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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영화 마지막황제 감상문

by 황교장 2021. 12. 3.

'근대화와동서양' 기말고사

 

영화 마지막황제 감상문

 

. 서론

 

영화 '마지막 황제'를 처음 본 것은 삼십대 중반인 1988년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금성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왔고, 자금성을 직접답사도 했다.

 

이번에 이 과제 덕분에 다시 이 영화를 보았다. 다시 보니 청나라의 슬픈 역사와 한 개인의 숙명이 비로소 새롭게 보이고 가슴이 저미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의는 1906년 청나라 제11대 황제인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짜이펑과 서태후의 측근인 대학사 겸 군기대신인 영록의 딸 유란의 아들로 순친왕부에서 태어났다. 영화 마지막 황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푸이의 생애를 다뤄 전 세계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격동기 중국의 모습을 수려한 화면에 담은 마지막 황제는 중국 자금성에서 촬영한 첫 서양 영화로도 유명하다. 1987년에 개봉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에 개봉되었다.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주연 존 론(John Lone)의 이탈리아, 중국, 영국 합작 영화다. 엑스트라 19천명, 스테프 이탈리아인 100, 영국인 20, 중국인 150명을 동원, 1988년 제6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색상, 편집상, 녹음상, 의상디자인상, 미술상, 작곡상 등 9개의 상을 휩쓸었다. 푸이의 자서전을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처음으로 서유럽인이 서유럽적인 감각과 시야에서 중국인의 드라마를 그렸다. 자금성 경내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황제에서 시민으로 변해가는 푸이의 삶의 과정이 담담하게 전개된다.

 

. 본론

1. 영화의 배경인 청나라의 역사

만주족인 누르하치(1559-1626)1616년 청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 청 태조(재위 1616-1626)로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으며 명과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여러 번 대승을 거두어 청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누르하치는 11년간 재위하면서 청나라 제도의 중심이 되는 팔기 제도를 창설했으며, 만주 문자를 만들었다.

 

누루하치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홍타이지(청 태종,1626-1643)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었다. 병자호란을 일으켜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황제가 바로 청 태종 홍타이지이다.

 

다음에 즉위한 제3대 황제인 순치제(1643-1661)1644년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격파한 뒤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했다.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1654-1722)는 순치제가 사망하자 8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5세 때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이다.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을 복속시켜 명나라의 모든 영토를 통일 시켰다. 당시 만주족은 백만명도 미처 안 되는 인구로 일 억명이 넘는 한족을 완전하게 지배했다.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한편 몽골 오이라트로 원정하여 중가르의 칸 가르단을 물리쳤다. 가르단을 지원했던 티베트를 청나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 손자인 건륭제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으로 천고일제(千古一帝)로 칭송받고 있다. 천고일제는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라는 뜻이다. 황후 4명을 포함하여 총 64명의 비첩을 두었다. 청나라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다. 아들 35명과 딸 20명 총55명의 자식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둔 황제이기도 하다.

 

5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1678 -1735)는 아버지의 정책을 잘 이어갔으며 세금을 단일화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고, 강희제 말기부터 시작되어 온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1721(강희 60) 700만 냥밖에 없던 국고가 1735(옹정 13)에는 6천만 냥이나 있었다.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그들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6대 황제인 건륭제(乾隆帝,1711-1799, 재위 1735-1796)는 어릴 때부터 제왕의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옹정 13)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했다.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10년 동안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완성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중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미얀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기틀을 만들었다.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건륭제가 실제 나이보다 10년이 젊게 보인다고 서술하고 있다. 연암은 건륭제를 황제의 네모난 얼굴은 하얗고 조금 누런 빚을 띠었으며, 수염은 절반쯤 하얗게 세었고 나이는 60세 가량으로 봄날의 화창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열하일기는 건륭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1780년 진하사절을 따라 연경(북경), 열하 등지를 여행한 것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사치, 반란,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났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건륭제 사후 아들인 가경제가 화신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화신의 재산은 국가 총 수입액의 20년치에 다다를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1795(건륭 60)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 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4년까지 합쳐 총 64년 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했다.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기도 하다.

