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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대둔사와 녹우당

by 황교장 2010. 8. 21.

대둔사와 녹우당

-삶의 질을 높이는 직원연수 5-

 

도갑사를 나와 대둔사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전라도의 농촌은 아직도 옛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차는 해남읍을 지나고 있다. 해남군은 한반도의 최남단 땅 끝에 자리 잡은 전라남도 최대의 군이다.

동쪽에는 강진군, 서쪽에는 진도군, 남쪽에는 완도군, 북쪽에는 영암군, 북서쪽으로는 목포시와 접해 있다. 또한 3면이 바다인 해남반도로 되어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해남군에는 13개의 면이 있는데 이 중 옥천면만 빼고는 모두 바다와 닿아 있다.

해남은 옛날부터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한 문화이동로였다는 점에서 다양한 문화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해남사람들은 참 순박하고 인정이 많은 것으로 기억이 된다. 과거 군대 생활을 할 때 내 후임자가 해남 방앗간집 아들이었는데 친하게 지낸 기억이 난다.

 

 일주문

 

차는 어느 새 대둔사 입구에 도착했다. 절 앞에 도착하니 기분이 영 이상하다. 알고 보니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이신 천운당(天雲堂) 상원(尙遠) 대종사(大宗師)스님이 입적하여 다음날 영결식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는 관계로 스님들과 신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는 매표소를 지나 위에 있는 주차장까지 갔다. 시간만 허락을 하면 이 길은 걸어서 가야한다. 이 길은 아름드리나무들로 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단풍나무, 산벗나무, 동백나무, 느티나무, 삼나무, 편백나무, 후박나무, 비자나무,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등 다양한 수종들이 어울려 울창한 숲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숲길에는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피톤치드는 식물이 병원균·해충·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내뿜거나 분비하는 물질로, 삼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고 하는 물질이다.


대둔사를 예전에 이곳에서는 한듬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은 우리말로 ‘크다’는 뜻이고, ‘듬’은 ‘둥글다’ 또는‘덩어리’라는 뜻이다. 즉 ‘큰 덩어리’ 또는  ‘크고 둥글다’라는 의미다. 바닷가에 갑자기 큰 산이 솟아 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듬은 한자와 섞여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대둔사(大芚寺)’였다.

그러나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頭輪山大興寺(두륜산대흥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제 때 바뀐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 1993년이다.

그러나 아직도 절에서 붙이는 광고문 등을 보아도 여전히 대흥사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점이 아쉽다.

 

 유선관

 

 피안교

 

영화 ‘천년학’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유선관을 지나면 바로 피안교(彼岸橋)다.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옛날 매표소가 있던 입구를 지나면 시원한 샘물이 나온다. 샘물을 한 잔하고 조금만 더 가면 부도밭으로 이어진다.

 

 

 

서산대사 부도를 비롯하여 13대 종사, 13대 강사의 부도밭이다. 부도의 수는 총 56기다. 아마 우리나라 부도밭 중에서 가장 클 것이다.

담장을 따라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것은 초의선사탑비이다. 이 탑비에 예서체로 ‘초의대종사탑명’이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인다. 이 비석 뒤에 있는 것이 추사 김정희와 동갑이면서 절친한 친구인, 동다송의 저자이자 마지막인 13대 대종사이며 다성인 초의선사의 부도이다.

 

 초의탑

 

 서산대사 부도에 새겨진 청허당 글씨도 선명하다. 대둔사는 서산대사 때문에 유명해진 절이다.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했다. 청허당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했다.

불가에서 가사와 발우를 전하는 것은 자신의 법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 두륜산에 두어야 될 세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三災不入之處(삼재불입지처)다. 즉 전쟁과, 기근, 전염병이 없는 땅이다.

둘째, 萬歲不毁之處(만세불훼지처)다. 대둔산은 기화이초가 항상 아름답고 옷과 먹을 것이 항상 끊이지 않아 만세토록 이어지는 땅이다.

셋째, 宗統所歸之處(종통소귀지처) 여러 제자들이 남쪽에 있고 내가 머리 깎은 곳도 지리산이니 남쪽은 종통이 돌아갈 곳이다.

