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과 독락당
명리학으로 열어가는 진로상담 경주 연수2
점심은 전복순두부 정식이다. 그 동안 경주에 오면 이 집에 자주 들러 보니 가격 대비 괜찮은 집이다. 그런데 음식이라는 것이 개인차가 심해 입맛이 다 다르기 때문에 단체가 식사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런데 비교적 잘 드셨다고 하니 다행이다.
다음 코스는 이곳에서 30여 분을 차로 이동을 해야 한다.
다음 여정은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은 안강읍에서 영천 방향으로 약 5분 정도 가다가 보면 옥산서원 표지판이 우측에 나온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산세가 예사롭지가 않다. 이곳이 바로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다. 이 옥산리에 옥산서원이 있다.
옥산서원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창건 2년 뒤인 1574년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우리나라 오대서원 중 하나다. 즉 도산서원, 소수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과 함께 오대 서원의 명성을 누리고 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곳의 문화유산 해설사는 5대 서원이라고 하지 않고 4대 서원 중 하나라고 강조를 한다. 4대 서원에서 병산서원이 빠지는가를 질문을 하니 도동서원이라고 한다. 이는 이치에 맞지가 않다고 생각된다. 문묘에 배향된 동방오현의 수좌를 차지한 분은 도동서원에 모셔진 김굉필선생이기 때문이다. 4대 서원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아마 네 번째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인 듯하다.
옥산서원은 입구에서부터 걸어서 들어가면 수백 년 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서원 바로 앞에 주차장이 만들어져 편리하긴 하지만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10여 그루나 된다. 오전에 진평왕릉에서 보았는 회화나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오래된 고목이다.
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에는 맑은 물이 너럭바위 위로 흐르면서 곳곳에 소와 운치 있는 폭포를 만들어낸다. 계곡 주변에 수백 년 된 굴참나무와 느티나무, 회화나무가 울창하여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역락문과 현판
서원의 정문은 역락문(亦樂門)이다. 이 역락문은 논어에 있는 ‘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이자원방래 불역낙호)’의 ‘亦樂’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역락문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1515-1590)이 명명하고 현판은 한석봉(1543-1605)의 글씨다.
무변루
역락문 뒤에는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가 나온다. 이층으로 된 누각이다. 이 무변루도 의미가 있다. 무변은 주염계찬(周廉溪贊) 가운데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처음 문루 이름을 납청루(納淸樓)라 하였으나 노수신이 선생이 남긴 업적과 생애에 맞지 않다고 하여 무변루로 고쳤다고 한다.
무변루(無邊樓) 글씨 역시 석봉 한호의 글씨다. 무변루를 마주보는 건물이 옥산서원의 주 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이다. 구인의 뜻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하는 데 있다는 선생의 저서 가운데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구인당(求仁堂)의 글씨도 역시 석봉 한호의 글씨다.
구인당
그리고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유홍준 교수는 완당평전에서 “전서의 굳센 맛을 살려내어 이른바 ‘솜으로 감싼 쇳덩이,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으로 쓴 글씨’라고 이야기되는 추사체의 힘이 그대로 느껴진다.” 라고 평하고 있다.
옥산서원 현판 위는 추사 아래는 아계
추사글씨의 현판 뒤에는 이산해가 쓴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이산해(1539-1609)는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선생의 친조카이다. 영의정을 지냈고 명필로도 유명한 분이다.
토정선생은 조카인 이산해선생이 태어날 때 울음소리를 듣고는 저 아이가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인물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아계 이산해가 쓴 현판은 신을 벗고 구인당 마루에 올라서야 보인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선조임금이 아계 이산해에게 명하여 쓰게 한 이 현판은 1838년(헌종4년)에 구인당이 소실되어 새로 지으면서 이산해의 편액은 구인당 내벽에 달게 하고, 헌종은 추사에게 다시 현판을 쓰게 하여 전면에 달게 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왕명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다. 이 옥산서원이야말로 명필들의 전시장을 보는 듯하다.
