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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문학의 섬 남해 노도와 구운몽

by 황교장 2026. 3. 15.

문학의 섬 남해 노도와 구운몽

 

2026년 3월 4일 문학의 섬 남해 노도 답사를 위해 일찍 나섰다. 노도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작가로 잘 알려진 김만중(1637~1692)의 유배지다. 그동안 멀리서 바라만 보고 다녔지 노도를 직접 답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노도

노도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앞에 있는 섬으로, 벽련마을 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 배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벽련마을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아주 오래된 마을임을 알려주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있어 여름철에는 나무 그늘이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이곳 벽련마을에서 1.2km 떨어져 있는 섬이 노도다.

노도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왔을 때 뗏목을 타고 노를 저어 건너왔기 때문에 섬 이름도 노도(櫓島)가 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이 섬에서 배의 노(櫓)를 많이 만들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섬의 생김새가 삿갓을 닮았다 하여 ‘삿갓섬’이라고도 불린다.

노도

전에는 노도에 가는 정기 여객선이 없었는데 지금은 정기여객선인 ‘노도호’가 있어 가기가 쉬워졌다.

노도호

12시 반 배로 출발하였다. 바닷물의 색은 봄바다답게 옥빛이다. 맑은 바닷물과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는 데 어느새 노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노도 선착장은 섬의 북쪽에 위치한다. 북쪽에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어 마을도 북쪽에 있을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섬의 풍수를 보면 남쪽이 북현무가 되고 북쪽이 남주작인 셈이다. 남쪽은 망망대해에서 불어오는 남풍을 막아주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북풍은 남해가 자랑하는 금산이 막아준다. 선착장에 내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노도 문학의 섬’의 조형물이다. 촌스럽지 않고 세련되어 잘 조성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도 문학의 섬

마을로 가려면 경사가 제법 심한 길을 올라야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작은 섬들은 파도 때문에 이런 형태로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제법 힘들게 오르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9가구, 18명이 사는, 해안선 길이가 3.13km의 작은 섬이다. 섬 중의 섬인 셈이다.

마을 길을 따라 걸어가자 ‘노도 문화관’이 나온다. 문화관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일품이다.

금산이 남주작으로 바로 앞에 있다. 멀리 호구산, 설흘산 등이 노도를 포근히 감싸 안은 형상이다. 문화관이 노도 최고의 명당으로 보인다. 원래 초등학교 분교 터인데 폐교된 이후에 새롭게 문화관으로 단장하여 책을 읽고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

.

한때에는 70가구에 주민 232명, 분교생이 32명이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 한 분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교실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그래도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고 한다. 그동안 전국을 답사하면서 느낀 점은 고을마다 최고의 풍수 터에는 관청보다도 향교나 학교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원동력은 교육열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게다.

문화관을 나와 바다를 바라보면서 언덕길을 따라 오르자 향긋한 매화향이 코를 자극한다. 매화가 한창이다. 길을 따라 고개를 넘자 동백나무 군락지가 나왔다

. 작년에는 전국의 동백꽃이 허드러지게 피었는데 올해는 해거리를 하는지 꽃송이가 맺혀 있는 가지가 거의 안 보인다. 길을 따라 내려가자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노도 문학의 섬’ ‘김만중 문학관’이 나왔다. 이 작은 섬에 문학관이 두 개나 있는 셈이다.

문학관이 열려 있어 들어가 보니 해설사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김만중의 생애에 대한 영상을 5분간 보여주었다. 영상을 보고는 이층으로 오르자 전시실과 전망대가 잘 꾸며져 있다. 전시실에는 김만중에 대하여 상세히 잘 전시되어 있다. 특히 그동안 국내에서 출판된 김만중에 관한 책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자 해설사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물어보라고 한다. 마침 궁금한 게 있어 ‘김만중의 할아버지가 김집의 형인지 동생인지가 궁금하다’고 하자 해설사가 도로 김집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로 ‘동방 18현’ 중 한 분이며, 부자가 나란히 성균관과 향교의 대성전에 ‘동방 18현’에 모셔진 것은 이들 부자가 유일하다‘고 하자, 해설사가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제가 도로 배워야 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나니 괜히 잘난 체한 듯하여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집(金集, 1574-1656)의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분이다. 김집은 이이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부친 김장생의 뒤를 이어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이의 학맥을 계승하여 기호학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집 이후 그의 문하생인 송시열을 당수로 하는 노론과 또 다른 문인 윤선거의 아들 윤증을 당수로 하는 소론으로 나뉜다. 따라서 김집은 노론과 소론의 공동 조상인 셈이다. 그는 율곡 이이의 서녀 사위이기도 하다.

