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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한국불교와 불상의 전래과정

by 황교장 2021. 12. 29.

한국불교와 불상의 전래과정

 

서산마애삼존불을 보고는 지금도 이처럼 궁벽한 곳에 당시에 이렇게 훌륭한 마애불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불상의 전래에 대해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따라서 불상의 시작과 중간과정을 거쳐 이곳 서산마애불까지 온 과정을 공부하고자 한다.

오늘날 불상은 사찰에서 예배의 중심이지만 석가모니 사후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이 제작되지 않았다. 부처님의 형상 대신 보리수, 법륜, 탑 등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정반왕의 왕비 마야부인이 상아 여섯 개가 달린 코끼리가 태내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를 잉태했다. 그리고 출산일이 다가오자 해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 석가모니가 6년간의 고행을 중단하고 보리수아래에서 깊은 사색에 잠겨, 악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를 정각(正覺)이라고 한다.

 

보리수

법륜은 부처님의 설법을 말한다. 석가모니는 정각을 이룬 후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비구니를 대상으로 첫 설법을 했다. 이를 초전법륜이라고 한다. 초전은 첫 번째 설법이고, 법륜은 윤회를 상징한다.

 

산치대탑

석가모니 사후 사리를 모셔놓은 건축물을 스투파(stupa)라고 한다. 스투파가 한자로 번역된 것이 탑이다. 인도 산치지역에 세워진 대탑은 불타의 사리를 봉안하는 기념비적인 조형물이다. 산치대탑은 고대인도 스투파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산치대탑

그리하여 석가모니의 정각은 보리수, 초전법륜은 바퀴, 열반은 스투파로 표현했다. 이 시기를 무불상시대라고 한다. 그러면 왜 부처님 모습을 조성하지 않았을까? 열반에 든 진리의 부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그 모습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형상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또한 부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례한 일이며, 무한한 덕을 지닌 부처님을 유형의 상에 한정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다.

 

간다라 불상

그런데 히말라야 산맥 밑에 위치한 간다라 지역은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대왕이 동방원정을 할 때의 진입로였다. 알렉산더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간다라지방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모습을 빌려 신을 조각하는 모습을 보고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 이 시기는 대승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깨달음을 얻은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아미타, 약사, 비로자나, 미륵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부처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부처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생겨 불교가 점차 대중화되면서 예배의 공간과 신상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교리 상으로도 불상의 조성이 어긋나지 않았다. 이후 불상은 탑과 함께 사찰의 상징이 되었다.

 

마투라 불상

초기 불상은 인도 서북부의 간다라지방과 내륙의 마투라지방에서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지만 그 양식은 확연히 달랐다. 히말라야 산맥 밑에 위치한 간다라는 인도의 다른 지역보다 서구 헬레니즘 문화를 빨리 수용했다. 따라서 간다라 불상은 유럽인을 닮았다. 반면에 마투라 불상은 활짝 뜬 큰 눈에 얇은 옷을 밀착시키고 오른쪽 어깨는 드러낸 채 왼쪽에 걸치는 편단우견을 한 인도인을 닮았다. 인도 불교의 전성기인 굽타시기(320-647)로 들어서면 불상의 상징인 육계, 나발, 광배 등 32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얼굴은 인도인의 미인상으로 나타낸다. 이는 불상을 신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상적인 인간상이 반영된 것이다.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1세기 후한초지만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후한(25-220)이 망하고 북방의 호족들이 일어나는 오호십육국시대(316-389)였다. 북방의 호족들은 문화적으로 뛰어난 한족의 유교에 대응하는 사상으로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중국의 역사에서 후한이 망하고, 삼국시대인 위(220-265), (221-263), (220-280)를 거쳐 삼국의 통일을 이룬 것은 사마의 중달의 손자인 사마염이다. 사마염이 세운 진(晉)나라는 사마의 중달의 증손자인 사마예가 세운 동진과 구별하기 위해 서진이라고 불린다.

 

운강석굴

사마염이 세운 진(晉265-316)은 '팔왕의 난'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사마의 중달의 증손자인 사마예가 건업(남경)에 동진(317-420)을 세우면서 한족들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북쪽에는 흉노족 유총이 304년 서진을 멸망시킨 이후 본격적인 5호16(304-439)의 혼란기가 개막되었다. 5호16국은 선비족이 화북지역에 세운 북위(北魏,386-534)의 태무제가 439년 강북을 통일했다. 당시 북위의 세력이 얼마나 강성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은 고구려의 평양천도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은 북위가 강성해지자 북위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도를 국내성에서 방어가 용이한 평양으로 옮겼다(427).

