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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행주형 지세 낙안읍성

by 황교장 2010. 8. 21.

행주형 지세 낙안읍성

-삶의 질을 높이는 직원연수 6-

 

처음 계획은 녹우당에서 바로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모 선생님이 전라도에 올 기회가 잘 없는데 이 기회에 좋은 곳을 더 답사를 하고 저녁도 해결하면 어떻겠는가를 제안을 했다. 지금 가면 밥을 차려 줘야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13시 반 정도에 출발을 하면 한창 차가 밀리는 시간에 남해고속도로를 지나게 된다. 토요일이라 도로에서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은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가는 길목에 있는 낙안읍성과 선암사를 답사하고는 사천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부산으로 가면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낙안읍성은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강진과 보성을 지나서 벌교에서 낙안으로 들어갔다. 낙안읍성은 입장료를 받기 전에는 이곳을 지나면 반드시 들렸다 가는 곳이었다.

식사시간이 조금 늦어도 참았다가 낙안읍성에 있는 주막에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낙안읍성에 오면 마음이 푸근하고 잃어버린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입장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너무 상업적인 느낌이 들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곳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다시 생각해 보니 주차료와 입장료를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수입이 없다면 민속촌은 앞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낙풍루

 

우리 일행은 낙안읍성에 도착하여 동문인 낙풍루(樂豊樓)로 들어가 왼쪽 성벽을 따라 걸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느낌이다.

평화로움 그 자체다. 초가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1950-60년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낙안읍성은 넓은 평야지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이 옹기종기 모여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무이한 곳이다.

 

 

 

우리나라의 읍성은 고려 말에 처음 등장해 조선 초기에 널리 퍼진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특이한 형태의 성이다. 이는 왜구의 침임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읍성은 대개 평야지대나 산을 뒤로 끼고 앞으로 평야가 펼쳐진 준평원지대에 세워진다. 이곳 낙안읍성이야말로 전형적인 형태이다.

 

 쌍청루

 

우리 일행은 남문인 쌍청루(雙淸樓)에 이르러 마을 안으로 내려갔다. 마을 돌담길을 돌아서 가는데 군수님이 드셨다고 하는 큰샘이 나왔다.

안내판의 내용을 보면

 “이 우물은 예날 군수(고을 수령)님이 드셨다하여 큰샘이라 불리어오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낙안읍성이 행주형으로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을 금하였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어 쓰도록 하였는데 이는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게 되면 배 밑이 뚫리어 배가 가라앉는다 즉, 낙안 고을이 쇠한다고 믿었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어 쓰도록 한 것은 배안에 고인 물을 퍼낸다는 의미이다, 옛부터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우물물을 마시면 마음이 착해지고 미인이 된다고 한다.”

 

 

 큰샘

 

여기에도 풍수용어인 행주형이 나온다.

행주형(行舟形) 지세는 배가 떠나가는 형국이다. 즉 사람과 재물을 가득 싣고 출발하려는 배를 묶어 두었다는 뜻이다.

풍수이론 중에서 형국론이 있다. 이는 사물의 닮은 형태를 보고 그 특성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이론이다.

우리나라에는 행주형의 지세가 아마도 가장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행주형으로 알려진 곳을 열거하면 평양, 청주, 경주, 무주, 공주, 안동 등이 행주형에 속한다고 한다. 또한 실상사, 운주사, 심지어 조지훈시인의 생가가 있는 경북 영양의 주실 마을, 산태극 수태극이라고 불리는 경북 예천 의성포도 행주형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지형이 주로 골짜기로 되어 있어 배 모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낙안읍성의 풍수를 보면 광주 무등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금전산(667m)이 주산인 진산(鎭山)이자 북현무이다.

좌청룡은 동쪽에 있는 오봉산(옛 멸악산), 우백호는 서쪽에 있는 백이산과 금화산이며 남 주작은 남쪽에 있는 제석산이다. 

안산(案山)인 옥산과 멀리 부용산(지금은 보성군 벌교읍에 속함), 그 너머에는 첨산(지금은 고흥군에 속함)이 있다. 옛날에는 부용산과 첨산도 낙안군에 속하였다고 한다.  안산(案山)이란 혈(穴)앞에 가까이 있는 산을, 조산(朝山)은 혈의 전면에 위치하고 있지만 안산보다는 더욱 멀리 있는 산을 말한다. 

