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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강진 백련사와 배롱나무

by 황교장 2010. 7. 31.

강진 백련사와 배롱나무

-삶의 질을 높이는 직원연수 2-


장흥보림사를 나와 강진으로 향한다. 강진은 우리나라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날씨가 맑고 농사도 잘된다는 의미일 게다. 강진은 또한 남도답사 일번지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다.

다산초당, 백련사, 고려청자도요지, 무위사, 월남사지, 영랑생가 등 많은 문화유적지를 갖고 있는 곳이다.

나의 지인 중에 강진이 고향인 분이 있다. 이분의 말을 빌리면 강진사람들은 예의가 바르고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강진 출신의 많은 인물들이 이순신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선생이 강진에 귀양을 와 18년을 지낼 때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많다.

또한 3·1운동 때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그리고 시인 김영랑의 고향이다. 이러한 자부심이 강진사람들의 의식 무의식에는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차창 밖에는 비가 제법 많이 오고 있다. 원래 계획은 걸어서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 길은 다산 정약용선생과 백련사의 혜장선사가 우정을 나누며 소요했던 길이다.

길도 뒷동산 가는 것과 같이 평탄하고 운치가 있다. 그리고 구강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아름다운 길이다.

40분 정도 산길을 걸으면 배가 조금 고프다. 그리고 나서 강진 읍내에 있는 영랑생가를 보고 둥지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저녁식사의 효과는 배가 된다. 그러나 이 길은 오늘처럼 비가 오면 미끄러져 다칠 가능성이 많다.

이럴 때가 가이드로서 참 힘이 든다. 백련사만 보고 다산초당을 보지 않으면 이 코스는 앙꼬 없는 찐빵이다. 그렇다고 강행을 하다가 무리수를 두면 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구경이라도 위험부담이 크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된다고 판단을 했다. 그래서 아쉽지만 이번에는 백련사만 보기로 했다.


차가 백련사 입구에 닿았다. 백련사는 주차장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가는 숲길이 하이라이트다. 그런데 차가 쏜살같이 새로 난 길로 백련사 절까지 올라와 버렸다. 기사분이 비가 오기에 우리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배려도 좋지만 오늘같이 적당한 비에는 우산을 쓰고 걸어서 올라가는 게 훨씬 더 운치가 있다. 아쉽지만 내려 올 때는 걸어서 주차장까지 갈 것이니 주차장에 차를 대기시켜놓기로 했다.

 

 구강포

 

백련사는 구산선문 중 보령 성주산문을 연 무염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다. 조선 후기에 만덕사로 불리다가 현재는 백련사로 부르고 있다.

백련사는 1216년(고종 3년)에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백련결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차에서 내리자 바로 절 안이다. 만경루 입구 계단에 흰 개 두 마리가 자고 있다. 개 팔자가 상팔자이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대웅전이 나온다. 백련사 대웅전은 대웅전보다 현판글씨가 더 유명하다.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이기 때문이다. 백련사에는 이광사의 글씨가 세 점이나 있다. 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이 그 주인공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이 이광사의 장남이다.

동국진체는 중국의 서체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추사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독특한 필법이라고 한다.

 

동국진체는 녹우당 현판을 쓴 옥동 이서를 시작으로 공제 윤두서, 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가 완성했다. 동국진체 역시 추사체처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글씨다. 대가들의 글씨는 역시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백련사에서 바라보는 구강포의 경치 또한 일품이다. 만경루의 이름도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좋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백련사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만경루 앞에 있는 배롱나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배롱나무가 아닌가 생각된다.

 

유서 깊은 곳에는 배롱나무가 많다. 경주의 서출지와 안압지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운치를 더해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의 정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배롱나무로 무려 800년이나 된 나무이다.

 정묘사에 있는 세 그루의 배롱나무는 묘역에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지만 백련사의 배롱나무는 만져 볼 수도 있고 손으로 간지럼을 태워볼 수도 있다.

 

 

 

2007년 8월에 본 배롱나무

 

여름방학의 시작즈음에 이곳에 오면 배롱나무 꽃이 절정이었는데 올해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고목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올해 방학이 빨라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올 봄에는 유난히 추워서인지 절정의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없어 조금은 아쉽다.