옥산서원의 풍수를 보면 어래산이 북 현무이고 자옥산이 남 주작인 안산이다. 그리고 자계천은 북출 남류로 보야야 하겠다. 좌향은 거의 서향에 가깝다. 주로 서원이나 향교는 정남향으로 세우는데 반해 옥산서원은 서향으로 지어졌다. 이는 산세와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 산이 있을 경우에는 강학당이 앞에 오고 위패를 모신 사당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구조이다. 그리고 강학당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옥산서원은 동재인 민구재(敏求齋)는 남재이고, 서재인 암수재(闇修齋)는 북재인 셈이다.
민구재와 암수재도 의미가 있다. 민구재의 민구(敏求)는 호고민이구지(好古敏以求之)란 뜻이라고 한다. 이는 어질고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데 그쳐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학문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민첩하게 잠시도 머무름 없이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데 있음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암수재(闇修齋)의 암수(闇修)는 주자자찬 가운데 암연자수(闇然自修)의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闇은 숨을 암이고 修는 닦을 수이니 이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나날이 새롭게 밝게 펼쳐져 나감을 뜻한다. 이처럼 이름 하나하나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모신 신도비각이 있다. 이 신도비는 고봉 기대승 선생이 짓고 이산해 선생의 글씨이다.
신도비
그럼 여기서 이언적 선생에 대하여 알아보자. 선생은 동방오현 중 한 분이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동방오현이라고 일컫는다.
선생은 퇴계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회재(晦齋)다. 외가인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1491년에 태어났다. 서백당은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쓴다는 의미라고 한다. 풍수상 서백당 태실에는 인물이 3명이 배출된다고 한다. 한 분이 손중돈선생이고 또 한 분은 회재선생이며 마지막 한 분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 인동현감,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1530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몰려 향리인 이곳 자옥산(紫玉山) 독락당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이후 이조, 예조, 병조의 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45년 인종이 죽자 종1품인 의정부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서계10조(書啓十條)를 올렸다.
이 해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1553년 유배지에서 63년의 일생을 마감했다.
옥산서원을 나와 바위 위에 가로 질러놓은 나무로 된 징검다리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이 주차장 앞에 고택이 있다. 독락당이다. 옥산리는 약 300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다.
이중에서 약 200여 호가 회재선생의 후손인 여강(驪江) 이씨라고 한다. 여강 이씨 옥산파의 종가집이 바로 독락당(獨樂堂)이다. 일명 옥산정사라고도 한다.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 가정집이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면 독락당을 볼 수가 없다. 문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오직 문화유산 해설사만이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설사님에게 잘 보여야 한다. 구인당에서 인(仁)에 대한 설명에 대해 겸손하지 못하고 아는 척하여 조금은 찝찝하였는데 다행히 전혀 개의치 않고 독락당을 다 보여 주신다.
독락당은 회재선생이 사간으로 재직할 당시에 중종과 사돈이 되는 김안로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그들 일당에 의해 파직된 후 이곳에 머물면서 지었다. 중종 11년(1516)에 지어진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독락당 (옥산정사,문화재청 사진)
독락당 담장 살창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보다 살창이 있어 앉은 곳에 따라서 계류가 달리 보이게 된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독락당(獨樂堂)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고 옥산정사(玉山精舍) 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다.
이 집의 종손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난다. 선생의 모든 유품이 자기 집에 있지 양동마을의 무첨당에는 없다고 한다. 독락당이 회재선생의 실제 후손임을 유난히 강조를 하였다.
그때 해설사로 함께 동행했던 분은 이 마을 출신이면서 선생의 후손인 고려대학교 교수님이었다. 내가 듣기에 종손이 하도 그 사실을 강조하길래 왜 저렇게까지 강조를 하는지를 질문을 했다. 그 답변은 다음과 같다.