 

이처럼 청나라는 강희·옹정·건륭 3대에 걸쳐 130년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건륭황제 말기에 청나라는 정치가 부패하면서 1796년에 민란인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다. 청은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국가 예산과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였고, 이로 인해 만성적인 재정난에 빠지고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7대 황제인 가경제(1795-1820)는 자신의 아버지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도 강했으나 몰수한 화신의 막대한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지 않고 내탕금에 넣어 사유화했다는 점에서 그 능력이 평범해 쇠퇴해가는 나라를 안정시키기엔 부족한 황제였다.

 

가경제가 죽은 후 제8대 도광제(1820-1850)가 제위에 올랐다. 당시 홍수와 기근을 막기 위해 황허강의 제방을 고치고 대운하를 수리하는 일이 절박해졌다. 그러나 부패한 관리들은 운하의 수리비를 횡령해 1849년에 이르러서는 대운하가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했다. 한편 서양 상인들의 아편무역을 막으려고 임칙서는 아편엄금론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영국정부는 청나라와 전쟁을 결정했다. 그래서 영국과의 제1차 아편전쟁(1839-42)이 일어났다. 청나라는 형편없이 패했고, 최초의 불평등한 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난징조약의 내용은 영국이 배상금을 얻고, 홍콩을 영구적인 식민지로 할양받으며, 5개 항을 개항하는 등이다. 이에 따른 전쟁비용과 평화협정 조건에 따라 영국에 지불한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청나라 내의 불만을 더욱 커지게 했다. 이러한 불만으로 태평천국운동(1850-64)이 일어났다. 소요가 중국 남부를 휩쓸기 시작하던 무렵에 도광제는 사망했다.

 

도광제에 이어 제9대 함풍제(1850-1861)가 즉위했다. 함풍제는 도광제의 넷째 아들이다. 1853년 태평천국군은 남경에 수도를 정하고 북벌을 위해 출병하여 북경을 위협했다. 그 와중 속에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1차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은 생각보다 이익이 작았다. 그래서 영국 상품이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영국 상인의 자유로운 내륙 여행과 북쪽 항구의 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애로호사건을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1857년 광저우를 점령했다. 뒤이어 천진조약의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천진조약의 주요내용은 외국공사의 북경 주재, 10개항 개항, 여행, 통상, 포교의 자유 등이다. 천진조약은 1년 내에 북경에서 비준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외국사절의 수도 진입을 꺼려한 청조는 상하이에서 비준서를 교환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은 북경에서 비준하려고 북상했다. 이에 청조는 지시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영불연합군에 포격을 가하여 대파시켰다. 그러자 1860년 영불연합군은 대군을 파견하여 북경까지 함락하고 이화원, 원명원 같은 청의 별궁이 양국 병사들에게 마음껏 유린당한 뒤에 북경조약(1860)이 체결되었다.

북경조약은 천진조약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고, 천진을 개항장에 추가하고,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을 허가하며 구룡반도 남쪽의 구룡사를 영국에 할양한다는 내용 등이다당시 함풍제는 열하로 도망갔고, 동생 공친왕 혁흔이 북경에 남아 영국·프랑스와 각각 북경조약을 맺었다.

또한 러시아는 청나라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체결했다. 아이훈 조약은 1858년 헤이룽장성의 북쪽 아무르 강 연안의 아이훈에서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가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러시아는 청나라가 제2차 아편 전쟁 중인 것을 기회로 청나라의 전권대사 이산을 협박해서 이 조약을 맺게 하였다. 이 조약은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은 것으로, 러시아 제국은 이 조약을 구실로 청나라로부터 스타노보이 산맥(외싱안링 산맥)과 아무르 강(헤이룽 강) 사이의 넓은 지역을 빼앗음으로써 시베리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한반도 면적의 약 3배의 땅을 확보하고 태평양으로 향하는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를 확보할 발판을 만들었다.

청나라 정부는 이 조약을 승인했다가 얼마 뒤 부인하였으나, 2년 뒤인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서 아이훈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마저 러시아 영토로 내주었다. 이에 함풍제는 자포자기에 빠져서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몰두하다 중병에 걸려 18618월 열하의 행궁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죽었다.