 

그리고 임종시로 읊은 게송은

生從何處來(생종하처래) 인생은 어디로 부터 오며

死向何處去(사향하처거)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는 것일 뿐

浮雲自體本無實(부운저체본무실)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生死去來亦如是(생사거래역여시) 삶과 죽음 역시 그와 같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 뒷면에다 마지막 법어를 적었다. 법어의 내용은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전 거시아, 팔십년후 아시거)’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구나” 라고 써 놓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입적했다고 한다.


대둔사는 구역을 네 곳으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 대웅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과 요사체가 있는 남원, 그리고 나라에서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표충사 영역, 마지막으로 표충사에서 북암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대광명전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연리근 나무

 

먼저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 가는 길에는 연리근 나무가 있다. 안내판의 내용을 보면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 불립니다.”로 되어 있다.

 

여기까지 읽어보다가 모 선생님 왈 ‘몇 백 년을 이렇게 붙어있다면 돌아뿌겠다’고 한다. 좋아하는 사람끼리도 몇십 년만 살면 사랑이 희미해지는 데 싫은 사람끼리 이렇게 몇 백 년을 붙어 있다면 생불여사(生不如死)일 것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은 이렇게 관점에 따라 정 반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웅전은 대둔사에서 제일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을 처음 지을 때는 아담하게 남향으로 지은 것이다. 풍수상으로도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뒤쪽은 산으로 둘러져 있고 앞에는 내가 흐르고 있다.

입구에 있는 침계루라는 누각이 있다. 침계루의 현판의 글씨는 원교 이광사의 행서체 글씨다. 침계루를 들어서면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의 대웅보전 현판도 이광사의 글씨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분이다. 동국진체는 녹우당 현판을 쓴 옥동 이서를 시작으로 공제 윤두서, 백하 윤순을 거쳐 이광사가 완성했다고 한다.

 

 

 

 침계루 대웅보전 무랑수각 

 

그 옆 무량수각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대웅보전 현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추사선생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대둔사에 들렀다. 현판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인 초의선사에게 촌스러운 이광사의 글을 떼어 내고 자신이 직접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게 하였다. 이때 ‘무량수각’ 현판도 하나 더 써 주었다. 9년 후 유배에서 풀려 대둔사에 다시 들렀다. 이때 초의선사에게 이전에 떼어낸 이광사의 현판을 도로 걸게 하고는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게 했다고 한다.

 

 

대웅전 좌우에 명부전과 범종각, 응진전이 나란히 있다. 응진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이 보물 제320호다. 이 탑의 높이는 4.3m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만들어졌다. 단아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신라 석탑의 영향이 한반도 서남해안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북원에서 대웅전을 본 후 천불전을 보기 위해서는 남원으로 다시 나와야 한다. 천불전에 들어가는 입구가 가허루다. 가허루의 현판글씨는 전주에서만 활약했다는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고, 천불전 현판 글씨는 이광사 글씨다.

 

 

 

 가허루  천불전  표충사

 

다음은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로 향한다. 표충사는 유물전시관 뒤에 있었는데 유물전시관을 허물어 다시 짓고 있었다. 표충사는 절집 같지 않고 서원에 온 느낌을 주는 곳이다.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사명대사와 뇌묵당 처영스님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표충사 현판의 글씨는 금물로 쓴 정조대왕의 친필이고 어서각의 현판 글씨는 추사의 제자인 신관호의 글씨다. 이처럼 당대 명필의 글씨는 이 곳 대둔사에 다 모여 있는 셈이다.

 

표충사에서 본 안산

 

마지막 구간은 대명광전이다. 대명광전은 초의스님과 소치 허련, 위당 신관호가 추사 김정희의 유배가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지었다는 곳이다. 대명광전의 편액은 추사의 제자인 신관호 글씨고, 단청은 초의선사가 직접 했다고 한다. 지금은 선원으로 사용하므로 일반인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려준 금병풍 등과 고려시대 동종인 탑산사 동종(보물 88호)도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오늘은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다음에 오면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유물전시관도 보고 북암에 있는 국보 제308호인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 보물 제301호인 북미륵암 삼층석탑, 천년수 그리고 초의선사가 만년을 보낸 일지암도 꼭 볼 수 있기를 권하면서 대둔사를 내려왔다.

