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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경주여행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장항사지

by 황교장 2016. 6. 12.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장항사지

 

감은사지로 가는 길목에는 문무대왕수중릉이 있다. 대왕암은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은 죽어서라도 호국용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바다 속에 장사를 지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대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기공했으나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재위 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한 구멍을 내었으니 그것은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건대 유언으로 화장한 유골을 묻게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으며 그 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






감은사터를 발굴한 결과 금당 계단 동쪽 아래에는 실제로 구멍을 낸 흔적이 발견되었다. 감은사 터에는 삼층석탑 두 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 있다. 멀리서 보아도 이곳의 지형과 참 잘 어울려 평화롭게 보인다.


불교에서 탑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566년에 석가모니가 죽자 화장을 했다. 여기서 나온 신골과 사리를 모아 8개의 탑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탑은 생전의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불교도들로부터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제자, 고승들의 탑을 만들어 세우게 되었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넘어오게 되면서 우리나라에도 탑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탑은 7세기 초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백제탑으로는 익산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이 남아있다. 신라탑은 경주 분황사모전석탑이 남아있을 뿐이다.


불교 도입 후 약 200년 간 우리나라에는 목탑이 주로 세워지다가 삼국시대 말기에 들어 석탑이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백제의 석탑은 목탑의 형상을 석재로 본뜨고 이를 다시 석탑 조형에 알맞게 재구성하여 만들었다. 이러한 백제의 석탑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석탑이 주류를 형성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신라의 분황사모전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 층층이 쌓아 세웠다. 이는 중국의 전탑을 본뜬 것이다. 통일신라로 넘어오면서 백제의 석탑과 신라의 모전석탑을 절충한 석탑이 등장하는데 의성 탑리오층석탑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과도기를 지나 통일신라시대로 넘어오면 석탑을 구성하는 단위 석재가 커지고 석재의 수가 줄어든다. 기단은 2층으로 높아지고 기단부에는 귀기둥과 사잇기둥이 새겨지게 된다.

 탑신의 층수는 대부분 3층으로 이루어지며 지붕 밑의 층단 받침은 5단으로 된다. 처마 끝의 하단이 수평을 이루고 상단은 추녀 끝에서 위가 살짝 들려 탑의 전체적인 조형이 짜임새 있고 안정감이 있으며 장쾌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특징이 처음 나타난 대표적인 석탑이 감은사동서삼층석탑이다.



감은사삼층석탑은 국보 제112호로 신문왕 2(682)에 세워졌다. 높이가 9.5m이고 피뢰침 모양의 찰주(擦柱)까지는 13.4m이다. 2층 기단에 3층 석탑의 전형적인 통일신라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가 한 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개의 부분 석재로 조립되어 있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다. 지대석, 중석, 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하층기단에는 3,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다.


탑신부의 1층은 우주와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통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스듬한 낙수면이 있고 아랫면에는 5단의 층급받침이 있다.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찰주만 남아 있다.


탑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안정감과 상승감이다. 감은사지삼층석탑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성공을 거둔 탑이라고 한다.


3개의 몸돌을 실측해보면 그 폭이 4:3:2의 비례로 상승감에 성공하고, 높이는 4:3:2가 아닌 4:2:2로 나타난다. 이는 1층 몸돌이 2,3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눈높이에서 보는 착시를 감안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를 구성하는 찰주가 있어서 탑의 안정감과 상승감은 물론이고 완벽한 비례감을 나타낸다. 또한 일 금당과 쌍탑이어서 더욱더 장중한 건축적 리듬을 자아낸다고 한다.







감은사 3층석탑을 나와 대종천을 따라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으로 향하면 계곡 건너 우뚝 선 오층석탑이 보인다. 계곡을 건너 길게 놓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두 기의 탑이 나타난다.


서탑은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동탑은 일층탑신 위에 옥개석만 포개 놓았다. 그 옆에는 불상은 간 곳 없고 불상대좌만 남아 있어 쓸쓸함과 적막감을 자아내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이곳은 대한 기록이 한 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지명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사지라고 불린다.



