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여행1
연길과 도문 그리고 용정
2023년 10월 6일 오전 9시에 3박 4일 일정으로 친구 3명과 백두산 여행을 떠났다. 출발 하루 전날 같이 가기로 한 친구 한 명이 코로나에 걸려 같이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우리 일행은 부산 김해국제공항에서 출발하였다. 날씨가 비교적 좋은 편이지만 구름이 많아 제대로 풍수를 잘 감상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지만 중간중간 산과 강들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새 비행기는 육지를 벗어나 바다 위를 날고 있다. 섬들이 나타났다. 요동반도 가까이에 있는 섬들이다. 비행기는 기수를 동북쪽으로 돌려 날아가고 있다. 아래에 펼쳐지는 산세들이 낯설지 않다. 아마 옛 고구려의 영토라 이곳에서 살았던 유전자가 나의 몸속에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연길공항 가까이 가자 승무원이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고 다시 열지 못하도록 한다. 연길공항은 군용비행장과 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보안을 위해서라고 한다. 연길공항을 나오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입간판이다. 입간판에 한글이 중국어와 같이 적혀 있다. 연길시(延吉市,Yánjí shì)는 중화인민공화국 동북지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정부가 있는 현급시이자 주도이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대인 도문시(투먼시,图们市,圖們市, túmén shì)로 향했다. 연길시에서 도문시로 가는 길은 비교적 잘 조성되어 있다. 도로를 따라 넓은 구릉으로 펼쳐진 논과 옥수수밭을 보고 가니 봉오동 대첩과 청산리 대첩 그리고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이 떠올랐다.
봉오동 전투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주고 승리했다.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었다고 한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다. 독립군의 전사자는 불과 1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이곳 근처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또 달랐다. 또한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간도의 위치가 궁금했다.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숙종 38년)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하여 세워진 경계비이다. 정계비가 세워진 곳은 백두산 장군봉(將軍峰, 2,750m)과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사이 대략 중간지점인 해발 2,150m로, 백두산 천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
내용은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오라총관 목극등, 봉지사변, 지차심시,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늑석위기, 강희 오십일년 오월십오일)”이다. 이는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는 내용이다.
조선에선 토문강을 천지에서 발원하는 송화강의 상류로 여겼고, 청나라는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주장했다. 두만강을 중국에선 도문강(圖們江)이라 하는데 둘 다 만주어 ‘투먼’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두만’의 원래 뜻은 만주어로 ‘만(萬)’을 뜻하는 투먼(tumen)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 도문시 역시 도문강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그런데 명대의 사서 요동지는 토문강을 두만강과 별개로 인식했다. 요동지는 토문하(土門河)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土門河 城 東北 五百里 源出 長白山 北 松山 東流(토문하는 성의 동북 5백 리에 있는데, 장백산(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송산이 있고 동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이로 보아 토문은 분명히 송화강의 지류이다.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의 지점인 백두산 동쪽의 대연지봉에서 발원하기에 분수령이 형성되지 않는다. 정계비 근처의 물 한 줄기가 토문강으로 이어져 송화강에 합류하기에 조선 측의 주장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버렸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도문시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도문조중친선문화거리로 불리는
광장에 가니 조선족 동포로 보이는 노인 두 분이 우리 옛노래를 틀어놓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가로운 모습이다. 광장을 지나 강이 보이는 곳으로 가자 그곳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다. 철조망 너머에 보이는 강이 두만강이다.
강을 가로지르는 약 100m 길이의 다리가 도문대교이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다리의 중간을 기점으로 중국 영토와 북한 영토로 나뉜다. 다리 중간에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국경선이 칠해져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강 너머에 있는 곳은 한반도의 최북단 북위 43도의 함경북도 온성군이다. 직선거리로 300m 정도로 보인다. 강폭도 70m 정도로 보인다.
북한 풍경은 어릴 적 많이 보아온 모습과 비슷하다.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여 산은 민둥산이 되어 산사태가 난 흔적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강변의 평지에는 논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강변을 따라가자 두만강 대교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도문시는 두만강 연안에서는 유일하게 북한과 철도로 연결되어 있어 중국과 북한의 교역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마침 강에는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다. 전에는 한국 사람도 유람선을 타고 관광을 할 수 있었는데 남북관계가 악화된 이후에는 중국인들만 탈 수 있다고 한다. 이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픈 가슴을 안고는 용정으로 향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연길을 지나 20여 분을 더 가면 용정이 있다. 시종 무거운 마음으로 차창을 스치는 풍광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이드가 지금 지나고 있는 강이 해란강이라고 한다. 윤해영의 노랫말에 조두남이 곡을 붙인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이다. 선구자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절)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절)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 가사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용정에 있는 지명들이다. 해란강을 지나 용두레 우물가로 갔다. 용두레 우물이 용정시 이름의 유래가 된다. 이 샘으로 인해서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고 쓰인 비석과 함께 1986년 용정현 인민정부에서 복원한 우물이 남아 있다.
용두레 우물을 보고 3km를 더 가면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에 도착한다. 시간 관계상 일송정은 차창으로만 보았다. 일송정은 비암산 정상에 있는 정자를 말한다. 원래는 이 산 정상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모양이 정자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일송정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용정시는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곳으로, 산 정상에 독야청청한 모습으로 우뚝 선 소나무는 독립의식을 고취하던 상징이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1938년 일제는 이 소나무를 고사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용정은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이다.
윤동주 생가
용정이 낳은 인물로는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와 독립운동가 겸 수필가인 송몽규(宋夢奎, 1917~1945)가 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고종사촌 형이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고, 송몽규 또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5년 3월 7일에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사망하였다. 두 분 모두 생체실험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문익환(1918~1994) 목사도 이곳 용정 출신으로 이들 셋은 친구이다.
뒷줄 가운데가 문익환 맨 우측이 윤동주
그리고 용정 출신으로 지금도 살아 있는 특이한 분이 한 분 있다. 간첩 무하마드 깐수로 알려진 정수일 교수다. 그는 1934년 용정 태생으로 중국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했다.
대한민국에 귀화한 남파 간첩으로 12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 천재이자 실크로드를 포함한 동서 문명 교류사, 중동 지역 역사, 문화학에 대한 권위자이다. 그가 저술한 실크로드에 관한 책을 읽고 감명받아 퇴직하는 해에 가장 먼저 한 여행이 실크로드였다. 이처럼 용정이 낳은 인물들을 생각하면서 단풍이 절정인 풍광을 보며 도착한 곳이 백두산 관광의 기점이 되는 이도백하 마을이다.
저녁으로 삼겹살과 백두산에서 채취한 귀한 송이버섯을 친구들과 맛있게 먹고는 백두산 여행 첫날을 보냈다.
백두산 송이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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