 

함풍제를 이은 제10대 동치제(1861-1875)6세에 즉위해 어머니 서태후(1835-1908)가 중심이 된 3인 섭정체제에서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3인 섭정체제는 동태후와 서태후, 두 황후의 동시 수렴청정과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까지 세 사람이 동시에 국가를 이끌던 시기는 말한다. 3인 섭정체제는 무려 20년간이나 유지되었다. 이 시기를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부른다. 동치 원년에 청 정부는 태평천국운동을 마침내 수습했다. 황실재정이 복구되었고 훌륭한 인재들을 관직에 새로이 등용했다. 양무운동이라고 하는 개혁정책을 주도했다. 광공업, 해운, 조선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인 산업이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교육체제가 도입되고 해외유학생들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중국 최초의 근대식 함선이 도입되기도 했다. 동치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사절이 황제를 알현할 때 개두의식(간청의 표시로 이마를 3번 바닥에 대고 절하는 의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병약하고 정치에 무관심했던 동치제는 계속해서 서태후의 간섭을 받았다. 그는 친정을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지나서 사망했다. 사망의 원인은 천연두와 매독이라는 설이 있다. 동치제가 이렇게 일찍 죽은 것은 서태후의 야망 때문이다.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서태후는 어린 시절 매우 빈곤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까지 185116세에 궁녀가 되었다. 서태후는 욕심이 많고 진취적이었다. 미모가 뛰어나고 사람을 묘하게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다. 서태후는 함풍제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사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녀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았다.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 올랐다. 서태후는 더 큰 야망을 꿈꾸면서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함풍제는 그녀의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동치제는 생모인 서태후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는 눈엣가시였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쯤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였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에 드나들었다. 열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린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미 동치제는 아들 이전에 권력을 사이에 둔 라이벌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미래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1875년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자신의 4세 된 조카를 제11대 광서제(1875-1908)로 선정했다. 광서제는 함풍제의 동생과 서태후의 여동생 사이에 태어났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이다. 광서제 즉위 7년에 동태후가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동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권력은 서태후에게로 이동했다. 동태후가 사망하고 3년 후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그곳에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가 쫓겨나자 서태후는 공친왕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청나라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단결하여 놀라운 투지를 발휘해서 근대적인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전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서태후는 갑자기 이홍장에게 서둘러 종전 협상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이기고 있는 전쟁에서 굴욕적인 협상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이 민족적인 자긍심보다 우선이었던 것이다. 서태후가 동태후, 공친왕과 함께 권력을 나누고 있던 시절에는 최소한 황궁 내에서의 호사로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없을 정도로 권력자들이 모두 자숙했다. 그렇지만 서태후는 권력을 독점하고 나서 무너져 가는 제국의 경제에 부담이 될 정도로 호사를 즐겼다.

 

서태후는 1861년부터 해오던 섭정을 계속하였다. 서태후는 권력을 독점하고 나서 거금을 들여 자신의 거처인 저수궁을 신축했다. 또한 자신의 은퇴를 위해 광서제에게 명 왕조부터 조성되어 있던 황실의 휴양지인 서원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현재 북경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서원은 거대한 인공호수로 삼해(三海)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이 호수는 남해, 중해, 북해로 나누어져 있다. 삼해 주변에는 수많은 누각들이 건설되어 있다. 서태후는 이 삼해에 철로를 건설하고 그녀의 전용기차를 프랑스에 특별 주문해서 제작하기까지 했다. 또한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다. 서태후는 영록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도 한다.

