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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한국문화와 유물유적 - 논산 돈암서원을 찾아서

by 황교장 2021. 12. 19.

문제 : 교재 3향교와 서원을 읽고 향교 또는 서원(서울은 성균관 포함)을 찾아가서 조사하고 감상문 적기.

 

논산 돈암서원을 찾아서

 

. 서론

201976일의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서원 9곳을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세계문화유산은 세계유산위원회가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인류를 위해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일람표에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자연유산·복합유산으로 분류한다. 문화유산은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적지·사찰·궁전·주거지 등과 종교 발생지 등이 포함된다. 세계유산의 근거가 되는 세계유산협약은 이집트 누비아 유적 보호 운동의 영향으로 탄생한 국제협약이다. 당시 이집트가 나일강 유역에 아스완 하이댐(Aswan High Dam)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아부심벨 신전을 구하기 위해 유네스코는 유적 보호 운동을 진행해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약 8천만 달러를 모금했다. 이를 계기로 인류사에 중요한 유산을 보호할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1972년 유엔 회의에서 세계유산협약이 채택됐다. 누비아 지역의 대표 유적으로는 아부심벨과 필래신전이 있다. 아부심벨은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 때 건축되었다. 모래 속에 묻혀 있다가 19세기 초반 발견되었다. 기원전 13세기에 거대한 암벽을 깎아 만들었다. 대신전 앞에는 높이 20미터에 이르는 람세스 2세 좌상 네 개가 있다.

 

아부심벨대신전

소신전은 대신전에서 90m 떨어진 북쪽에 있다.

 

아부심벨소신전

아스완댐 건설에 따라 이 지점의 수위(水位)60m 높아져 수몰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나 유네스코의 헌신적인 노력과 현대공학의 혜택으로 1964-1968년에 이 신전을 원형대로 65m를 끌어올려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한국은 2021년 기준 15개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문화유산은 석굴암·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 백제역사유적지구(2015),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 한국의 서원(2019)이 있다. 자연유산으로는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한국의 갯벌(2021)이 있다.

 

동명왕릉

북한에는 총 2건의 문화유산이 등재되어 있다. 2004년 평양과 평안남도 일대에 걸쳐있는 고구려 고분군이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강서대묘백호
강서대묘주작도
강서대묘현무도
덕화리고분군
수산리고분

이후 2013623, 개성 일대의 만월대, 성균관, 선죽교와 표충비, 왕건왕릉, 공민왕릉을 비롯한 고려왕릉군과 개성의 유적지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개성숭앙서원
개성남대문
개성성균관
공민왕릉
공민왕릉문인상
공민왕릉벽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총 9곳이다. 소수서원(1543), 남계서원(1552), 옥산서원(1573), 도산서원(1574), 필암서원(1590), 도동서원(1605), 병산서원(1613), 무성서원(1615), 돈암서원(1634)이다. 그 동안 많은 서원들을 답사했다고 생각했는데 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 중 가보지 못한 서원이 두 곳이나 있었다. 돈암서원과 무성서원이다. 어떤 서원인지 궁금하여 얼른 가보고 싶었지만 답사계획을 세우고 나면 다른 일이 생겨 미루어지다가 이제야 가게 되었다. 인조 12(1634)에 김장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돈암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다. 부산에서는 가기가 쉽지 않는 곳이다.

 

홍살문과 돈암서원 전경

. 본론

1. 서원의 역사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 자리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 봄과 가을에 제사하다가, 1543(중종38)에 사당 주변에 학교를 세워 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고 이름을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백운동서원은 그 뒤 1550(명종5)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사액(賜額)이란 왕이 직접 서원의 이름을 쓴 간판을 내려주는 것이다. 사액을 받을 경우, 토지와 노비를 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혜까지 누렸다. 명종 연간에는 서원이 18개에 이르렀다. 선조 때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선조 당대에 세워진 것이 60여 개를 넘었으며 22개 서원에게 사액이 내려졌다. 그 뒤 서원이 전국 도처에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하여, 숙종 때에는 무려 131개소의 사액서원이 있었다. 그러나 영조 때에는 서원폐단의 격화로 인한 단속으로 사액을 일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산앙루

