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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영암 도갑사와 도선국사

by 황교장 2010. 8. 15.

영암 도갑사와 도선국사

-삶의 질을 높이는 직원연수 4-

 

아름다운 밤을 보낸 다음날은 일어나기가 무척 힘이 든다. 그만큼 삶에 있어서는 중용지도가 어렵다. 힘든 몸을 추스르고 온천탕으로 향했다. 탕 안에 들어서니 미리 온 분 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분들은 자기관리를 잘하는 중용지도의 분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월출산 온천은 참 물이 좋다. 그런데 호텔이 외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시설투자가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전에 왔을 때는 야외목욕탕도 잘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활용을 하지 않고 있다. 다음에 올 때는 화순온천호텔로 옮겨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월출산

 

호텔에서 바라보는 월출산은 또 다르게 보인다. 구름이 끼어 월출산은 신비롭게 느껴진다. 월출산은 소백산맥이 목포 앞 바다로 뻗어가다 준평원 위에 남아 있는 굳은 암석의 구릉(丘陵)인 잔구 형태의 산이다. 최고봉은 천황봉(809m)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영암(靈岩)은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령스러운 바위를 뜻한다, 그만큼 월출산이 바위가 빼어나다는 의미이다, 월출산의 빼어난 기암괴석은 남한의 금강산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답다. 월출산은 남원 지리산, 장흥 천관산, 부안 변산, 정읍 내장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영암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장천리 선사주거지와 900여 기에 달하는 고인돌, 세형동검과 (전)구림출토 청동기 용범(국보 제231호) 등이 발견되었다.

영암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월나군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영암군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영암은 왕인박사가 탄생한 곳이다. 왕인박사는 405년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쳐 아스카문화의 비조가 되었다. 영암은 도선국사(826-898년)가 탄생한 곳이다. 이처럼 영암은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도갑사로 향했다. 도갑사로 향하는 길가의 가로수는 벚나무다. 벚꽃이 만개하는 봄철에 오면 가히 환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벚꽃터널을 이루고 있는데 지금은 녹음만 무성하다. 구림리를 지나면 큰 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와 월출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색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도갑사 일주문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이슬비가 간간히 뿌리고 있다.

 

 

도갑사 일주문

 

도갑사는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고려 때에는 아주 번창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수미, 신미 두 스님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지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버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도갑사 입구에 있는 국장생표다. 이는 고려 선종 7년(1090)에 만들어진 것이다. 국장생은 고려 시대에 절 소유의 전토(田土)에 세웠던 경계선 표지이다. 당시 절은 수천 결의 토지를 소유하였으므로 그 절 소령(所領)의 전결(田結)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웠다.

지금 남아 있는 국장생표 중에서는 고려 선종 2년(1085)에 양산 통도사에 세웠던 석표(石標)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다음 오래된 것이 이곳의 국장생표이다. 따라서 도갑사는 1090년 이전에 세웠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도갑사는 국보 2점과 보물 4점을 보유하고 있다.

국보 : 도갑사해탈문(국보 제50호),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보물 : 도갑사오층석탑(보물 제1433호), 도갑사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도선수미비(보물 제1395호), 도갑사소조동자상(보물 제1134호)이 있다.

 

우리 일행은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에 이르렀다. 도갑사해탈문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전화에서도 살아남은 도갑사의 유일한 건물이다. 국보 제50호로 지정될 정도로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해탈문이란 이 문을 지나면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의미이다.

 

 

 도갑사 해탈문과 계단

 

해탈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이다.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서 있다.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과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탈문 현판의 글씨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해탈문은 주심포집이지만 다포집의 양식이 가미된 특이한 건물이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과 계단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창 수리중이다.

해탈문을 지나면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 좌우에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대웅전 좌측에는 천불전이 있고, 우측에는 국사전이 있다.

다른 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쾌하고 호쾌함을 준다. 그만큼 절 마당이 넓고 여유 공간이 많다.

 

 

도갑사는 월출산 남쪽 도갑산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풍수 상 도갑사는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국이라고 한다. 전에 왔을 때 호랑이의 형상을 보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보았지만 부족한 내 풍수실력으로는 정확한 관산 포인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석조

 

절 마당에는 거대한 석조(길이 4.7m)가 있다. 이 석조는 그동안 내가 봤던 석조 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드는 석조이다. 다른 곳에 가보면 석조로의 역할은 이미 끝이 나고 그냥 관상용으로 쓰이나 이곳의 석조는 늘 물이 있어 물맛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도갑사의 석조는 지금도 제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는 현역인 셈이다.