여기에 조산(朝山)에 해당되는 뾰쪽산(첨산)이 문필봉(文筆峰)이다. 문필봉이 특히 아름답기 때문에 이곳에서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문필봉은 글씨를 쓰는 붓을 닮은 봉우리를 말한다. 문필봉은 길(吉)하다고 해서 자주 보도록 하고 동쪽의 멸악산(오봉산)은 울퉁불퉁 밉다고 하여 쳐다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낙안군의 지세는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며, 읍성은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한다. 또 성곽의 형태를 보면 마치 도끼처럼 생겼다 하여 금부형(金釜形)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풍수는 복잡하다.

그리고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을 한다.

옥녀산발형은 멀리 부용산 넘어 마봉(馬峰)이 장군이 말을 타고 있는 형상이고, 금전산 너머에는 옥녀봉이 있어 ‘옥녀산발형’이라고 한다.

산발(散髮)은 화장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다.

옥녀가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드리기 위하여 거울 앞에 단정히 앉아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고 있는 자태라고 한다.

그래서 낙안에는 미인이 많이 나고 인심이 좋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행주형 지세는 사람과 재물을 가득 싣고 출발하려는 배를 묶어 두었다는 뜻으로 배가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그 지역이 흥하게 된다고 여겼다.

 배는 읍성 안팎에 있는 여러 가지 조경요소들로 형상화 된다.

서내리의 빽빽한 대나무 숲은 방풍림역할을 할 뿐 아니라 뱃머리를 상징하며, 읍성 중앙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배의 중심을 잡아주는 돛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벽 북동쪽 가장자리에는 수백 년 된 거목 32그루가 줄지어 있는데, 이 나무들은 키와 노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행주형 지세에는 깊은 우물을 파면 배 밑이 뚫려 배가 가라앉게 되므로 고을이 쇠약해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읍성 안에는 우물을 파지 않고 배 안에 고인 물인 샘물을 퍼내 썼다.

 

몇 년 전에 금전산 중턱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매화가 가장 먼저 핀다는 금둔사 홍매를 보러 갔다가 낙안읍성의 지세를 바라보니 정말 낙안읍성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읍성에는 돌로 된 개인 석구가 현재 3기가 보존되어 있다. 개는 잡신과 액을 막아주는 영물로 믿어 왔다.

이는 동쪽에 있는 멸악산(오봉산)과 주변의 기를 막고자 석구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처럼 읍성은 풍수와 직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풍수는 결국 땅과 그 땅속에 사는 사람과의 사랑인 것이다.

 

 

 

우리 일행은 큰 길을 나와 동헌과 객사를 둘러보고는 민속주점으로 왔다. 민속주점에서 복분자 막걸리와 벌교 꼬막안주와 파전 녹두전으로 목을 축였다.

 

여행의 멋과 낭만을 느끼는 순간이다. 모두들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그러나 뭐든지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 이런 때일수록 중용지도가 중요하다. 적당히 분위기를 접고 다시 동문으로 나오는데 거기에는 임경업 장군의 선정비가 있었다.

 

 

 임경업장군 선정비

 

전설에 의하면 낙안읍성은 임경업장군이 큰 칼로 낙안마을 뒤에 있는 금전산의 바위들을 내리쳐 하루 만에 쌓았다고 한다.

전설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임경업장군의 누나는 왜구를 물리칠 궁리를 하는 장군이 대견하여 돕고 싶어했다. 누나는 동생에게 성곽을 쌓도록 하고 자신은 군사들의 군복을 만드는 내기를 했다. 누나가 군복을 다 지었는데도 동생이 성을 완성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누나는 다 지은 군복의 옷고름을 하나하나 뜯어 다시 달기를 되풀이 하였다. 그런데 누나는 동생이 성을 다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끝내 동생의 옷고름만은 달지 않고 남겨 두었다고 한다.”

동생의 사기를 꺾지 않으려는 누나의 지혜로운 배려였던 것이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생들의 사기를 꺾지 말고 믿고 기다리고, 칭찬을 해야만 학생들이 성공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낙안에 최초의 읍성이 만들어진 것은 1397년(태조 6년)이다. 당시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할 때였는데 남쪽에 자리한 순천만을 통해 이곳 낙안에도 왜구가 출몰하였다. 이 고장 출신인 수군절제사 김빈길은 의병을 동원하여 토성을 축조한 것이 낙안읍성의 시초라고 한다.

1466년(세조 12년)에 낙안이 군으로 승격되면서 성의 규모를 넓히고 석성으로 바뀌어 진다. 1626년(인조 4년) 임경업이 낙안군수로 부임되어 2년에 걸친 재임기간 동안 낙안읍성을 고쳐 쌓았다.

1628년 그가 낙안을 떠날 때 백성들은 정성을 들여 그의 선정비를 세웠다. 이 비가 바로 그 당시의 비라고 한다.

