층 탑신석 사이에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사리공 안에는 사리함과 692년 탑 창건 시 봉안된 미륵불 입상(국보80호)과 706년 재 봉안된 아미타불 좌상(국보 79호)이 함께 발견되었다.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모습이지만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통일 초기의 탑인 감은사 삼층석탑과 고선사 삼층석탑에 이어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최고의 걸작인 석가탑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탑에는 상륜부가 없다. 상륜부의 기초가 되는 노반(露盤)만 있다. 노반은 부처님은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슬을 먹는다는 의미에서 이슬 노(露)와 그릇 반(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 위에 복발(覆鉢, 발우를 엎어 놓은 것), 앙화(仰花, 연꽃잎을 위로 향하여 벌려 놓은 모양), 보륜(寶輪, 바퀴 모양의 테두리 장식), 보개(寶蓋, 닫집 모양, 열반의 경지를 나타냄), 수연(水煙, 불꽃 모양의 장식품), 용차(龍車, 임금이 타던 수레가 본래의 뜻, 보주와 같은 의미), 보주(寶珠, 중생을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덕과 신통력을 가진 상징체, 부처의 진리가 사방으로 고루 비치는 빛을 상징)로 이루어 진다.

 

 

 

상륜부는 찰주로 연결이 되어 있다. 감은사 삼층석탑에는 상륜부의 장식물은 다 없어지고 쇠로 된 찰주만 남아 있다. 학생들에게 탑 위에 있는 저 쇠꽂이가 무엇인지를 질문을 하면 대부분 벼락을 막아주는 피뢰침이라고 대답을 한다.

신라석탑 중 상륜부가 온전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탑은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과 장흥 보림사의 삼층석탑뿐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하고는 질문을 받았다. 금당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질문을 한다. 일반적으로 금당 앞에 탑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지형 상 금당이 탑 앞에 있었다고 답을 하자 뒤에 금당을 지어도 될 것 같은데 라고 답을 흘린다.

전문가들이 금당 뒤에 탑을 둔 대표적인 곳으로 드는 것이 이곳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일명 백탑이라고 불리는 나원리 오층석탑이다.

 

 

 

다음 목적지는 진평왕릉이다. 건너편 들을 지나면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 보인다. 그곳 끝에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릉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지형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농로다.

 

똑 바로 난 수로를 따라가면 더 빨리 갈 수도 있을 텐데 농로로 가라고 하지 않았는데 선두 그룹에 선 분들이 자연스럽게 농로를 따라간다. 논과 논 사이에 난 길을 따라 평온하게 걸어간다.

 

전날까지만 해도 장마 비가 내렸지만 지금은 비도 그치고 햇빛도 나지 않고 옅은 구름으로 가려주고 있다. 그런데도 가시거리는 아주 좋아 산책하기에는 그저 그만인 날씨다. 재송여중 모 부장이 삼년 동안 경주를 나와 같이 다섯 번이나 왔지만 올 때마다 처음인 곳만 왔는데 설마 이번에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처음 오는 곳을 안내를 한다면서 그 끝이 어디인가를 묻는다.

중복 안 되게 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발품을 팔았는지를 자랑하려다가 수업시간에 강조한 개운법 중 지산겸(地山謙)이 떠올라 그저 웃음으로 답을 하고 말았다.

 

 

 

이 길의 운치가 얼마나 좋았던지 점심을 먹고 난 후 모 교장선생님이 자신의 평생 한을 풀었다고 말씀을 하신다. 이렇게 호젓한 시골논길을 걸어보는 것이 평생숙제 중 하나였다고 하시면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받은 곳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경주보리빵을 선물로 주셨다.

 

 

 

다들 방실방실 웃는 표정에 한껏 고조된 기분으로 진평왕릉에 도착을 했다. 왕릉 잔디밭에 들어서자 작은 벌레들이 날라들었다.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침범한 것이다. 나무가 없는 밝은 곳에는 벌레들이 없다. 이런 미물도 물기가 머금은 곳이 주된 서식지인 모양이다.