 

 

 

전주식당


 

미리 예약해둔 전주식당에서의 버섯전골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했다. 3년 묵은 김치가 이집의 자랑거리다. 여행에 있어 그 지방의 특색이 있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도 중요한 요소이다. 대둔사에 오면 전주식당이나 호남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녹우당

 

우리 일행은 다시 녹우당으로 향하였다. 녹우당은 우리나라 시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선생(1587-1671)의 고택이자 공재(恭齋) 윤두서(1668-1715) 선생의 고택이기 때문이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공재 윤두서이다. 공재선생은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녹우당은 실학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 대두한 실학은 당시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반대하여 정치 경제적 현실 문제와 과학, 기술, 역사, 문학, 풍습과 같은 우리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하여 조선의 변화와 개혁을 주장하던 새로운 사상이었다. 실학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시작으로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거쳐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체계화되어 다산 정약용이 집대성하게 된다.

녹우당과 실학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재의 첫째 부인은 지봉 이수광(1563-1628)의 증손녀다.

반계 유형원(1622-1673)과의 관계는 반계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 금쇄동에 대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금쇄동은 동국지리지에서 최초로 언급한 곳으로 반계가 공재와의 교유를 통해 정보를 얻었거나, 공재가 살고 있는 녹우당에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공재의 친한 벗은 녹우당 현판을 쓴 동국진체의 창시자 옥동 이서(1662-1723)와 그의 동생인 성호 이익(1681-1763)이다.

마지막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어머니는 공재의 친손녀다. 다산선생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그 방대한 저서를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녹우당에 있는 책을 빌려다 보았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수광-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계보가 모두 녹우당과 직 간접으로 관련이 있다.

 


우리 선생님들에게 녹우당에서 꼭 보아야 할 세 가지 있다고 강조를 했다.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현판 글씨와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그리고 공재의 손자인 청고 윤용(靑皐 尹溶, 1708-1740)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되는 미인도는 꼭 보아야만 녹우당에 온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그런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7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모든 것이 휴관이었다.

 

 

 

 

 

 

 

 추원당

 

 심지어 녹우당도 문이 잠겨 있다. 오직 한 곳만 열려 있었다. 해남 윤씨의 중시조이신 어초은 윤효정을 모시는 재각인 추원당이다. 추원당은 1935년에 새로 지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시향(時享)은 음력 11월 15일에 어초은 사당에서 지내고, 이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을 하며 문중회의를 한다. 추원이란 논어의 ‘신종추원’에서 유래한 글로 부모의 상(喪)에는 슬픔을 다하여 장례를 두터이 하며, 조상의 제사에는 정중히 공경을 다하고, 사모하여 오래도록 잊지 아니한다는 의미다.

 

선생님들에게 재사에 대하여 기본적인 설명을 했다.

재사(齋舍)는 제사(祭祀)에 쓰이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 외지에서 오는 후손들이 숙식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개의 방이 마련된 곳, 묘제(墓祭) 후에 음복과 문중회의를 여는 곳이다.

특히 안동에 가면 우리나라 양반들의 재사를 볼 수 있다. 안동권씨 능동재사, 풍산 류씨 안동숭실재, 안동김씨의 이상루가 그 대표적이다. 이곳의 추원당은 규모면에서는 안동 양반들의 재각보다는 좀 떨어지나 그 쓰임새에 있어서는 더 효율적인 것 같다. 특히 넓은 차양막이 인상적이다.

우리 선생님들에게 다음에 좋은 사람과 꼭 다시 한 번 더 오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된다고 하면서 다음 목적지인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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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y With My Heart / Sophie Zelmani


Fell in love with my lover in the morning

 Or maybe I fell long before you

Now I wonder what lovers are missing

and how the name seems to mean passing through

It's a sad but maybe a self-caused trouble

Perhaps I've been sad longer than you

I might have been fooling my lover

 You have always been so much more to me

I ain't got the heart babe I ain't got the heart

Go with the morning I'll stay with my heart

I ain't got the heart babe I ain't got the heart

Go with the morning I'll stay with my heart

I'll stay with my heart

You know I was sent for that morning

Or maybe it just was the night that threw me out

I ain't got the heart babe I ain't got the heart

Go with the morning I'll stay with my heart

I ain't got the heart babe I ain't got the heart

Go with the morning I'll stay with my heart

I'll stay with my heart

I'll stay with my 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