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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경주여행

괘릉 주상절리

by 황교장 2016. 6. 12.

괘릉 주상절리

 

2016학년도 1학기 부산광역시 교육연수원 지정 특수분야 연수인 명리학으로 열어가는 진로상담연수생들과 함께 경주 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왔다. 답사 순서는 괘능주상절리-점심식사-감은사지-장항사지이다.


2016521() 오전 8시에 신도중학교 정문에서 모여 출발하였다. 토요일에는 교통이 혼잡하여 작년보다 한 시간 일찍 출발했다. 괘릉은 부산에서 가기가 참 애매했다. 그런데 새로 난 부산 울산 포항 고속도로 덕분에 아주 편해졌다. 남경주 IC로 나오면 바로 괘릉에 도착한다.


출발하여 50여 분만에 괘릉에 도착했다. 괘릉 입구는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연 그대로이다. 경주 특유의 굽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괘릉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우리 속담에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곳의 소나무는 대부분 굽어 있다.



굽은 소나무는 곡선의 부드러움으로 여유로움을 주어 운치를 더해준다. 굽은 소나무를 볼 때마다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이 떠오른다.


무용지용은 쓸모없는 것이 곧 쓸모 있음을 말한다. 곧게 잘 자란 소나무는 쉽게 목수의 눈에 띄어 베어져 기둥이나 서까래로 사용되나 굽은 소나무는 쓸모가 없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살아 남아 선산을 지킬 수 있다는 의미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왕의 시신을 연못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하여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서역인의 얼굴을 한 무인석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무인석은 이곳밖에 없어서 더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은 복식에서 차이가 난다. 무인석은 무사의 복장을 하고, 문인석은 문사의 복장을 한다.

관상으로도 구분이 된다. 문인석은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온화하다.



반면에 무인석은 눈꼬리가 위로 치켜세워져 무섭게 보인다. 관상에서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면 성격이 사납다. 그런데 눈꼬리가 아래로 처지고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스마일형의 관상은 성격이 유순하다.


이곳의 석상은 모두 무인의 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근래에는 문인석도 무인석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게다가 문인석의 수염을 보니 얼마 전에 다녀온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무사들의 수염과 흡사하다.


관상을 보면 무인석의 무인은 서역인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신라와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보는 설과 당나라풍이 도입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 서역인들은 당나라의 용병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래서 서역인을 수호의 상징으로 나타내었다고 한다.



무인석을 자세히 보면 한 팔뚝과 한 주먹하게 보인다. 소매를 걷고 양 주먹 불끈 쥐고는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때릴 자세를 취하고 있다. 팔뚝도 반만 드러내어 숨겨진 힘을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들은 사랑하는 남자의 힘센 팔뚝을 보면 가장 섹시함을 느낀다고 한다. 무인석의 무사야말로 여인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느껴진다.


양 옆에 있는 돌사자 한 쌍도 특이한 형태를 취한다. 한 쌍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한 쌍은 고개를 좌우로 90도 돌리고 있어 사방을 다 감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고개를 돌린 사자는 한 발로는 땅을 짚고 한 발로는 땅을 파헤치면서 입을 벌리고 있어 금강역사의 아상과 훔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금강역사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으로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보통 절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 서 있다. 이 중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가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가지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고 한다.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頭光)이 있다. 이는 신성한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통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열어 하고 소리를 내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흔히 입을 열고 있는 역사를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훔금강역사라고 하는데, 이때의 는 범어의 첫째 글자이고, ‘은 끝 글자이다.

이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다른 석물은 왕릉의 영역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다.



이들 석상과 석주들의 조각기법이 매우 우수하여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었다.