 

 

 

 

진평왕릉은 지금의 풍수이론으로는 명당이라고 할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사신사가 뚜렷하지가 않다. 좌청룡도 우백호도 남주작도 북현무도 뭔가 하나 딱 잡히는 곳이 없다. 또한 자라나는 식물을 보면 청송 주왕산 자락에 있는 주산지 물속에도 잘 자라고 있는 수백 년 묵은 왕버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왕버들이 잘 자라는 곳은 물이 아주 많은 곳이다.

 

음택풍수에서는 물이 많이 고이는 땅은 아주 흉한 흉지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곳은 묘지로는 쓸 수 없는 곳이다. 그렇지 않다면 원성왕 무덤으로 추증되는 괘릉(掛陵)처럼 무덤을 파니 물이 고여 있어서 관을 걸어놓았다고 걸 괘(掛)의 괘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설 처럼 이곳도 그러한 상상을 해 볼 수 있겠다. 아마도 도선풍수가 정립되기 전에 무덤을 쓴 때문일 게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면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의 이야기를 빌려 ‘경주를 알려면 진평왕릉과, 장항리 절터를 가보고, 성덕대왕신종 소리를 직접 들어보라.’고 강조하고 있다.

 

경주의 155개 고분 중에서 진평왕릉을 최고로 꼽은 이유로 ‘왕릉으로서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고분은 진평왕릉뿐이다. 또 있다면 그의 딸 선덕여왕릉이 비슷하다.’라고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32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다. 한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규모로 보아 이 고분이 왕릉급인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36.4m, 높이 7.9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호석(護石)의 받침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몇 개 보일 뿐 별다른 장식물은 없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은 본명이 백정(白淨)이고,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륜의 아들이다. 동륜태자는 아버지인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궁주와 사통을 하려 담을 넘다가 개에 물려죽는다. 진흥왕이 죽자 동륜태자의 배다른 동생인 25대 진지왕이 즉위를 한다.

 

그러나 당시 실세인 사도태후(진흥왕비, 동륜태자 모)와 미실이의 말을 듣지 않고 황음(皇淫)을 하다가 폐위된다. 이어서 사도태후의 손자인 진평왕이 13살의 나이에 왕에 즉위를 한다. 이때부터 28년간 미실이의 치마폭에서 보낸다.

 

 

 

 

수 년 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연속극이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선덕여왕’이기보다는 ‘미실’이다. 고현정의 뛰어난 연기에 더욱더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미실이라는 인물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한 마디의 언급이 없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필사본에서는 자세히 나와 있다. 이를 요약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미실은 소지왕의 후궁이었던 벽화부인과 법흥왕과의 사이에서 난 딸인 삼엽궁주가 어머니다. 따라서 법흥왕의 외손녀다. 여기서 법흥왕과 소지왕과의 관계를 잠깐 설명하고 가자. 소지왕은 지증왕의 6촌형이다.

지증왕은 법흥왕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법흥왕은 소지왕의 마복자이다. 특히 법흥왕과 화랑도의 초대 풍월주인 김위화랑이 소지왕의 마복자(摩復子)라고 알려져 있다. 마복자란 글자 그대로 배를 문질러서 낳은 아이다.

 

마복자 제도는 세계 역사상 신라 사회에서만 있는 풍습으로, 임신한 부하의 아내를 자기 처소로 불러 들여 살게 하면서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하여 태어날 아이와 끈끈한 인연을 맺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23대 법흥왕은 지증왕(남근이 1자 5치, 약 45cm)과 연제부인(키가 7척 5치 약 2m 25cm, 배설물의 양은 북만 함)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불교를 공인하고, 신라 최초로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고 스스로 황제를 자처한 인물이다. 따라서 소지왕이 6촌 동생인 지증왕의 아내인 연제부인이 임신한 후에 소지왕과 살을 맞대고 정을 통함으로써 태어난 아이가 법흥왕이다.