그 뒤 현종 때에는 193개가 설립되었다. 지역별로는 초창기의 경상도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건립되었다. 시기가 내려가면서 점차 자기 가문의 이름난 인물을 모시는 문중서원이 많이 나타났다. 가문의 인물을 제향하고 가문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러다보니 서원이 공론을 내는 자리에서 가문 단위의 기득권을 유지, 확보하는 데 더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서원이 늘어가면서 여러 가지 폐단도 일어났다. 서원이 정치 세력의 후원을 받고 경제적 기반을 갖추어 지방관도 간섭하지 못하는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원이 군역 도피처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 서원에서는 교화를 위해 사용하는 묵패(墨牌)를 하층민을 잡아들이고 토색하는 데 사용하였다. 특히 화양서원에서 발행하는 묵패는 관령보다 더 위력이 있었다.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한 뒤 철폐된 서원의 절반 이상이 다시 복설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서원의 재산은 학교비로 충당되었다.

 

2. 돈암서원의 내력

돈암서원은 김장생이 서당을 차려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을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遯巖)’이라는 현판을 내려 주어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에 김집송준길송시열을 추가로 모셨다. 서원이 처음 세워진 숲말 산기슭에 있던 '돈암'이라는 큰 바위의 이름을 따서 사액을 받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주역의 의미와 주자의 만년에 사용하던 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돈암서원은 숲말에 있던 것을 홍수 때 물이 차므로 고종 17(1880)에 이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돈암서원의 돈(,)은 주역 33괘로 천산돈(天山遯)이다. 상괘인 건()이 하늘이고, 하괘인 간()이 산이다. 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에 다다를 수 없고 산이 높으면 하늘이 물러나기 때문에 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괘의 괘사는 은둔생활을 해야 형통한다. 소인은 마음을 곧게 가져야 이롭다(遯亨小利貞)’는 뜻이다. 즉 물러나야 할 때에는 물러나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입덕문

3. 돈암서원의 위치와 배치

돈암서원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26-14에 있다. 부산에서 대구부산 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대전 IC를 나와 논산 개태사 역을 지나 충남인터넷고등학교를 지나면 왼편에 돈암서원 한옥마을이 나온다. 한옥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들어갔다. 거의 4시간이 소요되었다.

서원 입구부터 아늑함을 느끼게 해 준다. 평지에다가 주변의 산들이 아주 야트막하여 평화롭다. 한참을 걸어가야만 서원이 나온다. 지금까지 가 본 서원들과는 규모면에서 차이가 난다. 가장 크고 넓다. 사적 제383호이며, 지정 면적은 5,590이다. 뒷산이 비산비야(非山非野).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아주 아늑한 곳에 서원이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은 서원 담장 바깥마당에 있는 산앙루(山仰樓). 산앙루는 유생들이 휴식하고 교류하는 공간이다. 병산서원 만대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번 올라가려고 하니 입구를 막아놓았다. 담장으로 둘러진 서원에 들어가려면 출입문인 입덕문을 지나야 한다.

 

응도당

입덕문 왼편에는 보물로 지정된 응도당이 있다. 돈암서원의 배치는 약한 구릉지를 이용하여 전면에 강당을 두고, 후면에 묘당을 둔 전형적인 전학후묘식 배치이다. 전면에서부터 산앙루,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가 중심 축 선상에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좌우로 응도당, 동서재, 장판각, 경회당, 전사청 등의 건물이 비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크게 묘당(廟堂), 강학(講學), 유식(遊息), 수직(守直)4개 구역으로 구분된다.

 

양성당과 동서재

가장 중요한 묘당 구역은 제일 안쪽이자 서원 내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전면에 내삼문을 두고 주위 담장에는 궁궐의 담장이나 사대부의 집에서 사용하는 화강암으로 된 사괴석 담으로 둘러져있다. 이 내삼문 담장이 꽃담이다.

