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의 이해 6
- 카를 융과 주역 2 : 아들러-
1.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유대교의 교리에 “10명 중, 1명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2명은 친구가 된다. 7명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한때 낙양의 지가를 올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와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에 이와 유사한 이론들이 등장한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인정욕구’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내가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아들러
※ 행복의 세 가지 조건
첫째 : ‘자기수용’이다.
이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 못하는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이다. 자기수용은 자기 긍정과는 다르다. 자기 긍정은 ‘나는 강하다’, ‘나는 할 수 있다’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자칫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자기수용은 자기의 결점을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둘째 : ‘타자신뢰’이다.
신용과 신뢰는 다른 의미다. 신용은 은행의 담보대출처럼 담보만큼 돈을 빌려주는 것이지만, 신뢰는 사람을 믿을 때 일절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믿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남을 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수용도 하지 못하고 남을 신뢰하지도 못한다. 타자신뢰를 통해서 더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인생의 기쁨도 늘어나는 것이다.
셋째 : ‘타자공헌’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때 행복해진다.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행복의 마지막 단계다.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비엔나 근교 펜칭(Penzing)에서 유대인 중산층 상인인 아버지 레오폴트 아들러(Leopold Adler)의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구루병으로 4세가 되어서야 걸음마를 시작하였고, 폐렴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겪었다. 게다가 아들러는 3세 때 자기 침대 옆에서 동생이 죽는 것을 경험하였다. 자신의 병약함과 동생의 죽음은 아들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의학에 관심을 갖는 원인이 되었다. 아들러는 형에 대해서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경쟁심이 심했고, 동생이 생겼을 때는 어머니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겨 버렸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은 프로이트(Freud)의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하였다. 학창 시절 아들러는 매우 평범한 학생으로, 수학 시험에 낙제하여 재수강을 받기도 했다. 이에 선생님에게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구두 제화공 기술을 배우라는 권유도 받았다. 그때 선생님과 상담을 했던 아들러의 아버지는 선생님의 의견과는 달리 아들러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 결국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후 1888년 명문 비엔나대학교에 입학해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대학 재학 시절, 정치, 경제, 사회학 등을 두루 섭렵하였고, 사회문제와 사회적 신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마르크스의 저서를 특히 많이 읽었다.
1895년에 비엔나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아들러는 대학 시절에 사회주의 학생연합의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1897년에 러시아에서 온 지적인 사회주의 운동가 레이샤 엡스타인을 만나 결혼을 하여 세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아들러는 1898년에 안과 의사로 첫 개업을 하였다. 안과의사로 일하면서 눈이 나쁜 사람일수록 탐욕스러운 독서가가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에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자신의 열등성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모든 인간의 발전이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 후 일반 내과에서 신경학과 정신의학으로 전환하였다. 1902년 가을, 프로이트는 아들러를 자신의 토론 그룹에 초대했다. 후에 이 모임은 1910년 아들러가 의장이 된 비엔나 정신분석학회로 발전하였다.
초기에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조화로운 관계였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격을 자아, 초자아, 원초아로 구분하고, 인간은 이러한 부분들 간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본 것과는 달리, 아들러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개인은 분리 불가능성(indivisibility), 즉 나눌 수 없는(in-divide) 전인이라는 의미를 넣어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개인심리학은 개개인의 특성에 초점을 맞춘 심리학이다. 아들러는 인간 행동의 원인보다, 행동의 목적을 강조했으며, 인간은 열등감을 극복하여 자기완성을 이뤄야 함을 강조하였다.
아들러는 인간은 누구나 어떤 측면에서 열등감을 느낀다고 보았다. 인간은 현재보다 나은 상태인 완전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들러는 사람이면 누구나 적어도 세 가지 주요 인생 과제인 ‘일과 여가’ ‘우정이나 사회적 관심’ ‘사랑과 결혼’에 직면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 후 수십 년간의 연구를 통해, 이들 세 가지 주요 인생 과제야말로 건강과 안녕에 있어 핵심이라는 입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개인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뿌리를 두지만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무의식 결정론을 넘어서 인간 심리에는 ‘현재’와 ‘의식적 힘’의 영향도 중요하고, ‘사회적 환경’도 많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경험과 타고난 기질만이 그 사람의 정신세계 전체를 결정하지 않고, 개인의 행동에 따라 충분히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목표지향적으로 행동하는데, 지금 경험하고 있는 매 순간 주관적인 선택을 해나가기 때문에, 의식적 자기결정과 자유의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한편 아들러는 신체 질환으로 장애가 생긴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어떤 사람은 장애를 극복해 내며, 도리어 자신의 장애를 큰 성취동기로 삼는데, 어떤 사람은 장애에 좌절하여 삶을 망가뜨리거나 발전 없이 그대로 머물기만 한 것을 본 것이다. 그런 행동의 추동력으로 ‘열등감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를 지적했다.
열등감은 자기가 남보다 열등하다는 감정이다. 사람들은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때로는 그 보상이 지나쳐 일중독증에 빠지거나 열등감 콤플렉스, 기타 신경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열등감을 모면하려는 무의식적인 갈등으로 인해 보상, 공격성, 방어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열등감 콤플렉스라고 한다.