이 석조에는 제작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강희 21년 임술’이라고 쓰여 있다. 이는 조선 숙종 8년 즉 1682년에 만들어졌다. 올해로 꼭 328세이다.

 

 

 도갑사오층석탑

 

 대웅보전 앞에는  보물  제1433호 로 지정된  도갑사오층석탑이 있다. 도갑사오층석탑은 하층기단을 잃은 채 단층기단 위 5층 탑신부 및 노반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1995년 이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도갑사경내 발굴조사중 하층기단부가 발견되어 2002년 2월 현 대웅전 앞에 2중기단의 5층석탑으로 복원되었다. 높이는 5.45m이다. 조각 및 구조수법 등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 부재도 온전하게 잘 남아있으며 전체적으로 균제된 체감율과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석탑이다.

 

도갑사는 도선국사가 도갑사를 떠나면서 “내가 떠난 후 철모를 쓴 자가 와서 절에 불을 지를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 말대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철모 쓴 사람들이 불을 질렀다. 이 불 속에 대웅전도 다 타 버렸다. 지금의 대웅전은 새롭게 지은 건물이라 큰 의미는 없지만 그런데도 산세에 잘 어울리게 복원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웅보전

 

대웅전을 나와 대웅전 뒤쪽에 월출산 등산로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서면 용추폭포가 나온다. 폭포 위 계곡에 놓인 다리를 지나 왼쪽으로 올라가면 미륵전이 있다. 이름은 미륵전인데 정작 불상은 석가여래좌상인 본존불이다. 불상의 높이가 2,2m이고 광배까지 합치면 3m가 된다.

대좌와 불신과 광배가 한 개의 돌로 이루진 것이 특징이다. 석가여래는 대웅전이나 영산전에 모시고 미륵전에는 미륵불을 모신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오면 주존불과 모시는 집 이름이 맞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도갑사석조여래좌상

 

미륵전 불상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의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석조불상이다. 이 불상은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어서 마치 바위에 직접 불상을 새긴 마애불과 같은 기법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이며 도드라진 눈덩이,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은 강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넓은 어깨, 평평한 가슴, 단순한 몸의 굴곡 등은 생동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쳐 입고 있으며 몇 가닥의 옷 주름이 투박하게 표현되었다. 갸름한 타원형 광배의 가운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꼭지와 머리 양 옆에 각각 작은 부처가 표현되었다. 광배에 새겨진 조각은 대체적으로 생략이 강하다.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좌(臺座)는 밋밋한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본래는 연꽃무늬를 새긴 8각형의 대좌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다소 경직되고 형식화된 수법을 보여주지만 얼굴표정에서 훈훈한 정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투박하고 생략이 강한 고려적 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나는 도갑사에 오면 반드시 미륵전을 들른다. 분포중학교 선생님들을 모시고 왔을 때 모 부장선생님은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했다. 그분은 매일 108배를 하는 불자였다.

불자인 선생님들에게 이 미륵불님은 빌면 꼭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시는 부처님으로 소개를 했다. 그리고 이 절터가 내가 볼 때는 명당임에 틀림이 없으니 꼭 소원을 진심으로 간절하게 빌어 보라고 했다.

 

미륵전을 나와 월출산 등산로를 따라가면 부도밭이 나온다. 부도밭 옆에는 도선수미비(보물 제1395호)가 있다. 도갑사를 세운 도선 스님과 중건한 수미 스님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1653년(효종 4)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시간관계상 부도밭까지 가지 못하여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이 비는 대리석을 비신으로 사용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부도밭(2008년 1월)

 

 

 도선수미비(2008년1월)

 

마지막 남은 도갑사의 보물은 보물 제1134호로 지정된 목조 문수․보현동자상이다. 이들은 원래 해탈전 안에 있었다. 사천왕상 대신 건물 안 양쪽에 모셔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해탈문을 해체 복원하면서 이들 동자상은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있다.