담장벽에는 12개의 전서체의 글이 새겨져 있다. "지부해함 [地負海涵], 박문약례 [博文約禮], 서일화풍 [瑞日和風]"이라고 한다.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해라.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처럼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하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의 뜻이라고 한다.

 

꽃담

강학 구역에는 강당인 양성당(養性堂)과 그 앞 좌우에 동·서재를 배치해 두었다. 윈래 돈암서원의 옛터에는 응도당이 강당이었으나, 옮기는 과정에서 양성당이 먼저 강당 자리를 차지하였다. 중앙의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좌, 우 대칭으로 배열된 동재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인 정의재(精義齋)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당의 서편으로는 판각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이 강학하시던 공간인 정회당(靜會堂)이 위치하고 있다.

 

응도당

돈암서원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품격이 있는 건물은 응도당(凝道堂)이다. 돈암서원 응도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건물이다. 이때의 엉기다, 모으다, 집중하다의 뜻으로 해석된다. 즉 도에 집중하여 공부하는 곳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1880(고종 17)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옮겨서 지었다. 응도당은 현존하는 서원 강당 건물로는 거의 유일하게 고대 예서(禮書)에서 말하는 경·대부·(卿大夫士)의 가옥인 하옥(廈屋)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다. 김장생은 생전에 가례집람을 저술하면서 고대 중국의 예서에서 전하는 이상적인 전각을 그림과 함께 설명한 바 있는데 사후에 송준길, 송시열 등 그의 제자들이 응도당을 건립하면서 하옥제도에 입각한 평면과 구조를 채택하였다.

 

응도당

응도당은 정면 5, 측면 3칸의 누마루식 건물로 겹치마에 맞배지붕의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다. 박공널 밑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하고 풍판 아래에는 눈썹지붕을 퇴칸처럼 달았다. 응도당은 기와에 씌여 있는 명문으로 보아 1633(인조 1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특징은 평면구성에서 중당과 동서상(東西廂), 중당 뒤에 실()과 좌우 방()과 동서 협실(夾室)을 두는 것이며 지붕은 맛배지붕 형태에 양 측면에 덧지붕의 일종인 ()’을 두는 것이다. 현재 응도당은 내부 바닥 일부 및 창호가 변형되었지만 기본적인 평면구성이나 영 등이 잘 남아 있다고 한다. 응도당은 비록 당초 위치에서 이전되기는 하였지만 17세기 조선의 선비들이 이상적인 고대 예제를 따라 건물을 조성하려고 했던 노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며 현존하는 건물 역시 그러한 특징이 잘 남아있다는 점에서 보물 지정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돈암서원 원정비

이곳에서 눈에 뛰는 것은 강당 바로 앞에 대리석으로 된 돈암서원 원정비가 서원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비석은 서원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고,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의 비석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석의 내용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을 적고 있다. 현종 10(1669)에 세웠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이 비문은 문묘배향공신 네 분이 직접 관련된 셈이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이 주인공들이다. 이 네 분이 다 문묘배향공신이다.

 

성균관 대성전

4. 문묘배향공신

문묘배향공신이란 문묘(성균관)에 모셔진 공자를 모시는 유학의 공신이라는 뜻이다. 성균관의 대성전과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4성현, 10, 송조 6, 동국 18현을 모셨다. 4성현은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말한다. 공문 10철은 공자의 제자들인 민손, 염경, 염옹, 재여, 단목사, 염구, 중유, 언언, 복상, 전손사의 10명을 말하고, 송조 6현은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를 말한다. 그리고 동국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말한다.