 

 배롱나무

 

배롱나무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나무도 없을 것이다. 목백일홍, 간지럼나무, 파양수(怕揚樹), 자미(紫薇),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 피나무, 쌀밥나무, 바람나무, 선비나무 등으로 불린다.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키가 5m 정도 자란다. 수피(樹皮)는 홍자색을 띠고 매끄럽다. 잎은 마주 나고 잎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자루가 없다. 붉은색의 꽃이 7-9월에 핀다.

 

배롱나무는 대갓집 안채에는 절대 심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나무줄기의 매끄러움 때문에 여인의 나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다. 즉 여인들이 벗고 있는 형상이어서 바람이 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절 마당이나 선비들이 기거하는 앞마당에는 많이 심었다. 절 마당에 많이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상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는 의미이다.

 

선비들이 생활하는 서원이나 향교에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 없이 벗고 있는 것처럼 선비들도 엉큼하게 감추지 말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청렴결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라 한다. 오래된 서원이나 절집 또는 정자에 배롱나무가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내가 가본 곳 중 반야사, 선국사, 병산서원, 도동서원, 명옥헌에 있는 배롱나무는 인상적이었다.

 


배롱나무에 피는 꽃을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이는 꽃이 한 번에 피고 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에 걸쳐 번갈아 피고 져서 오랫동안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배롱나무 꽃은 ‘못난이꽃’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속설이 있다.

 평생 바람만 피우던 미운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의 묘 옆에 배롱나무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배롱나무 꽃은 향기가 없다. 즉 배롱나무는 더운 한 여름에 향기도 없이 100일 동안 질리게 피어 있다는 의미다.

우리 속담에 여름 한 철은 ‘첩을 팔아서 부채를 산다’라는 말이 있다. 더운 여름에 사랑하는 첩도 싫어서 이를 팔아 시원한 부채를 산다는 의미다.

그런데 바람둥이 남편이 죽어서도 향기도 없는 여자와 한여름 백일 동안 묘 옆에서 같이 질리게 피어 괴로움을 당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백일홍은 질리는 꽃이 아니라 ‘가슴 아픈 사랑의 꽃’이기도 하다.


옛날 어느 바닷가의 한적한 마을에 목이 세 개 달린 이무기가 나타나 매년 처녀 한 명씩을 제물로 받아갔다.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가장 아름답고 착한 처녀의 차례였다.

그런데 평소에 이 아름다운 처녀를 짝사랑하던 이웃마을의 잘생기고 용감한 청년이 처녀의 옷으로 대신 갈아입고 제단에 앉아 있다가 이무기가 나타나자 칼로 이무기의 목 두 개를 베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당당하고 용감하여 처녀는 기뻐하며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사오니 영원히 당신을 공경하며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자

청년은 "아직은 이르오, 이무기의 남은 목 하나도 마저 베어야 하오.

내가 성공을 하면 흰 깃발을 달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 것이니 그리 아시오"하고 길을 떠났다.

처녀는 백일 간 기도를 드렸다. 백일 후, 멀리 배가 오는 것을 보니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만 처녀는 실망하여 자결하였다.

그런 데 그 깃발은 붉은 깃발이 아니라 이무기가 죽을 때 뿜은 피가 흰 깃발에 묻은 것이었다. 처녀는 그것을 붉은 깃발로 생각하고 청년이 죽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 후 처녀의 무덤에서는 붉은 꽃이 피어났다. 백일 간 기도를 드렸기에 백일 동안이나 피는 꽃이 되어 백일홍이라고 하는 가슴 아픈 전설이다.