 

읍성에는 상당, 중당, 하당 즉, 세 개의 당산이 있다. 객사 뒤쪽의 느티나무가 상당이고 임경업의 선정비각이 바로 중당이다. 하당은 남쪽 성벽 안쪽의 바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월 대보름에 열리는 당산제에 상당, 중당, 하당의 순으로 제를 올리는 것이 관행인데, 이곳에서는 중당에서부터 먼저 당산제가 시작된다고 한다.

낙안에서는 임경업장군이 가장 중요한 마을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최고의 영웅인 셈이다.


또한 낙안(樂安)의 지명 유래를 보면 낙토민안(樂土民安), 관락민안(官樂民安)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는 “땅이 기름지어 곡식이 많이 생산 되었고, 먹을 것이 풍족하여 굶는 백성이 없어 편안한 생활을 할 수가 있었으며, 백성들 역시 이렇게 부족함이 없이 잘 살고 있어 송사(訟事)가 없고, 관(官) 역시 정치를 잘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관과 백성이 더불어 즐겁고 편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호남가(瑚南歌)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 낙안이라고 불리어 온다. 낙안에서는 선비나 농민이나 대장장이나 상인이나 모두 다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낙안읍성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우리 학교에 고향이 벌교인 유선생님에게 나중에 퇴직하면 낙안에 집 짓고 살면서 고향인 벌교로 놀러 다니면 좋겠다고 했다.

정말 퇴직하고 살고 싶은 고장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낙안을 떠나면서 마지막 여정지인 선암사로 향했다.


 참고로 다음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임경업 장군의 생애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임경업(林慶業, 1594년~1646년 음력 6월 20일(양력 8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친명배청파(親明排淸派) 무장이었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가 충민(忠愍)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충주(忠州) 출생이다.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후손이다.


병자호란 때까지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응모 출전하여 정충신 휘하에서 머무르다가 안현(鞍峴) 싸움에서 이괄의 군대를 맞아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

그후 우림위장·방답진첨절제사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으로 강화에 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30년 평양중군으로 검산성(劒山城)과 용골성(龍骨城)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劉興治)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공유덕(孔有德) 등의 무리를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


대청 투쟁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서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1640년 안주목사 때 청나라의 명령으로 주사상장으로 가도에 주둔 중인 명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병한다.

어쩔 수 없이 출병하긴 하였으나, 다시 명군과 내통하여 의도적으로 선봉장을 피하고, 청나라 장수 섬세괴를 선봉장에 나서게 하고 그 사실을 명군에 알려 섬세괴가 전사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도 주둔 명군의 지휘관인 도독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체포되었다.

임경업은 청으로 압송되기 전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했고, 이에 청 태종은 임경업을 빌미로 조선 내 반청세력에 대한 소탕령을 내렸다.

조선에 더 머무르기 힘들게 된 임경업은 1643년 명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명나라 등주 도독 황룡을 통해 숭정제로부터 부총병의 직위를 하사받고 청나라 정벌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벌 준비 중 청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청태종이 산해관에 입성하자 황룡은 겁을 먹고 도망쳤고, 중군을 이끌던 마등홍이 대신 전군을 영솔하고 임경업과 함께 석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명나라 숭정제가 목매어 자결하였고, 천도한 남경마저 함락되어 정세가 바뀌자 마등홍 역시 청에 항복하였다.

임경업도 도망가려 하였으나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 태종은 임경업을 설득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경업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이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기원이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접한 1646년 인조는 임경업을 심문하기 위해 임경업의 환국을 요청했고, 순치제는 그를 내주었다. 인조의 친국 과정에서 심기원과는 아무런 관련 사항이 없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자 임경업을 시기한 김자점이 나라를 배신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 국법을 위반했다며, 형리들을 시켜 장살(杖殺)시켜 버렸다.


사후

1697년(숙종 23) 복관(復官)되었으며,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1726년(영조 2년)에 호서지방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社)를 세웠고, 이듬해(영조 3년)에 조정에서 사액(賜額)을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1791년(정조 15년)에는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열사비”이다. 1978년 충렬사는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성역화되었다.


일화

임경업은 죽기 직전 “천하의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냐?”라고 외치며 한 많은 생을 마쳤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대여, 나는 죽이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느냐?”라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한다.

임경업을 모함하여 때려죽인 김자점도 얼마 못가 역모를 꾸미려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임경업이 금교역에서 탈출한 이후 청나라에서는 그의 부인을 심양으로 끌고 가서 고문했다.

그러나, 임경업의 부인은 “우리 주인은 대명(大明)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가 있는가?”라고 하며 품에서 칼을 꺼내어 자결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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