 

성균관 명륜당

조선시대 양반관료의 최고 명예는 문묘배향공신이 되는 것이다. 문묘배향공신은 정공신이나 종묘배향공신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문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학자가문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조정에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그 후손들을 특채하였다. 최초로 우리나라 사람을 문묘에 배향한 것은 고려 현종 11(1021)에 최치원이다. 신라 사람이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친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2년 후인 현종 13(1023)에는 신라의 설총을 문묘에 배향하였다. 충숙왕 6(1319)에는 주자학을 학습하고 국학을 진흥시킨 공로로 안향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공신은 정몽주다. 정몽주는 중종 12(1517)에 배향되었다. 정몽주의 신위는 문묘에서 최치원의 신위 다음에 자리하였다. 광해군 2(1610)에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른바 동방오현이 같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임란 이후 정쟁이 격화되면서 문묘배향공신도 정쟁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서인의 연원으로 상징되는 이이와 성혼은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중앙권력을 장악한 후 문묘배향공신이 되었지만,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세력을 잃자 문묘에서 축출되었다. 이이와 성혼은 갑술환국에서 서인이 남인을 축출한 이후 다시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다. 숙종 대 이후의 문묘배향공신은 박세채를 제외하면 모두 노론계의 인물들이다. 이는 숙종 대 이후 노론이 당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박세채의 경우는 탕평을 모색하던 숙종이 일찍이 탕평론을 주장한 박세채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다.

 

김장생 초상

5. 돈암서원 배향인물

. 김장생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문묘에 종사된 동국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이다.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 김집, 송시열 등을 길러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김집은 그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아버지 김계휘의 친구가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이었으므로 특별히 그들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계휘는 사암 박순, 기대승 등과도 친구로 지냈으므로 훗날 사계는 그들의 문인들과도 인맥을 형성하였다.

율곡 이이는 그의 스승이자 사돈이다. 율곡의 딸이 그의 아들 김집의 처이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대제학 김만중(金萬重)은 그의 증손자이다. 송시열,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 김수항, 김수흥, 김익훈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또한 송시열의 후대에서도 윤증, 박세당 등의 소론계 학맥으로도 분화, 계승되었다. 이들은 김장생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나중에 김집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보통 김집을 스승님으로, 김장생은 노스승님, 큰스승으로 불렀다.

 

신독재유고

. 김집

김집(金集, 1574-1656)은 김장생의 아들이다. 호는 신독재(愼獨齋), 신독(愼獨)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분이다.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와 윤선거, 윤문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학문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공동 조상이다. 효종 초에는 안방준과,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반대하였다. 율곡 이이의 서녀사위이다. 이이·성혼·송익필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부친 김장생을 이어 그 학문을 송시열, 송준길 등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문하생들 중에서 송시열을 당수로 하는 노론과 또 다른 문인 윤선거의 아들 윤증을 당수로 하는 소론으로 나뉜다.

 

김집 성혼신도비 1648

 

송준길 행초

. 송준길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은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의 아들이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외조부이다. 또한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이이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장인이기도 한 남인학자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로 받들었다.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이후 1658(효종 9)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 겸 성균관좨주를 거쳤다. 제자 중 눈여겨본 민유중을 사위로 삼았다. 이들 사이에서 인현왕후가 태어난다. 세자시강원찬선을 겸임하여 세자인 현종을 사부로서 가르쳤다.

 

대전회덕 동춘당 송준길 본가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효종상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여 남인의 윤휴·허목·윤선도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기년설을 관철시켰다. 예론에서 승리한 이후 남인을 처형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불행하게도 죽고 만다. 1670년 세자의 관례식에 참석한 뒤 낙향하였으며, 이후 회덕 향리에 은거하다가 167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향년 66세였다. 사후 1756(영조 32)에 송시열 등과 함께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송시열 서간 1666

. 송시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이다. 본관은 은진이다.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25(인조 3)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다.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박세채와 함께 인신(人臣)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분이다.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었다.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정조 11)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회 이상 등장한다.