김장생의 첫째 아들 김은(金檃, 1567~1592?)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의병대원으로 전투에 참전 중 실종되었다. 둘째 아들은 김집((金集, 1574-1656)이고, 셋째 아들이 김만중의 할아버지인 김반(金槃, 1580~1540)으로 사헌부 대사헌, 이조 참판 등의 요직을 지냈다.

김만중 문학관을 나와 서포초옥과 야외전시장, 생태연못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문학관 위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오르자 ‘서포 초옥’이 나왔다. 문학관 자리에 본래 김만중이 살던 초가가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초옥에 걸려 있는 액자에 오언절구가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김만중이 이곳에서의 심정을 노래한 것 같았다. 이 시는 ‘서포집’에 실려있는 시로 제목은 ‘擬子夜歌(의자야가)’이다.

 

常矜顔色艶(상긍안색염) 언제나 얼굴 곱다 자랑하니

秪把芙蓉比(지파부용비) 다만 부용에 견주었네

已看芙蓉花(이간부용화) 조금 있다 부용꽃을 보니

萎落秋江水(위락추강수) 시들어 가을 강물에 떨어졌네

 

금산

-젊은 날이 화용신도 늙고 나면 부질없다-

어느 누구도 시간의 세월을 비켜가지 못합니다

한때의 부귀영화도 일장춘몽일 뿐이지요

시간이 흘러가고 나면 후회만이 남게 되지요

그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의 세상을

알차고 보람있게 사는 것이 최선이랍니다.

 

백옥 같은 미인인 화용신(花容身)도 늙으면 소용없다는 뜻의 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러한 내용의 시들이 가슴에 와 닿아 씁쓰레함을 느끼면서 길 따라 오르자 너른 터가 펼쳐진다. 야외전시장으로 ‘구운몽원’과 ‘사씨남정기원’이다. 소설의 주요 장면을 모티프로 동상을 세워 이야기를 엮어간다. 동상과 그 아래 적힌 설명을 보면 소설 내용을 대강 알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야외전시장에서 100m쯤 더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이는 산 정상에 정자가 서 있다. 정자에 오르자 금산의 수려한 풍광과 다랭이논으로 유명한 가천마을도 한눈에 다 들어온다. 멀리 여수 돌산도와 금오도, 미조의 호도와 조도, 두미도와 욕지도까지 또렷하게 보인다.

아침에 날이 쌀쌀하여 롱패딩을 입고 왔더니 정자까지 오르다 보니 온몸이 땀이다. 땀에 젖은 내의를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신선이 된 기분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 몸의 근육량은 급격하게 감소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열심히 근육운동을 하고 있어 비록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친구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즉석에서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늙어갈수록 친구들에게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데 자랑도 유전인 것 같다.

작은손녀는 큰손녀와 달리 할배를 닮아 사주 일주도 같고 왼손잡이에다가 자랑쟁이로 태어난 걸 보면 자랑도 유전이 맞는 것 같다.

사주 이론상 타고난 성품대로 사는 게 행복한 삶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자랑하고 나면 자랑한 만큼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한다.

이 또한 나만의 삶의 방식일 것이다.

정상에서 한참을 즐기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와는 또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금산과 주변 산세의 비경이 더욱 빛나 보였다. 노도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의미가 있는 문학의 섬으로 둘러볼 만한 가치가 있다.

배 시간에 맞추어 선착장으로 내려오니 노도호가 기다리고 있어 무사히 백련마을에 되돌아왔다.

 

※ 여기서 김만중이 쓴 한글소설 구운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구운몽(九雲夢)은 선천에 유배된 1688년(숙종 6)년에 저술에 착수하여 다시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게 되는 이듬해에 남해 유배 도중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의 저술 동기에 대해서는 그가 혼자 적적하게 계실 어머니를 걱정하여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지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구운몽(九雲夢)에서 구(九)는 성진과 팔선녀를 가리키고, 운(雲)은 인간의 삶을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즉 구운몽은 아홉 구름의 꿈, 아홉 사람이 꾼 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운몽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 인도에서 온 육관 대사가 형산 연화봉에 절을 짓고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하루는 육관 대사에게 여러 번 찾아와 설법을 들었던 동정호의 용왕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제자인 성진을 보냈다. 성진이 떠난 뒤에 남악에 사는 위부인이 팔선녀를 보내 육관 대사에게 선물을 전했다.

성진은 용왕이 권하는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연화봉을 구경하던 팔선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해가 기울어서야 절로 돌아왔다. 팔선녀를 만난 후에 성진은 속세의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이를 알아차린 육관 대사는 성진을 저승으로 보냈다. 팔선녀 역시 같은 처지가 되었다.