 

이렇게 태어난 법흥왕이 7촌 아저씨인 소지왕의 후궁이었던 벽화부인과 정을 통해 낳은 이가 삼엽궁주다. 삼엽궁주가 바로 미실이의 어머니다. 따라서 미실은 법흥왕의 외손녀다.  

 

미실이가 관계한 남자를 보면 1.세종 2.사다함 3.진흥왕 4.동륜태자 5. 설월랑 6. 미생 7. 진지왕 8. 진평왕이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인물들의 면면들이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다.

 

 

 

1.세종은 지소태후와 박이사부 사이에 난 아들이다. 즉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다. 그러면 세종은 진흥왕의 씨 다른 동생이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 김입종이다. 법흥왕이 딸인 지소태후가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이 세종이다. 따라서 법흥왕의 외손자이다. 법흥왕의 외손자와 외손녀가 결혼한 것이다.

 

여기서 정리를 하면 법흥왕-삼엽궁주-미실, 법흥왕-지소태후-세종이다. 즉 삼엽궁주와 지소태후는 자매다. 미실과 세종은 이종사촌이다.

 

2. 사다함은 561년 열여섯의 어린나이로 가야정벌 전쟁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운 제 5세 풍월주이다.

 

3. 진흥왕은 진흥왕 순수비로 잘 알려진 왕으로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정복왕이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친동생인 갈문왕 김입종과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 사이에 태어났다. 따라서 진흥왕은 법흥왕의 친조카이자 외손자이다. 법흥왕-지소태후-진흥왕, 법흥왕-삼엽궁주-미실 즉 미실이와 진흥왕은 이종사촌이다.

 

4. 동륜태자는 진흥왕의 큰아들이다. 진흥왕과 사도부인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미실이는 동륜태자의 5촌 이모이다.

 

5. 설원랑은 제7세 풍월주이자 미생의 친구이다.

 

6. 미생은 미실의 친동생이다.

 

7. 진지왕은 진흥왕과 숙명궁주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따라서 동륜태자와 진지왕은 둘 다 진흥왕의 아들이다. 미실이는 진지왕의 오촌이모이다.

 

8. 진평왕은 동륜태자와 만호부인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즉 진흥왕의 손자다. 미실이는 진평왕의 6촌 이모 할머니다.

 

 

 

 

 

결론적으로 미실은 진흥왕과 진흥왕의 두 아들인 동륜태자와 진지왕,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과도 성관계를 맺은 셈이다. 특히 서른을 훨씬 넘긴 나이에 열세 살의 진평왕에게 첫 경험을 안겨다 주었다. 미실은 어린 진평왕을 끼고 정사를 좌지우지했다.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부터 미실이 죽은 607년까지 무려 28년간은 미실의 시대였다. 이처럼 미실은 진흥왕 중반기에서 진지왕 대를 거쳐 진평왕까지 40여 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60세가 넘어서야 자연사를 했다.

 

 ‘화랑세기’에서 미실이의 미색을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 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독특한 골품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는 남녀의 윤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골만의 골품이 더 중시된 사회였다.

 

 

 

진평왕은 수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수와 당과 교류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즉 이때를 기점으로 삼국전쟁 시기에 당과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확고히 만들었다. 또한 불교진흥을 위해 힘썼고 남산성과 명활산성을 축조 하였다. 신라왕 중에서도 두 번째로 오랜 5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딸인 선덕공주가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여왕으로 등극한다.