괘릉은 풍수의 기본적인 형태를 다 갖추고 있다. 남주작과 북현무가 뚜렷하다. 좌청룡도 좋고 우백호도 아주 훌륭하다. 도선국사(827-898)가 활동하기 백여 년 전인데도 풍수의 사신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괘릉은 원형의 봉토분으로 되어 있어 아담하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왕릉 앞에는 석상을 놓았다. 이곳에 재물을 놓고 제사를 지낸다. 능의 둘레에 능을 보호하는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 주위에 12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 특유의 양식이라고 한다. 12지신상은 무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왕릉을 보호하는 신장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방향은 ()인 쥐는 북방에 있고, ()인 말은 남쪽에 ()인 토끼는 동쪽에, ()인 닭은 서쪽에 배치해 놓았다. 당시에 이미 12지의 방위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곳의 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중에서 가장 잘 갖추어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신라의 묘제는 6세기 후반 불교시대로 들어서면서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에서 돌방흙무덤(石室封土墳)으로 바뀌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왕릉과 귀족의 무덤은 석실봉토분으로 이어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은 단순한 형식에서 화려한 형식으로 변해갔다. 그 중 독특한 것은 능묘에 장식으로 십이지신상을 호석으로 두른 것이다. 당나라 묘제에도 십이지상이 일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를 분묘의 호석에 응용한 것은 통일신라 묘제의 독특한 형식이라고 한다.


 괘릉은 현존하는 신라왕릉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능묘라고 평가받고 있다.

   


괘릉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능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서는 원성왕이 재위 14년에 죽으니 유해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하고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괘릉에 비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인근에 숭복사터가 있어 괘릉이 원성왕의 능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성왕은 폭우로 인하여 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통일신라에서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한 왕은 35대 경덕왕이다. 경덕왕의 아들이 혜공왕이다. 혜공왕은 상대등 김양상에게 죽음을 당한다. 김양상은 내물왕 10대손으로 37대 선덕왕이다. 선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선덕왕의 족질인 김주원을 신하들이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이날 폭우가 내려 알천을 건너지를 못했다. 그래서 신하들이 상대등 김경신을 추대했다. 김경신이 바로 내물왕 12대손인 38대 원성왕이다.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학문의 깊이와 능력에 따라 벼슬을 내리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을 읽어서 능히 그 뜻을 알고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사람을 상등으로 삼았다. 곡례, 논어, 효경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을 중등으로, 곡례와 효경에만 지식이 있는 사람을 하등으로 뽑았다.

이것이 과거제도의 시초인 셈이다. 그 전에는 궁술과 인물만 가지고 관리를 뽑았다.


괘릉을 보고 나오면서 신라외교의 한 형태인 색공이 떠올랐다. 색공은 당나라에 미녀를 바쳐서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정책이다.


진평왕은 당태종에게 절색의 미인 두 사람을 색공으로 바쳤다. 그러나 위징의 권고를 받은 당태종 이세민은 그 여자들을 신라에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원성왕 8년에 당나라에 김정란이라는 미녀를 바쳤는데 그녀는 국색으로서 몸에서 향기가 났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괘릉을 나와 주상절리로 향했다. 전에는 괘릉에서 주상절리로 가려면 불국사를 지나 석굴암으로 가는 길로 넘어가야 하지만 지금은 터널이 뚫려 곧장 바닷가로 나갈 수 있다. 답사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그날의 날씨다. 오늘은 답사하기에는 최적의 날씨다. 바닷가의 물색이 비취색을 뛸 정도로 맑다.


주상절리가 있는 양남 해안가에 도착하였다. 주상절리는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2012925일에 지정되었다. 그동안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이 출입을 할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기 때문에 군부대가 떠나고 난 후에 야 알려지게 된 곳이다.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동안 활발했던 화산활동으로 형성되었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용암이 급격하게 식어서 굳을 때 육각 또는 오각기둥모양으로 굳어져 생긴 지형이다.

주상절리가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다. 주상절리의 형태도 누운 주상절리, 선 주상절리 등 아주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특히 부채꼴 주상절리는 아주 귀한 형태라고 한다. 부채꼴 주상절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는 전망대를 설치하고 있다. 이 전망대가 완성되고 나면 가까이에서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해안을 따라 산책로가 아주 잘 닦여 있다. 곳곳에 야생화도 피어 있다. 특히 갯메꽃과 기린초가 한창이다.



 이 길은 파도소리길이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있다.


 주상절리를 보고는 가까이에 있는 횟집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는 감은사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