 

 

충남 보령 출신의 시인 임영조의 ‘배롱나무 아래서’를 읽어보면 배롱나무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배롱나무 아래서 / 임영조


어제 피운 바람꽃 진다

팔월염천 사르는 농염한 꽃불

밤사이 시들시들 검붉게 져도

또 다른 망울에 불을 지핀다

언제쯤 철이 들까? 내내

자잘한 웃음소리 간드러지는

늙은 배롱나무의 선홍빛 음순

날아든 꿀벌을 깊이 품고 뜨겁다

조금 사리 지나고 막달이 차도

좀처럼 下血이 멎지 않는 꽃이다

호시절을 배롱배롱 보낸 멀미로

팔다리 휘도록 늦바람난 꽃이여

매미도 목이 쉬어 타는 말복에

생피같이 더운 네 웃음 보시한들

보릿고개 맨발로 넘다가 지친

내 몸이 받는 한 끼 이밥만 하랴

해도, 오랜 기갈을 견뎌온 나는

석달 열흘 피고 지는 현란한 修辭

네 새빨간 거짓말도 다 믿고 싶다

그 쓰린 기억 뒤로 가을이 오고

퍼렇게 침묵하던 벼이삭은 패리라

처서 지나 한로쯤 찬이슬 맞고

햇곡도 다 익어 제 무게로 숙일 때

나는 또 한 소식을 기다려보리라

보름 넘어 굶다가 밥상을 받듯

받기 전에 배부른 배롱나무 아래서


누가 뭐래도 백련사에서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동백숲이다.

이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될 정도로 대단하다. 동백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많이 있지만 그 중 백련사 동백과 선운사 동백이 대한민국 동백 숲의 대표 브랜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선운사 동백은 뒷산의 경사가 많이 져서 접근성이 불편하지만 백련사의 동백은 접근성이 뛰어나다. 이곳의 동백나무는 1,500여 그루가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7m쯤 되고 줄기 아래부터 가지가 갈라져 관상목으로 된 것이 많으며 주위에는 비자나무, 후박나무, 왕대나무, 차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특히 이곳의 후박나무는 지금껏 내가 본 후박나무들 중에서는 가장 크다고 느껴진다.

 

삼삼오오로 내려오는 중 갈림길의 왼편에 ‘다산초당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이정표를 보자 모선생님이 나에게 ‘이 정도의 비는 맞고 가는 것이 더 운치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하면서 꼭 다산초당을 보고 싶다고 애절하게 간청을 했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누가 빗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나면 그때 선생님 기분이 좋겠습니까?’ 라고 하니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따뜻한 봄날에 좋은 사람과 같이 손잡고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면서 이 길을 다시 한 번 더 답사를 하기를 권유했다.

 

이 길은 좋은 사람과 손을 잡고 걸어야 제 맛이 난다. 인간은 영원한 사랑을 늘 그리워하고 갈구한다. 따뜻한 봄날 붉은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고 질 때 이곳에 오면 영원히 잊어지지 않을 사랑의 추억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 아련한 향수를 남겨두고 김영랑의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을 떠올리며 영랑생가로 향하였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김 영 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참고로 고려시대의 불교의 결사운동에 관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


▶ 결사운동과 조계종


무신 집권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조계종은 지눌이 수선사를 열면서부터 매우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어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체계인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또,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지눌의 논리는 고려 불교가 지향하던 선교 일치 사상을 완성한 것이다. 지눌의 결사 운동은 지눌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혜심은 유불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요세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 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교육과학기술부)-


▶ 불교결사


고려 중기의 불교는 교종에서는 화엄종과 법상종이, 선종에서는 천태종과 조계종이 주도하였다. 이들 종파는 왕실이나 귀족가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으며, 소속 사원들은 많은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무신의 난 이후 무신집권이 이어지면서 귀족 가문들과 연결되어 있던 사원들은 탄압을 받고 크게 위축되었다.

선종에서는 결사를 맺어 함께 수행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눌은 개경의 불교계를 비판하면서 뜻이 맞는 동지를 모아 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는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실천하는 결사를 맺었다. 정혜결사는 처음은 팔공산 거조암에서 시작되었는데 송광산 길상사(순천 송광사)로 옮겨 수선사라고 이름을 바꾸어 계속되었다. 수선사는 왕실과 최씨 정권의 후원을 받았으며 지식인 중심의 수행단체였다. 수선사와는 다른 정토신앙을 바탕으로 한 백련사가 있었다. 천태종 승려 요세가 강진에서 시작한 백련사는 염불수행을 강조하여 지방백성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불교사상 면에서 과제가 되었던 교와 선의 대립 문제는 지눌에 이르러 해결되었다. 지눌은 선과 교를 함께 수학할 것을 이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을 전한 것이며 교는 부처의 말씀에 따른 것이므로 둘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또 인간의 마음이 불심인 것을 깨닫고 깨달은 뒤에도 꾸준히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의 입장에서 선과 교의 대립을 해소하고 깨달음과 닦음을 하나로 보는 지눌의 사상에 이르러 한국 선 사상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한국사의 이해(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 백련사의 흥망성쇠