1923428일 도굴범들이 사리장치를 탈취할 목적으로 광산에 쓰이던 폭약으로 이곳의 오층석탑과 불상을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일제에 의해 서오층석탑은 193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동탑은 계곡에 떨어져 있던 것을 1966년에 수습하여 서탑 옆에 지금처럼 포개놓았다. 불상은 몇 번의 복원 수리를 거쳐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다.


장항사지 석탑은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오층석탑이다.









장항리 오층석탑은 탑 표면의 인왕상 조각 덕분에 주목을 받았다. 인왕상 조각은 부조로 새겨져 있다.


부조가 새겨진 대표적인 석탑은 원원사지삼층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의 사방불과 팔부신중상 및 천인상, 화엄사서오층석탑의 불보살, 실상사 백장암삼층석탑 등이다.


 이중 실상사 백장암삼층석탑을 최고로 친다. 백장암삼층석탑에는 불보살, 신장, 주악천인, 난간, 연꽃무늬 등을 가득 새겨 장식탑의 극치를 보여준다. 장항리 오층석탑에 있는 부조도 매우 화려하고 섬세하다.


서오층석탑은 2층 기단에 5층 석탑이다. 기단부는 널찍하여 안정감을 나타낸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로 되어 있다. 1층 몸돌과 2층 이상 몸돌의 체감률은 심하나 2층 이상에는 거의 없다. 1층 몸돌 양 우주 중앙에 직사각형의 문비를 새기고 그 좌우에 인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에는 양쪽 우주만이 조각되었을 뿐이다. 인왕상은 연꽃을 밟고 서 있는 입상으로 각각 손에 무구(武具)를 쥐고 어깨가 벌어지고 두 다리의 근육이 당당하게 보인다.

부라린 눈과 큰 코는 구멍이 숭숭 뚫린 화강암의 재질과 어울려 더욱더 강한 인상을 자아낸다.


 상륜부는 노반석만 남아 있다. 노반은 방형의 육면체로 상단에는 원형의 찰주공이 있으며 2단의 돌출대를 두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동탑은 기단부는 완전히 없어지고 탑신부는 몸돌 1층만이 남아 있다. 그 위에 5층까지 지붕돌만 쌓아 놓았다. 1층 몸돌에는 문비와 인왕상이 새겨져 있다.


석조 불대좌는 위아래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졌다. 윗부분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 연화대좌이다. 아랫부분은 측면의 안상(眼象) 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를 조각한 팔각형이다.


 이중 사자상으로 표현된 신수상은 포효하는 듯한 생동감과 익살스러움으로 일명 '아톰'으로 불린다고 한다.





폐사지라 이곳에 올 때마다 적막하고 쓸쓸했는데 오늘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왔더니 그 적막함이 덜하다.

연수생들의 표정도 해맑다. 날씨가 좋고, 한적하여 이곳을 떠나기 싫다고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고 한다.

삼삼오오로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어떤 분은 한 움큼이나 찾아 손에 들고 싱글벙글이다. 하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길이 막히기 전에 출발을 하여 무사히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연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준비한 서부장과 좋은 사진을 제공한 김현지 양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많은 행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참고 : 신라 역대 왕의 년표


신라는 총 56명의 왕으로 이어졌다. 이는 세계 역사상 로마 역사 다음으로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1대왕인 혁거세왕이 BC57년에 나라를 세워 마지막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친 935년까지 무려 992년 동안 나라를 유지했다.

 

박씨왕이 10명 석씨가 8명 김씨가 38명이다.