 

송자대전

윤휴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라고 하였다. 송시열은 윤휴에게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중단할 것을 촉구했으나 윤휴는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송시열은 이 문제를 두고 1653년 황산서원에서 동료 친구들을 모아서 이 문제를 토론한다. 윤선거는 윤휴를 높이 보며, 그 학문이 높고 깊다고 했다. 반면 송시열은 윤휴가 사문난적과 같다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1669(현종 10) 윤선거가 사망하자 아들 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찾아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적어 보냈고, 윤증은 고쳐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지간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송시열 초상

그 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회니시비(懷尼是非). 우암 송시열은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고 명재 윤증은 이산(尼山)에 살았기에 회니시비라 부른다. 회니시비는 1681(숙종 7)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를 비방했던 사건이다. 1680(숙종 6) 경신환국의 남인 처벌 문제와 더불어 집권세력인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사건이다. 1681년 윤증은 신유의서를 통해 송시열의 정치적 편견으로 남인들이 죽임을 당하게 하였고 또한 지나치게 독선적이며 주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로 평가하자, 사제였던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정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은 급격하게 분파되기 시작했으며 송시열을 따르는 세력은 노론, 윤증을 중심으로 모인 세력은 소론으로 갈라서게 된다.

 

김창업, 송시열77세 초상

송시열은 1688년 희빈 장씨가 숙종의 아들을 낳자 16891월 이를 원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숙종의 눈 밖에 났다.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때 남인들은 다시 그를 죽여야 된다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에 의론이 분분하여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다시 불러다가 심문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해 숙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와 국문시켰을 때의 파장을 우려한 숙종은 돌아오는 길에 그에게 사약을 내린다.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 뒤에 신원되었다. 생전의 행적에 대해서 칭송과 비방이 엇갈리지만 서인 정권 하에서 영조에 의해 문묘에 종사되고, 세손 시절부터 그를 존경하던 정조에 의해 효종의 묘정에 추향되었다. 또한 정조는 그를 공자, 맹자, 순자, 주자에 버금가는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추대하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하였다. 또한 송시열을 비난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못 박아 그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1863년 이전까지 송시열의 주장에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후 송시열의 제자와 문도들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부르며 공식화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다.

 

송시열 묘소

. 결론

이곳 돈암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9개의 서원 중에서는 가장 늦게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하지만 그 동안 내가 가 본 서원 중에서는 가장 터가 넓고 건물이 튼실하게 보인다. 특히 강당 건물이었던 응도당은 서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품격이 있는 건물로 보인다. 돈암서원이 노론의 본고장으로 느껴졌다.

우리나라 노론의 계보를 보면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정암 조광조-휴암 백인걸-율곡 이이, 우계 성혼-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로 이어진다. 이황 이후에 문묘배향공신들인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노론계열의 학문적, 정치적 연원을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돈암서원 원정비와 관련된 인물들은 노론의 핵심이다. 노론도 처음에는 청백리 사림파의 학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권력을 잡으면서 권력의 맛을 보고는 변질되어 간 것이다.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1865년 노론세력의 중심이었던 만동묘를 본보기로 철폐하였다. 만동묘는 노론 영수인 우암 송시열의 뜻에 따라 임진왜란 당시 지원군을 보내 조선을 도운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노론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당시 개혁 정책의 핵심은 노론의 오랜 세도 정치에 따른 부정부패와 가렴주구 등 각종 폐해를 척결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먼저 사액되지 않은 서원을 철폐하고, 나아가 사액서원도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만동묘 옆에는 송시열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인 화양동서원이 있었다. 화양동서원도 1871(고종 8)에 노론 사림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폐되었다. 대원군이 야인(野人)으로 지낼 때 화양동서원에 들렀는데, 당시 부채를 들고 계단을 오르다 서원의 노비에게 변을 당해 이를 앙갚음하기 위해 화양동서원을 정리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곳 돈암서원은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 남았다. 살아남은 서원들을 가리켜 신미 존치 47서원이라고도 부른다. 돈암서원이 비록 노론의 산실역할을 하였지만 김장생은 청백리인 사림파의 학맥을 이어온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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