 

진평왕은 신라삼보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삼보는 황룡사장륙상, 천사옥대(天賜玉帶), 황룡사구층탑의 세 가지를 지칭한다. 이중 천사옥대는 진평왕이 상황(上皇)이 보낸 천사(天使)에게 전해 받은 것이다. 진평왕은 이 옥대를 착용함으로써 왕의 신성성과 권위를 돋보이고자 하였다. 그가 자기 스스로를 천제가 옥대를 내려줄 정도로 신성한 임금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신라삼보 중의 하나인 황룡사구층탑은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632-647)때 건립하였다. 진평왕에게는 딸이 두 명이다. 첫딸이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공주고, 둘째딸이 선덕여왕이다. 천명공주는 진지왕의 장남인 김용수에게 시집을 가서 김춘추를 낳았다. 그리고 김용수가 죽자 그의 동생인 김용춘에게 시집을 다시 갔다. 김용춘은 선덕여왕의 첫 번째 남편이기도 하다.

 

이들의 촌수를 보면 동륜태자와 진지왕은 배다른 형제다. 진평왕은 동륜태자의 아들이고 김용춘은 진지왕이 아들이다. 진평왕과 김용춘은 사촌형제다.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와 선덕여왕은 5촌 아저씨와 결혼을 한 셈이다.

 

또한 선덕여왕과 김용춘 사이에 자식이 생기지 않아서 흠반과 을제를 두 번째 남편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이했지만 자식은 생기지 않았다. 여기서 신라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를 볼 수 있다. 즉 왕녀가 자식을 가지지 못할 때 남편 셋을 얻게 하는 제도이다. 이를 삼서(三婿)제도라고 한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가지가 당나라 황제인 태종 이세민이 보낸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는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한 가지는 자기가 죽을 날과 시를 알고 무덤을 미리 정했다는 것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옥문지에 겨울철에 개구리 떼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여근곡에 적군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는 것이다.

 

이때 적군을 모두 소탕한 뒤에 신하들이 여왕에게 ‘여근곡에 매복해 있던 백제군이 궤멸될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자 그 대답이 ‘男根入於女根 必卽死矣(남근입어여근 필즉사의,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어 나온다)’ 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왕릉 주변의 고목들이 왕릉의 역사와 운치를 더하고 있다. 나무의 수종도 다양하다. 왕버들, 수백 년은 됨직한 소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가 있다. 느티나무는 주로 귀목(櫷木)이라고 불린다. 이는 거북처럼 오래 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회화나무는 槐木(괴목)이라 불린다. 느티나무에는 나무 목(木)변에 거북 구(龜)자가 들어가고, 회화나무에는 나무 목(木)변에 귀신 귀(鬼)자가 들어간다. 회화나무는 일명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린다.

 

이는 중국 주나라 때 삼공(三公)들이 조정에다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각자 회화나무 그늘 아래 앉아 서로 마주보면서 정사를 의논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중국의 삼공은 우리나라의 삼정승과 같은 격이다.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회화나무는 출세한 사람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왕릉인데도 회화나무가 심겨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이나 향교에 회화나무가 많이 심겨 있는 것은 보아도 왕릉에 심긴 회화나무는 이곳이 처음이다.

 

 

 

 

진평왕릉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설총의 묘가 나온다. 마을 안쪽은 여름 꽃들로 가득하다. 특히 능소화가 집집마다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설총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태어났다. 설총의 탄생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는 이렇게 외치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誰許沒柯斧(수허몰가부)

나는 하늘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 我斫支天柱(아작지천주)’

 

자루 빠진 도끼(沒柯斧)와 하늘 받칠 기둥(天柱)의 뜻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게까지 전해졌다. 무열왕은 이 이야기를 듣자 너털웃음을 웃고는 ‘아마도 원효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대현(大賢)이 있으면 그보다 더 큰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태종은 ‘도끼’를 ‘귀부인’으로, ‘하늘 받칠 기둥’을 ‘대현’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왕은 홀로 된 둘째딸 요석공주를 생각하고 결심을 했다. 원효 스님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라고 칙명을 내렸다. 관리가 원효를 찾고 있을 때, 원효는 이미 알고서는 문천교(蚊川橋)를 건너던 중 거짓으로 물에 빠져 이를 빌미로 요석궁에서 몸을 말리면서 설총을 낳았다.