도갑사에서 가장 자랑하는 것은 월출산 구정봉 밑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이라고 생각된다. 십 수 년 전에 마애여래좌상을 보기 위해 월출산 등산을 한 적도 있었다.

그날은 하도 날이 맑아서 주변의 경치를 모두 다 볼 수 있었다. 목포 앞바다와 구강포가 손에 잡힐 듯이 있었고, 멀리 조계산, 무등산, 장흥 천관산, 심지어 내장산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선생님들에게 다음에 시간이 나면 꼭 한번 월출산 등산을 권하면서 부산의 금정산에 있는 금샘보다도 샘이 더 깊고 넓은 아홉 개의 샘이 구정봉에 있다고 소개 했다. 또한 구정봉 밑 5백m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보면 삶의 질은 더욱더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다음 목적지인 대흥사로 향하였다.


참고로 도선국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신라말의 승려이며 풍수의 대가. 성은 김씨. 영암 출신. 왕가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華嚴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그 뒤 유명한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846년(문성왕 8)에 곡성 동리산(桐裏山)의 혜철(惠徹)을 찾아가서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운봉산(雲峯山)에 굴을 파고 수도하기도 하였으며,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여름 한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는데, 언제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도선은 당나라로 유학 가서 밀교승려 일행(一行)으로부터 풍수설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초기의 승려이고 도선의 생몰년은 당나라 말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연대에 모순이 있고,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다.

도선은 승려로서보다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가 신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도선의 생존 연대가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뒤부터 ‘도선’ 하면 비기(秘記), ‘비기’ 하면 풍수지리설을 연상할 만큼 도선과 풍수지리설 사이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도선이 풍수지리설 같은 주술적 언어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실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적 존재로 파악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도선이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을 고려 태조에 의해서였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송악에서 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왕들은 그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태조는 도선으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은 일은 없으나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선의 나이 37세 되던 해, 그는 옥룡사에 머물면서 입적할 때까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당시 제자의 수가 수백 명이라는 점에서 옥룡산문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은 옥룡사에 머문 지 35년이 되는 때인 898년(효공왕 2)에 세수 72세로 입적하였다.

도선의 저서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도선비기>,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도갑사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설명을 보면


1. 풍수지리와 비보설

비보설(裨補說)은 땅기운의 성쇠에 따라서 왕조의 흥망이 결정되지만 땅의 결함을 사람의 힘으로 보충하여 기운을 왕성하고 순하게 돌릴 수 있다는 지리설이다.

지맥이 약한 곳은 흙을 돋우어 보강하고, 산형이 험한 곳은 바위를 깎아서 순하게 하는 풍수지리의 술법(術法)은 불교 전개과정을 통해서 비보사찰(裨補寺刹)과 비보탑(裨補塔)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신라의 제27대 선덕여황 14년(640년)에 건립한 황룡사9층탑은 자장법사가 중국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고 태화지(太和池)의 용신의 계시를 받아 신라의 삼국통일을 불력으로 도모하고자 한 비보탑이었다.

고려 때에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언급한 대로 도선의 비보설에 따랐다는 3,800곳의 낙점처(落點處)에 비보사찰이 세워져서 국가의 비호를 받았다.

지금까지도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사원들의 창사연기(創寺緣起)도 대부분이 비보설에 기원하고 있어서 우리의 국토를 인체(人體), 행주(行舟), 저울 등에 견주거나 음양오행설로 파악하고 그 비보처(裨補處)에 불교 사원과 불탑과 부등을 세워 땅기운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2. 한국의 풍수지리

풍수지리는 산천의 힘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상이다. 예부터 한국인들은 산천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중국에서 불교와 함께 들어온 풍수지리사상은 음양오행설과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 산천비보설(山川裨補說)등으로 이 땅의 생김새을 풀이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풍수지리는 나라의 도읍지를 정하고 왕실의 능묘와 사찰의 터를 잡는 양택풍수(陽宅風水)였다. 신라말기의 선승들은 풍수지리를 익혀서 불교교화의 방편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때 경주가 중심이라는 신라의 국통인식에서 벗어나서 지방의 호족들이 자신들의 세력권을 국통의 중심으로 보는 새로운 지리인식이 퍼져갔다.