군사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무신정권은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쳐줄 사상의 강화 내지는 재정비작업을 착수하게 되는데 여기에 부응했던 불교계의 동향이 이른바 결사(結社) 운동이었다. 훗날 보조국사가 된 지눌스님은 조계산 송광사에서 수선(修禪) 결사를 맺으며 선종을 개혁하여 조계종을 확립하던 바로 그 시점에, 지눌의 친구이기도 했던 원묘(圓妙:속명 徐了世)스님은 백련결사를 조직하면서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간다. 원묘는 지방호족으로 최씨 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강진 사람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의 후원을 받아 1211년부터 7년간의 대역사 끝에 80여 칸의 백련사를 중건하고 사람을 모으니 그의 제자 된 중만도 38명, 왕공, 귀족, 관리로 결사에 들어온 사람이 300명이었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백련사의 당당한 위세를 알만도 한데 이후 120년간 백련사에서는 8명의 국사가 배출되었으니 그것은 백련사의 화려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1/유홍준(창작과 비평사)-


▶ 요세의 백련결사(천태종)


1. 천태교학의 법화사상을 이론적 기반으로 하였으며 정토신앙을 수용하고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신앙에 중점을 두었다.

2. 수선사가 지식인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였음에 비해, 백련사는 정토관에 보다 충실함으써 종래의 교종과는 달리 지방에 살고 있는 민중을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백련사는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EBS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 백련결사


1. 백련결사는 요세(了世)가 1198년(명종 28)에 천태종의 분위기에 실망하고 동지 10여 명과 영동산 장연사에서 결사를 맺으면서 출발되었다.

2. 요세는 지눌에 의해 수선(修禪)에 대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3. 그러나 1208(희종4) 영암의 약사암에서 ‘천태묘의(天台妙義)’의 중요성을 깨닫고 수선 이전의 ‘천태교관(天台敎觀)’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실천방향을 ‘수참(修懺)’과 ‘미타정토(彌陀淨土)로 인식하고, 그 근거를 법화경(法華經)에서 찾았다.

4. 이어 1216년(고종 3)에 강진 토호들의 지원하에 만덕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본격적인 결사활동을 전개하여 의천의 천태종을 부흥시켰다.

5. 백련사는 처음에는 전라도 강진의 토호층과 이들을 지지한 백성들이 중심이 되었어나, 최우집권기에는 최우 이하 관인의 후원을 받으면서 융성하였다.

-송호상의 한국사 상(화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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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 - 백지영

헤어져도 그대여 날 생각해줘요..
멀리서도 그대여 날 생각해줘요..

가슴은 다 헤져서 성한 곳 하나 없고
두 눈은 또 멀어서 떠나는 그대 보지 못하네요

사랑해요 헤어지지 말아요
떠나는 그대의 모습을 나는 볼 수 없어요..

사랑해요 내 말 듣고 있나요..
오..날.. 떠나지 말아요

두 발은 그댈 찾아 매일 헤메이는데..
두손은 그댈 위해 쉼이 없도록 기도하고 있어요

사랑해요 헤어지지 말아요
떠나는 그대의 모습을 나는 볼수 없어요..

사랑해요 내 말 듣고 있나요..
오..날.. 떠나지 말아요..

같은 마음으로 간직해줘요
내가 바라는 건 하나..
꼭 돌아와줘요..

그리워요.. 오늘도 기다려요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떈 헤어지지마.

먼곳에서 나를 보고 있나요..
오..날..잊으면 안돼요…


가사 출처 : Daum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