 

1대 박혁거세 (BC57-AD4) : 신라의 시조이며 왕호는 거서간

2대 남해왕 (4-24) : 박혁거세의 맏아들이며 석탈해를 사위로 삼은뒤 정사를 맡김

3대 유리왕 (24-57) : 남해왕 아들

4대 탈해왕 (57-80) : 남해왕 사위(석씨)

5대 파사왕(80-112) : 유리왕 아들

6대 지마왕(112-134) : 파사왕 아들

7대 일성왕(134-154): 유리왕 아들

8대 아달라왕(154-184) : 일성왕 아들

9대 벌휴왕(184-196): 4대 석탈해왕 손자(석씨)

10대 나해(내해)(195-230) : 벌휴왕의 손자

11대 조분왕(230-247):벌휴왕 손자

12대 첨해왕(247-261): 조분왕 동생

13대 미추왕(262-284) : 김알지의 7대손 조분왕 사위(김씨)

14대 유례왕(284-298) : 조분왕 아들 (석씨)

15대 기림왕(298-310): 조분왕 손자

16대 홀해왕(9310-356):나해왕 손자

17대 내물왕(356-402) : 13대 미추왕의 조카 김알지 8세손(김씨)

18대 실성왕(402-417) : 내물왕 4촌 동생

19대 눌지왕(417-458) : 내물왕 아들

20대 자비왕(458-479) : 눌지왕 아들

21대 소지왕(479-500) : 자비왕 아들

22대 지증왕(500-514) : 소지왕 6촌 동생

23대 법흥왕(514-540) : 지증왕 아들

24대 진흥왕(540-576) : 법흥왕의 동생 김입종과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의 아들

25대 진지왕(576-579) : 진흥왕 아들

26대 진평왕(579-632) : 진지왕의 형 동륜의 아들

27대 선덕여왕(632-647) : 진평왕 딸

28대 진덕여왕(647-654) : 선덕여왕 4촌동생

29대 태종 무열왕(654-661) : 진지왕 아들 김용수와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의 아들

30대 문무왕(661-681) : 태종 무열왕 아들

31대 신문왕(681-691) : 문무왕 아들

32대 효소왕(692-702) : 신문왕 아들

33대 성덕왕(702-737) : 효소왕 동생

34대 효성왕(737-742) : 성덕왕 아들

35대 경덕왕(742-765) : 효성왕 동생

36대 혜공왕(765-780) : 경덕왕 아들

37대 선덕왕(780-785) : 내물왕 10대손 혜공왕 살해

38대 원성왕(785-798) : 내물왕 12대손

39대 소성왕(798-800) : 원성왕 태자 인겸의 아들

40대 애장왕(788-809) : 소성왕 아들

41대 헌덕왕(809-826) : 소성왕 동생 애장왕 살해

42대 흥덕왕(826-836) : 헌덕왕 동생

43대 희강왕(836-838) : 원성왕 손자 헌정 아들. 자살

44대 민애왕(838-839) : 원성왕 손자 충공 아들. 왕위 찬탈 후 장보고 군사에게 살해됨

45대 신무왕(839) : 원성왕 손자 균정 아들. 종기로 인해 죽음. 재위 6개월

46대 문성왕(839-857) 신무왕 아들. 56대 경순왕이 문성왕 후손

47대 헌안왕(857-861) : 신무왕 동생

48대 경문왕(861-875) : 희강왕 손자 헌안왕 사위. 우리임금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

49대 헌강왕(875-886) : 경문왕 아들. 처용가의 주인공

50대 정강왕(886-887) : 경문왕 둘째 아들

51대 진성여왕(887-897) : 경문왕 딸

52대 효공왕(897-912) : 헌강왕 서자

53대 신덕왕(912-917) 8대 아달라왕의 먼 후손 헌강왕 사위 박씨왕조 부활 타락한 효공왕이 박씨세력에 의해 제거되자 왕위에 오름(박씨)

54대 경명왕(917-924) : 신덕왕 아들

55대 경애왕(924-927) : 신덕왕 아들 경명왕 동생. 포석정에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살.

56대는 경순왕입니다.(927-935) : 46대 문성왕의 후손. 경애왕의 외종제.(김씨)

왕건에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