회재선생의 큰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어 양자를 데린 것이 지금의 양동마을 여강 이씨들의 대종가인 무첨당이고, 독락당은 선생의 작은부인에게서 태어난 주손(冑孫, 맏손자)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법으로는 무첨당은 비록 양자이지만 대종가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독락당은 선생의 피를 직접 이어 받은 실제 자손들이다.
그런데 해설사분에게 이 이야기를 언급을 하려고 하니 손사래를 치고 있다. 바로 저 분이 종손이라고 한다. 10년 세월이란 사람을 많이 변하게 만든다.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나이가 더셨다.
독락당에서 담을따라 쪽문을 지나면 고풍스런 정자가 아주 운치 있게 서 있다. 계정이다. 계정은 자계천의 너럭바위에 다리를 걸치고 서있는 누각형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계정
계정현판
인지헌 현판
계정에는 계정(溪亭)이라는 현판 이외에도 인지헌(仁智軒)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둘 다 한석봉의 글씨다. 특히 인지헌의 인(仁)과 지(智)는 회재선생의 구인(求仁)과 논어의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계정의 한쪽 작은방 위에는 양진암(養眞庵)이라고 쓴 현판이 있다. 양진암의 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다. 이는 암자의 이름과도 같다. 실제 회재선생과 친하게 지낸 정혜사의 스님에게 아무 때나 스스럼없이 찾아와 머물게 하려는 배려에서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계정에 앉으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우리 일행들은 계정의 경치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어떤 분은 여기서 낮잠을 자고 싶다고 하고 또 다른 분은 시원한 맥주 한 잔 했으면 한다. 계정에 앉아서 계곡을 내려다보면 바위 위로 물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 다 보인다. 바로 이곳이 관어대이다. 물고기 노는 것을 보면서 관조한다는 의미에서 관어대(觀魚臺)라고 한다.
회재선생은 독락당 주변의 산과 자계천의 바위를 사산오대(四山五臺)라고 이름지었다. 퇴계선생이 사산오대를 반석에 새겨 놓기 위해서 쓴 친필이 퇴계유묵(退溪遺墨)이다. 퇴계유묵은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사산(四山)은 북쪽 산봉우리인 도덕산(道德山),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무학산(舞鶴山), 동쪽 편에 있는 봉우리인 화개산(華蓋山), 서쪽 봉우리인 자옥산(紫玉山)을 말한다.
그리고 계정에서 볼 수 있는 계곡의 바위 다섯을 골라 오대(五臺)라고 이름 붙였다.
물고기 노는 것을 보면서 관조하는 관어대(觀魚臺), 돌아감을 노래하는 영귀대(詠歸臺),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의 탁영대(濯纓臺), 마음을 맑게 하는 징심대(澄心臺), 마음을 깨끗이 하는 세심대(洗心臺)가 그것이다.
세심대
계정 자리인 관어대(觀魚臺)에 앉으면 영귀대와 관어대를 내려다 볼 수 있고, 상류에 있는 증심대와 탁영대를 바라볼 수 있다.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에 있어 멀리 마음으로 볼 수 있다.
다음 여정인 정혜사지 13층석탑을 답사를 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모 교장선생님이 크게 놀라신다. 계정에 있는 신발이 예뻐서 한 번 신어 보려고 하는데 그 속에 제법 큰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독사도 놀라서 밖으로 나온 것이다. 몸은 얼룩무늬에 머리가 삼각형인 걸 보면 살모사가 분명하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였다.
내가 어릴 적에는 독사가 많았다. 나는 독사를 보는 즉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인즉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독사도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파충류라는 것을 배우고 난 후에는 독사를 죽이지 않게 되었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에서 지체하다 보니 시간 관계상 정혜사지까지는 가지 못하여 다음으로 기약하였다.
현장 답사 중에 미흡한 설명이 있어 보충하시라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연수에 참가해 주신 모든 분들과, 특히 이 연수의 주무를 맡아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신 우리 학교 지평옥 부장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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