 

운강석굴

486년 북위의 효문제는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고 한화정책과 용문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6세기 중반 북위는 동위(534-557)와 서위(535-557)로 나뉘었고, 동위가 북제(北齊,550-557), 서위가 북주(北周,557-581)로 되면서 북주가 북제를 통합했다. 북주의 승상 양견이 여덟 살의 어린 황제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수(隋)나라를 세우고 문제로 즉위했다. 이와같이 북방에서 흥망을 반복했던 왕조를 통틀어 북조라고 칭한다.

남조(南朝)는 서진이 북방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서진의 지배층 일부가 장강 남쪽으로 쫓겨 와서 수도를 남경에 세운 나라가 동진(317-420)이다. 동진은 내가 좋아하는 '귀거래사'의 도연명(365-427)이 동진사람이다. 남조는 동진을 시작으로, 송(宋,420-479), (齊,479-502), (梁,502-557), (陳,557-589)의 순으로 왕조의 교체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의 왕조를 통틀어 남조라고 칭한다.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陳)도 수나라에게 멸망을 당했다.

이처럼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던 위진남북조는 혼란을 극복할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사상체계가 필요했다. 여기에 불교는 가장 적절한 대안이었다. 따라서 선비족이 세운 북위(386-534)는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강력한 왕권 불교를 추진했다. 지금 중국이 자랑하는 거대한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이 이때 건립되었다. 북위부터 불상의 모습은 중국화되어 얼굴은 갸름하면서 살이 복스럽게 오르고, 옷은 북방의 날씨를 반영하여 두툼해지면서 옷주름이 굵어진다.

 

용문석굴

북위불상의 이러한 특징은 고구려 불상에도 나타난다. 삼국시대 불상 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의 불상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이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연가는 고구려의 연호로 생각되나 어느 왕의 연호인지 확실치 않으며 기미년은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539년으로 추정된다. 살이 오른 갸름한 얼굴에 두꺼운 옷자락이 물결무늬를 이루며 내려와 양옆으로 지느러미처럼 펴져나간 모습은 북위 불상 양식과 통한다. 고구려는 소수림왕2(372) 516국의 하나인 전진(351-394)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용문석굴

한편 남쪽으로 피난 간 한족들도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중국은 남북조 공히 불교시대를 맞이하였다. 남조의 양나라 불상은 기본적으로 북위의 불상과 다르지 않지만 얼굴과 옷주름이 아주 부드럽다. 이는 불상뿐만이 아니라 산수화에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남조와 북조의 문화적, 정서적 차이이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보이는 양식적 차이와 같은 것이다.

 

용문석굴

양나라 불상은 곧 백제 불상에 반영된다. 불상뿐만아니라 벽돌무덤인 무령왕능도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무령왕능

 백제는 침류왕 때인 384년 동진(317-420)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해주었다. 백제의 불상은 불교 전래 초기의 것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대부분 부여 천도 이후의 작품만 남아 있다. 대표적인 불상은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납석제여래좌상과 공주 의당리에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이다.

 

납석제여래좌상

이 두 불상의 공통적인 특징은 풍만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다. 이곳 서산마애불 역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금동관음보살입상

신라는 법흥왕 14(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했다. 신라불교가 뿌리를 쉽게 내릴 수 없었던 것은 토착세력들이 배격했기 때문이었다. 절대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신앙의 형태는 토착세력들의 지위를 애매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의 입장은 달랐다.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강화를 위해서는 발달된 종교인 불교에 의지하는 편이 유리했던 것이다. 따라서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도 공인하여 왕권이 토착세력을 이긴 것이다. 이후 신라불교는 왕실의 주도 아래 급속히 퍼져나갔다.

 

운강석굴

중국 불상의 양식적 변천을 보면 고구려는 북위, 백제는 양나라, 신라는 북제와 수나라, 통일신라는 당나라 불상과 궤도를 같이하면서 삼국 특유의 불상을 전개해갔다. 그리고 삼국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여 일본의 고대국가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상은 중국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경향에 동참하고 한편으로는 이를 일본에 전파하면서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보편적 흐름을 형성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이는 서양에서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와 로마에서 시작한 르네상스 문화가 베네치아와 프랑드르 지역인 오늘날 벨기에, 네덜란드 및 독일까지 전파되면서 유럽문화의 특성을 이루게 된 경우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