그 뒤에 성진과 팔선녀는 각기 인간 세상에 태어났다. 성진은 양 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양소유가 되었다. 원래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던 양 처사는 양소유가 어렸을 때 집을 떠났다. 양소유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어느덧 열다섯이 된 양소유는 과거를 보려 집을 떠났다. 장안으로 가던 길에 화음현에서 진 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났다. 둘은 시를 지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혼인을 약속했다.

하지만 장군 구사량이 난리를 일으킨 통에 양소유는 산으로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거문고를 배웠다. 양소유는 도사에게 받은 거문고와 퉁소를 들고 산에서 내려와 진채봉을 찾았다. 하지만 진 어사는 난리가 끝나자 죄인으로 몰려 죽었다. 진채봉은 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끌려가고 없었다.

양소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에 다시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났다. 양소유가 낙양에 이르렀을 때였다. 천진교의 누각에서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아름다운 기생 계섬월을 만나 인연을 맺는다.

장안에 도착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외사촌이자 유명한 여자 도사인 두련사를 찾아갔다. 두련사는 양소유의 짝으로 사도 벼슬을 하는 집안의 딸 정경패를 추천하며 장원 급제한 다음 혼담을 넣자고 했다.

청혼 전에 정경패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양소유는 거문고를 잘 타는 여자 도사로 변장하여 정경패의 집으로 가서 정경패를 만났다.

과거에 장원 급제한 양소유는 한림학사가 되어 정경패와 혼인을 하기로 했다. 정경패는 자신의 시녀 가춘운이 양소유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예전에 양소유가 여장을 하여 자신을 속인 일을 되갚아 주고 싶다면서 가춘운에게 귀신으로 변장하여 양소유를 유혹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양소유는 가춘운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양소유는 고향의 어머니를 모셔 와 혼례식을 치러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이때 하북 지방의 세 절도사가 반란을 일으켜 조나라, 위나라, 연나라를 세웠다. 이들 나라에 양소유는 항복하라는 조서를 썼다. 두 나라는 항복했지만 연나라는 응하지 않았다. 양소유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로 가서 항복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낙양에서 양소유는 계섬월을 다시 만났다. 계섬월의 친구이자 하북의 유명한 기생인 적경홍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양소유는 정경패와 혼례를 치르고 나서 계섬월과 적경홍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하고는 장안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양소유에게 예부 상서 벼슬을 겸하게 하여 더욱 아끼며 나랏일을 의논했다. 하루는 밤늦도록 궁에서 일하던 양소유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퉁소 소리를 듣고는 양소유도 퉁소로 화답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푸른 학 한 쌍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 그 퉁소 연주를 한 이는 황제의 여동생 난양 공주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황제는 양소유를 난양 공주의 신랑으로 삼고자 하자 황태후 역시 크게 기뻐했다.

한편 진채봉은 문서와 문장을 관리하는 궁녀로 있으면서 난양 공주의 시중도 들고 있었다. 하루는 황제가 양소유를 시켜 궁녀들에게 시를 한 수씩 써 주게 하자 궁녀들이 수건과 부채를 준비했다.

이때 진채봉 역시 부채에 양소유의 시를 받았다. 진채봉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양소유의 시 아래에 자신의 마음을 적어 놓았고, 이를 본 황제가 양소유와 진채봉의 지난 일을 알게 되었다.

양소유는 정경패와 혼인을 취소하고 난양 공주와 혼인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지만 거듭 물리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때 토번의 오랑캐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나라가 위태로워졌다.

황제는 양소유를 감옥에서 불러들이고는 양소유에게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아가게 했다.

전쟁 중 어느 날 밤 여자 자객인 심요연이 양소유를 찾아왔다. 심요연은 양소유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분으로 양소유를 섬기러 왔음을 밝혔다. 양소유는 심요연과 인연을 맺고는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며칠 뒤 양소유의 군대는 반사곡이라는 골짜기에서 적에게 둘러싸여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그날 밤 양소유가 고민하다가 깜빡 졸음에 빠졌는데 꿈속에서 동정호 용왕의 딸인 백능파가 도와주어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후 양소유는 오랑캐를 물리쳤다.

한편 난양 공주는 정경패를 직접 만나 보고는 마음에 들어 정경패와 함께 양소유의 부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황태후에게 전했다. 황태후 역시 정경패가 무척 마음에 들어 자신의 양녀로 삼았다. 이에 황제는 정경패를 영양 공주에 봉했다. 또한 황제와 황태후는 진채봉과 가춘운을 양소유의 첩으로 삼기로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양소유는 대승상이 되어 영양 공주와 난양 공주 그리고 궁녀 진씨와 혼례식을 올렸다. 이때서야 궁녀 진씨가 진채봉임을 알게 되었다.