9산선문(九山禪門)의 사찰들이 그 터를 각기 "삼한(三韓)의 승지(勝地)"라고 부르던 것도 이 시기였다. 신라가 망하고 지방세력이 형성되는 때의 새로운 지리설이 선승들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도선도 그런 선승 중의 한 사람이었다.

개인의 묘 자리를 잡는 음택풍수(陰宅風水)는 조선시대에 와서 성행하였으며 후기로 내려올수록 여러 가지 폐해를 끼쳤다. 풍수지리설은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으나, 자연친화적인 새로운 해석도 시도되고 있다.


최창조는 '한국 풍수지리설의 구조와 원리'에서 “한마디로 땅에 대한 사랑이다. 거기에는 상대가 필요하다. 땅의 상대는 사람이다. 사람과 땅과의 관계 속에서만 사랑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선 풍수에서는 땅 못지않게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을 모르고 땅을 볼 수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훌륭한 것, 좋은 것만을 상대하는 일은 아니다.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면 나 아니라도 사랑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지고지선한 사랑이란 다른 것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 문제가 있는 것,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일 때 의미가 있다. 도선 풍수에서의 땅 사랑은 그런 근본적인 인식 속에서 출발된다. 명당이니 승지니 발복의 길지니 하는 것은 도선 풍수의 본질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개념이다.”


3. 도선의 선맥

도선은 신라 하대에 성립된 동리산문 계통의 선종 승려이자 풍수지리설의 집대성자이다. 동리산문의 개산조 혜철(惠哲,785-861)은 신라 헌덕왕 6년(814) 당(唐)나라에 가서 홍주종(洪州宗)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심인(心印)을 얻고, 문성왕 원년(839)에 귀국, 선종산문을 개창하였다.

혜철의 문하는 두 파로 나뉜다. 한 문파인 그의 제자인 윤다(允多,864~945)가 혜철을 이어서 곡성 대안사(大安寺, 현 태안사)에 주석하였다. 혜철의 제자로 동리산문의 다른 문파인 도선(827~898)은 광양 백계산에 옥룡산파를 성립시켜 선풍을 드높이고 제자 수백 명을 길렀다. 그 가운데 경보(869~947)가 도선을 이어 옥룡사에 주석하였고, 후백제의 견훤과 인연을 맺었다.


동리산문의 선 사상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가졌다. 하나는 유식사상의 포용이요, 다른 하나는 풍수지리사상의 수용이었다.

 도선의 풍수사상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비보사탑(裨補寺塔)설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옛 문헌에 실린 대화 일부분을 옮기고 그와 관계된 전국의 비보사탑 가운데 대표적인 사찰 몇 군데를 들어본다.

부처의 도를 약쑥으로 삼아 병든 산천을 치료하도록 한다. 산천에 결함이 있는 곳은 불상으로 억제하며, 산천의 기운이 달아나는 곳은 탑을 세워 멈추게 하고, 배역(背逆)의 산천기운은 당간을 세워 불러들일 것이니, 해치려 드는 것은 방지하고, 다투려 하는 것은 금기시키며, 좋은 것은 북돋아 키우고, 길한 것은 선양케 하니, 비로소 천지가 태평하고 법륜(法輪)이 스스로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왕이 듣고 말하기를 "과연 스님의 말씀답소. 그 무엇이 어려울 게 있겠소"하며 모든 주현(州縣)에 칙령을 내려 총림과 선원을 건설하고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니 그 수가 3500여 개소(기록에 따라서는 3800여 개소)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산천의 병은 모두 가라앉았고 민심은 화순(和順)하였으며 도적은 사라지고 나쁜 일은 사라져버려 삼한의 내부는 통일되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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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 이승철

천번이고 다시 태어난대도
그런 사람 또 없을 테죠
슬픈 내 삶을 따뜻하게 해 준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런 그댈 위해서 나의 심장쯤이야
얼마든 아파도 좋은데
사랑이란 그말은 못해도
먼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걸 줄수 있어서 사랑할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나 태어나 처음 가슴 떨리는
이런 사랑 또 없을테죠
몰래 감춰둔 오랜 기억속에
단 하나의 사랑 입니다.

그런 그댈 위해서 아픈 눈물쯤이야
얼마든 참을 수 있는데,

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
먼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그대 웃어준다면 난 행복할텐데
사랑은 주는 거니까 그저 주는 거니까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가사 출처 : Daum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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