 

 

 

설총(655, 태종무열왕 2∼?)의 가장 큰 공로는 한자의 뜻과 음을 따서 우리말을 표현하는 이두를 정리한 것이다.

골품제에서 설총은 육두품이다. 비록 왕의 외손자일지라도 아버지가 진골이 아니기 때문이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 설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에 박통했으며, 우리말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10현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동국 18현의 수좌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설총은 외사촌인 신문왕에게 화왕계를 건의하여 도덕정치를 강조하였다. 화왕계는 꽃의 왕인 화왕 목단이 장미와 할미꽃을 대하는 태도를 국왕이 아리따운 여인과 늙은 신하를 대하는 태도에 비유하여 국왕이 아첨하는 여인의 애교보다는 정직한 신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것을 권한 글이다. 천사백 년 전의 화왕계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이다. 화왕계(花王戒)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왕(花王)께서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휘장으로 둘러싸 보호하였는데, 삼춘가절을 맞아 예쁜 꽃을 피우니, 온갖 꽃보다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여러 꽃들이 다투어 모여 왔다. 문득 한 가인이 앞으로 나왔다. 붉은 얼굴에 옥 같은 이와 신선하고 탐스러운 감색 나들이옷을 입고 아장거리는 무희처럼 얌전하게 화왕에게 아뢰었다. ‘이 몸은 백설의 모래사장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났습니다. 봄비가 내릴 때는 목욕하여 몸의 먼지를 씻었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 속에 유유자적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름은 장미라 합니다. 임금님의 높으신 덕을 듣고, 꽃다운 침소에 그윽한 향기를 더 하여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께서 이 몸을 받아 주실는지요?’

이 때 베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르고, 손에는 지팡이, 머리는 흰 백발을 한 장부 하나가 둔중한 걸음으로 나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 몸은 서울 밖 한길 옆에 사는 백두옹(白頭翁)입니다. 아래로는 창망한 들판을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 경치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옵건대, 좌우에서 보살피는 신하는 고량과 향기로운 차와 술로 수라상을 받들어 임금님의 식성을 흡족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 드리고 있사옵니다. 또 고리짝에 저장해 둔 양약으로 임금님의 기운을 돕고, 금석의 극약으로써 임금님의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비록 사마가 있어도 군자된 자는 관괴라고 해서 버리는 일이 없고, 부족에 대비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도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한 신하가 화왕께 아뢰었다.

‘두 사람이 왔는데, 임금님께서는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화왕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장부의 말도 도리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가인을 얻기 어려우니 이를 어찌할꼬?’

그러자 장부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제가 온 것은 임금님의 총명이 모든 사리를 잘 판단한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뵈오니 그렇지 않으십니다. 무릇 임금된 자로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 하지 않는 이는 드뭅니다. 따라서 맹자는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고, 풍당은 낭관으로 파묻혀 머리가 백발이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오니 저인들 어찌하겠습니까?’

화왕은 마침내 다음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다.”

 

 

설총 묘를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늦게 도착한 사람들에게 이 동네분으로 보이는 사람이 한참 설명을 하고 있다. 내가 다가가자 이 무덤은 가묘라고 주장한다. 예전에 이곳은 소나무 밭이었다. 경주 설씨들이 수 십 년 전에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은 이 마을의 청년회 회장이라고 신분을 밝히면서 격양된 목소리로 자기 주장을 하였다.

 

이분 말에 의하면 설총묘는 세 곳이라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이곳인데 자기가 볼 때는 가짜라는 것이다. 연수생 중에서 이처럼 설씨 문중에서 가짜 무덤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가묘일지라도 이렇게라도 만들어 기린다면 좋은 점도 있지 않겠는가 싶었다. 이 마을 청년회장이 가묘라고 거품을 무는 것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으로서 이곳 개발에 많은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마을 한 가운데 무덤이 있으면 개발에 제한을 받아 집값이 떨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전의 일정은 이것으로 마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보문단지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