서태후의 은퇴 이후를 대비한 건설공사에 당시 북양대신 이홍장이 혼신의 노력으로 확보한 북양함대에 투입된 비용의 네 배 이상을 지출했다고 한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결되고 10년 후에 서태후는 환갑을 맞이했다. 그녀의 환갑잔치를 위해서 2년 전부터 거국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이 해에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일본군이 대련항에 상륙해서 대대적인 민간인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 동안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3일 동안이나 계속된 연회였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894년에 발발한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한 서태후는 군비를 빼돌려 이화원에 거대한 호수를 파고 건물을 확장하는 등 전쟁 준비를 방해해 청나라의 패배를 이끌어 냈다. 그 결과 중국은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타이완과 요동 반도를 할양했다. 청나라는 군사력이 우위에 있음에도 일본에게 패하자 충격에 휩싸인 광서제는 정치 개혁을 통해 청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동시에 서태후에게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1898년 그는 강유위, 양계초 등을 등용하여 과거 제도를 개편하고, 조세 제도 등의 경제 제도를 개혁하며, 신문 보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변법자강 운동을 시행했다. 이를 무술변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를 이용해 서태후 세력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광서제를 배신하고 그의 계획을 서태후에게 밀고했다. 결국 서태후가 광서제를 삼해의 가운데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 영대(瀛臺)에 감금하고 정권을 잡음으로써 변법자강 운동은 10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서태후의 권력욕은 끝이 없었다. 비운의 황제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다.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 했다고 한다.

광서제가 죽자 그녀는 세 살 먹은 부의(溥儀)를 선통제로 세웠다. 부의는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과 서태후의 어릴 적부터 애인인 대학사 겸 군기대신인 영록의 딸 유란의 아들로 순친왕부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된 능력있는 계승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부의를 황제로 내정한 것은, 세 번째의 수렴청정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서태후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몇 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며칠 후에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향년 74세였다.

 

서태후

만약 인생의 목표가 의식주와 권력에 있다면 서태후는 중국역사상 측천무후와 비견되는 여인이다.

 

서태후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다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고 한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고, 특히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으며,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다. 비취 팔찌, 비취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서태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맛보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곳에 살면서 모든 사치를 다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을 받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고 최고의 목표라면, 서태후는 인간으로 태어나 최고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그러한 것들을 누렸다. 그녀가 권력을 잡고 있던 기간은 48년이었다. 권력을 독점했던 기간도 무려 28년이나 되었다.

 

새로운 황제 12대 선통제(1908-1912) 부의는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아들이다. 부의는 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아버지 순친왕 재풍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그러나 19111010, 손문(孫文)의 동맹회가 주도한 우창 봉기가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해혁명이다. 손문이 중화민국을 건립하고 1912212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위함으로써 267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 지배와 진시황 이후 이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군주 전제주의 제도가 종말을 고했다.

 

2. 줄거리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는 1908년 불과 3세의 나이에 서태후에 의해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3년 후인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조가 붕괴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되면서 중화민국정부에 의해 부의는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6살에 퇴위하게 된다. 즉 자금성 안에서만 황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부의는 밖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이 여전히 황제인 줄만 알고 성장하게 된다.

 

14세 되던 해 영국인 가정교사 레지널드 존스턴이 자금성으로 들어온다. 존스턴은 부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생활방식도 서양식으로 바꾸게 된다. 그로 인해 세상물정을 배워간다.

부의는 17세의 동갑내기 완용을 황후로, 12세의 문수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자금성 밖의 중국은 격변을 격지만 자금성 안은 평온하게 지낸다. 그러나 1924년에 일어난 군벌 중의 한 사람인 평위샹의 군사혁명으로 푸이는 궁궐에서 쫓겨난다. 일본대사관을 방문한 사부 존스턴은 감백 대위를 만나 도움을 청한다. 푸이는 두 아내와 함께 일본조계지가 있는 텐진으로 도피한다. 얼마 뒤 신 사조에 눈을 뜬 측실 문수가 자유를 찾아 떠나게 됨에 따라 푸의와 이혼하게 된다.

 

한편 사부 존스턴도 영국으로 돌아가고, 대신 푸이의 보좌로 일본군 특무대원이 접근하여 온다. 푸이는 마침내 일본군의 획책에 넘어가 신생 만주국의 황제가 된다.

 

황후는 아편에 중독되어 운전수와 눈이 맞아 아이를 낳게 되지만 푸이가 죽인다. 푸의는 일본을 방문하고 나서 만주국이 그냥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고립된 만주국에서 일본군은 부의를 비행기로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요양하고 돌아온 황후에게 부의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한 사이에 소련군에게 체포된다.