아이들을 관찰해보면, 어린 시절에 아이는 항상 자기보다 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자기가 못났다고 여기는 열등감’이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아들러는 이 열등감이 삶의 족쇄가 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뭔가를 시도하고 극복하고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여겼다. 나폴레옹의 강한 권력욕은 키가 작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무의식적 추구로 해석했다.

성취와 성공의 경험을 통해 사람은 열등감을 완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커진다. 반대의 경우에는 열등감만 커지고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 차이는 결국 개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 즉 자존감의 차이에 의한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한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개인이 사회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개인심리학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한편 아들러는 열등감 콤플렉스의 반대편에 우월감 콤플렉스(superior complex)도 있다고 했다. 이는 목표 달성과 성취만 끝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성취가 자존감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외부의 인정만 더 추구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사람을 말한다.
즉 ‘소꼬리보다 닭벼슬이 낫다’는 성향은 인간이 열등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우월 콤플렉스 때문에 나타난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자기성취, 성장, 능력 함양 등을 위한 모든 노력의 근원은 결국 열등감이지만 사람들은 단순히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것 이외에 세상을 창조하고 고난을 극복하려는 동기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기본적인 동기 중 하나인 우월추구 동기이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한 과도한 목표 설정이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어색한 태도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착각 속에 과장된 몸짓과 언어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과정이 우월 콤플렉스의 발현이다.

또한 아들러는 사회적인 요인이 성격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출생 순위가 생활 양식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첫째 아이는 태어나서는 사랑을 받지만, 곧 폐위될 왕처럼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 결과 첫째 아이는 스스로 고립해서 적응해 나가며, 다른 사람의 애정이나 인정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 초연하여 혼자 생존해 나가는 성격이 된다.
둘째 아이는 형이나 누나와 같은 속도 조절자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을 능가하려 하고, 첫째보다 훨씬 빨리 말하고 걷기 시작한다. 그 결과 경쟁심이 강하고 대단한 야망을 지닌 성격이 된다. 아들러도 둘째다.
막내 아이는 응석받이가 되거나 귀찮은 존재, 독립심이 부족하거나 열등감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위의 형들을 능가하려고 가족 중에 가장 야망 있는 아이가 되고, 때로는 혁명가가 되기도 한다.
독자는 응석받이로 자라기 쉽고, 아버지와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며, 의존심과 자기 중심성이 현저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아들러의 이론들은 이후에 빅터 프랑클, 아론 벡, 애브러험 매슬로우과 같은 정신분석가나 인지심리학자뿐 아니라 루돌프 드레이커스나 스티븐 코비와 같은 자기계발 전문가들의 이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앞줄에 프로이트, 스탠리 홀, 카를 융
2. 프로이트, 아들러, 융, 의 관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정신과 의사인 프로이트는 1895년 ‘히스테리 연구(Studies of Hysteria)’를 발표하고, 1900년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일약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프로이트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정신분석 사례를 토론하거나, 문학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모임인 ‘수요회’를 결성했다.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모임의 초기 멤버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기에 은연중에 빈에서는 2인자로 인정받았다. ‘수요회’가 1908년 정식으로 ‘빈 정신분석학회’로 발족하면서 아들러는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처음 발족하면서 초대 회장으로 융을 선출할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지시했다. 즉, 공식적으로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것이다.
융이 회장으로 선임된 것은 정치적으로 아들러를 자극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가 아들러를 중심으로 한 빈 그룹을 배제하고, 스위스 출신인 융을 택한 것은 아들러의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었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융을 종신 회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결국 빈 그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대신 프로이트는 아들러를 다시 빈 정신분석학회의 회장으로 밀었지만, 국제 학회가 아닌 지역 학회를 맡으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초기 멤버로서 그 역할과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들러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이 헤어진 이유는, ‘성본능’을 중시하는 프로이트의 설에 반대하여,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열등감, 무력감과 이를 보상 또는 극복하려는 권력에의 의지, 즉 우월의 요구라고 하였다. 이에 프로이트는 “아들러는 자신과 다르며 추상적이고 익숙한 개념을 새로운 이름으로 얘기할 뿐”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무의식과 성욕을 무시하고 심리학을 생물학과 생리학에 종속시키려 한다고 공격했다. 마침내 1911년 2월 말 아들러는 빈 정신분석학회 회장을 그만두었으며, 학회 사퇴서까지 내어 아들러와 프로이트는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이후 화해하지 않고 여생을 서로 통렬히 비난하며 지냈는데, 프로이트는 체구가 작은 아들러를 난쟁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난쟁이를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그에 아들러는 “거인 어깨 위에 서 있는 난쟁이는 그 거인보다 훨씬 멀리 볼 수 있다.”라고 응수하여, 자신의 심리학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결론적으로 프로이트는 초기에 결별한 제자들과의 경험 덕분에, 이후에는 정신분석에 있어서도 이론적으로 훨씬 유연해져 자신과 다른 이론을 가진 이들을 많이 수용할 수 있었다. 또한 아들러와 융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프로이트와 좋지 않게 결별했지만, 각기 정신분석의 자양분을 받아 아들러는 ‘개인심리학’, 융은 ‘분석심리학’으로 자신만의 독자적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이는 이후에 수많은 후학들이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의 이론만 수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시대변화와 환자의 요구에 맞춰 확대해 나가고, 수정·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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