양소유가 어머니를 고향에서 모셔와 잔치를 열던 날에 때마침 계섬월과 적경홍도 양소유를 찾아왔다. 뒤이어 심요연과 백능파도 양소유를 찾아온 것이다. 따라서 양소유는 영양 공주, 난양 공주, 채봉, 춘운, 섬월, 경홍, 요연, 능파까지 여덟 명의 부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어느덧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양소유는 황제의 사랑과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것이다.

여덟 부인과 함께 황제가 내려 준 궁에서 지내던 어느 가을날, 양소유는 부인들에게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며 불도를 닦아 불생불멸하는 도를 얻어 인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스승을 찾아 떠나겠다고 했다.

그때 노승이 나타나 지팡이를 들어 돌난간을 두드렸고 양소유는 자신이 원래 남악 형산에서 도를 닦던 성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성진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육관 대사의 가르침을 듣고 있을 때에 팔선녀가 들어와 대사에게 제자로 받아 주기를 청했다. 죄를 뉘우치는 팔선녀에게 감동하여 대사는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다.

성진과 여덟 명의 선녀는 부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아 큰 도를 얻었다.

육관 대사는 성진에게 의발을 전하고 인도로 돌아갔고, 성진은 육관 대사의 뒤를 이어 연화봉에서 많은 이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다.

후에 성진과 팔선녀는 함께 극락세계로 갔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구운몽은 우리나라 고전 소설 가운데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이는 주제나 사상의 다양함은 물론 조선 시대에 쓰인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묘사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또한 구운몽은 소설적인 재미도 뛰어나다. 팔선녀가 환생한 여덟 여인들을 서로 다른 개성과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들로 묘사했다.

양소유가 이들과 만났다 이별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꾸며 독자를 사로잡는다. 남녀 간의 사랑을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체로 묘사한 것도 구운몽이 가진 뛰어난 점이다.

성진이 양소유로 태어나 연화봉에서 만났던 팔선녀를 모두 배필로 맞이해 사랑을 나누는 과정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여 작품을 더욱더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예를 들면 여덟 여성 가운데 처음 만난 사람이 진채봉인데 과거 보러 가다가 진체봉을 만나 연정을 품게 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시를 읊는 소리 맑고 호상하여 금석에서 나는 듯한지라. 봄바람이 거두쳐 누상으로 올라가니, 누 가운데 옥 같은 사람이 바야흐로 봄잠을 들었다가, 글소리에 깨어 창을 열고 난간을 의지하여 두루 바라보더니, 정히 양생으로 더불어 두 눈이 맞추니, 구름같은 머리털이 귀밑에 드리웠고, 옥체 만반 기울었는데, 봄잠이 족치 못하여 하는 양이 천연히 수려하여 말로 형용하기 어렵고, 그림을 그려도 방불하지 못할러라. 양인이 서로 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더니.”

이처럼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그대로 헤어질 수 없게 되었다. 먼저 행동을 취한 쪽은 진채봉이었다. 지체 높은 집안 규중의 딸이 지나가는 총각을 우연히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시를 지어 말한 편지를 유모를 시켜 전하자 양소유는 답사를 보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언약한 대로 혼인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지나고 시련이 있어 사건이 복잡해졌다.

양소유는 진채봉만 기다리지 않고, 다른 일곱 여인도 아내로 삼았으니, 남성 위주의 일부다처제 소설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구운몽은 중국의 금병매(金甁梅)나 일본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과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많다.

다른 두 작품은 남성 주도로 진행되는 성행위를 흥밋거리로 삼은 남성 소설이지만, 구운몽에서는 남녀 간의 정신적 이끌림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또한 진채봉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도 각기 자기 처지에 맞는 방식으로 자기 주도적으로 애정을 성취한다.

남녀가 헤어졌다 다시 만날 때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점도 다른 두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최근 여성학적 관점에서 연구가 확대되면서 남성 중심에서 벗어나 여덟 명의 여성의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남성 독자는 양소유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서로 다른 여덟 여성과의 맺어지는 과정을 상상하지만, 여성 독자는 여덟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여러 생을 겪는다고 가정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큰 즐거움을 누리는가는 남녀 양성을 가진 논자가 없어 판가름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여성의 애정 성취라는 새로운 측면에서 작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글에는 사씨남정기와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관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