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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강진의 시인 김영랑-영랑생가

by 황교장 2010. 8. 14.

강진의 시인 김영랑-영랑생가

 -삶의 질을 높이는 직원연수 3-

 

백련사를 나와 구강포를 바라보면서 다시 강진읍으로 들어왔다. 영랑생가는 강진군청 뒤편에 있다. 몇 년 전만해도 주차장이 제대로 없어 차를 세울 곳이 없었다. 이젠 주차장도 잘 정비되어 있다. 그러나 대형버스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일반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빗줄기는 여전히 제법 굵게 내리고 있다. 우리 일행은 우산을 쓰고 생가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나오고 안채가 있고 제법 떨어져서 사랑채가 있다. 부잣집이었음을 단번에 알 수 가 있을 정도로 집이 크고 마당도 넓다.

그런데 이렇게 큰 집이 기와집이 아닌 초가집이다. 경상도 부잣집은 반드시 고랫등 같은 기와집인데 영랑생가는 지주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초가집이어서 인상적이다.

 

살구나무

 

영랑생가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그 중 은행나무, 살구나무. 동백나무는 이집의 대표선수로서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다.

생가의 은행나무는 충북 영동에 있는 영국사 앞 은행나무만큼이나 은행이 많이 달린 것 같다. 살구나무 또한 명품이다. 살구나무가 이렇게까지 키가 크게 자라는 줄은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십 수 년 전 이 나무에서 딴 살구를 먹어보았는데 맛이 일품이었다고 기억된다.

 

 

본채 뒤편 언덕위에 있는 동백나무는 선운사나 백련사에 갖다놓아도 전혀 꿇릴 게 없을 정도로 당당하고 굵은 둥치를 자랑하고 있다.

동백나무숲은 집 뒤로 돌아 들어가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숨겨진 곳이다. 이집의 계집종과 총각 머슴이 사랑을 나눈 곳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우리 선생님들 또한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든다면서 동백꽃이 절정일 때 이곳 툇마루에 앉으면 첫사랑이 절로 되살아날 것 같다고 한다.

 

 

 

 

 

영랑생가의 주인인 김윤식 시인의 생애를 여러 자료를 엮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다. 영랑은 그의 아호인데 문단 활동 시에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아내를 잃었다. 그해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에 올라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거사를 계획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대구교도소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집에서 문학에 뜻이 있는 인사들과 함께 ‘靑丘(청구)’라는 동인지를 내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했다.

당시 무정부주의 혁명가인 박열과 사귀었고 괴테, 키츠 등의 외국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고향에 머물면서 1925년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에 사는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1931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선생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작 활동에 참여하여 동년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 등 4행 소곡 6편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8·15해방 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이승만 정부의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다. 평소에 국악과 서양음악을 즐겨 들었다. 특히 민요창을 할 때 북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수(鼓手)의 대가라고 한다.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다가 1950년 9·28수복 때 유탄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시인의 나이 47세였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다.

 

선생의 생애 중에서 눈길이 제일 먼저 가는 것은 첫 번째의 결혼이다. 1903년생인 시인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해에 결혼을 했다.

만 13세의 나이에 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고 결혼 1년 반 후에 아내를 잃었다. 어린 나이에 아내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쓸쓸한 뫼 앞에’를 ‘시문학’에 발표를 했다.

 

쓸쓸한 뫼 앞에 -김영랑(金永郞)

쓸쓸한 뫼 앞에 호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 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비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손 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비비면’이란 구절이 가슴에 짠하게 닿아온다.

 

김영랑 시인을 평가할 때 ‘북도의 소월, 남도의 영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영랑의 시는 향토적 서정과 민족적 운율을 노래한 영롱한 서정시로 평가를 받는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인 경향시는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김영랑의 시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고 한다.

 학창시절 열심히 외웠던 시가 시비에 적혀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떠오르는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영랑생가를 나와 둥지식당으로 향했다. 강진에는 한정식이 유명하다. 유홍준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영향으로 해태식당은 언제나 붐비고 있었다.

수 년 전에 왔을 때 해태식당에는 자리가 없어서 밖으로 나와 지역주민들에게 물어보니 강진사람들은 ‘둥지식당으로 간다’고 하면서 둥지식당을 소개해 주었다.

그때 가보고 좋아서 그 이후에는 강진에 오면 꼭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2007년 겨울에 분포중학교 선생님들과 이곳에 왔는데 모두들 좋아했다.

 

 

 

 

이곳에서 식사와 함께 행운권 추첨을 하였다. 참석자 모두에게 상품이 하나씩은 돌아가도록 준비를 해왔다. 2000원짜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고 대상은 백화점 상품권으로 준비하였다.

각부 부장들과 원로교사들이 하나씩 추첨을 하고 마지막은 학교장이 하였는데 모두들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행운권 추첨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전 직원이 일체감을 느꼈다. 마지막 백화점 상품권은 귀염둥이 최선생님의 차지가 되었다. 맛있는 식사와 함께한 행운권 추첨의 분위기는 월출산 온천관광호텔의 숙소로 계속 이어졌다.

미리 예약한 세미나실에서의 여흥은 첫날 직원연수의 대미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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