 

푸이는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소련의 전범수용소로 송치된다. 1950년 공산당에 의해 중국에 송환되고 중국 공산당들은 부의를 전쟁포로로 체포하고 심문했다. 부의는 10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1959년 특사로 풀려나와 정원사로 일하게 된다. 어느 날 푸이는 입장권을 사서 자기 집이었던 자금성에 들어간다. 푸이는 자금성을 둘러보다가 옛 기억을 되살리며 옥좌 위에 앉아 보는데, 이때 경비원의 어린 아들이 달려와 올라가면 안 된다며 뛰쳐온다. 여기가 자신의 집이었다고 말하자, 경비원의 아들은 푸이에게 사실을 증명해 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푸이는 태화전 옥좌 뒤에 간직했던 여치통을 경비원의 아들에게 전해 주고 종적을 감춘다. 아이가 여치통을 보는 사이, 푸이는 "나는 중국의 황제였단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어느 순간 그곳에 없었다.

 

그 이후 자금성은 관광지가 되어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가이드가 "이곳은 중국의 황제가 즉위했던 태화전입니다. 마지막으로 즉위한 황제는 애신각라 부의입니다. 3살에 즉위했으며 1967년에 사망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시기가 1967년인 걸 감안하면 이 장면은 푸이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장면일 것이다.

 

3. 감상

마지막 황제를 처음 본 것은 30대 중반 때인 88올림픽이 개최된 해였다. 그리고 거의 33년이 흐른 지금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사이, 중문과도 졸업하고, 중국도 여러 차례 다녀와서 이젠 중국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도 다시 보니 청나라의 마지막 역사가 너무 안타깝고 인간의 운명 역시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고 느껴졌다. 부의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서태후에 의해 결정된 황제자리였다. 진시황부터 이어져온 중국의 황제는 중국의 상징이다. 거대한 중국을 지배하는 황제였던 한 남자가 역사의 흐름 앞에서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중국에서의 부의가 그랬다면 그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왕조가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이에 더 공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떠받들여져 자금성 안에서 모든 것을 누렸던 부의가 몇십 년이 지나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과 같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 장면은 시대가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굴곡지게 변화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

 

특히 감옥에서 예전 시종이었던 자가 마지막이라고 울먹이면서 부의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구두끈을 묶어주는 장면은 구두끈 묶는 법조차 몰랐던 부의가 이젠 황제가 아니라 완전히 평민이 되었다는 것을 부의가 깨닫게 해 준다. 그런 굴욕을 겪으면서도 그는 살아남아 말년에는 평범하게 정원사가 된다. 이 영화는 부의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의 내면세계, 그의 고통과 갈등, 수치, 치욕 등을 그리지 않는다. 아주 담담하게 그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간 것처럼 영화는 흘러간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몰입을 방해한 것은 출연배우들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배경은 중국 자금성이고, 중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중국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쓰는 언어가 영어이다보니 어색하고 엉뚱하게 느껴졌다. 영화가 중국어로 제작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 결론

영화 마지막황제는 푸의의 자서전인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 From Emperor to Citizen)’을 모태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청조 마지막 시기부터 1960년대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 정부의 배려 덕에 자금성에서 올 로케로 제작되어 현장감을 살려낼 수 있었다. 자금성 경내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황제에서 시민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대비되어 전개된다. 색채감각이 풍부한 베르톨루치의 영상미는 압권이었는데, 특히 장엄하고 화려한 즉위식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장면이 되었다.

푸이는 서태후가 동치제와 광서제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태어난 지 210개월 만에 청나라 12대 황제 선통제로 즉위하였다. 그의 인생은 거의 감옥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세 살에 황실로 들어가 자금성에 갇혀 있다가, 일본 영사관으로 도피했고, 거기서도 연금상태나 다름없었다. 만주에 가서도 일본 관동군에 포위되었고, 그후 러시아와 중국공산당에 의해 감옥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일본에게는 천황을 찬양하고, 러시아에선 공산주의를 미화하고, 중공에게는 마오쩌둥을 숭배했다.

1966년 중국에 문화대혁명의 붉은 바람이 불 무렵, 푸이는 암에 걸린다. 홍위병들은 청조 마지막 황제인 그를 공격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는 진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671017일 베이징에서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유장한 역사의 변천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은 흘러가는 모습의 과정은 다를지언정 죽음이라는 그 결과는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