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과목 중 '제3세계의 역사와 문화'의 중간고사 과제이다.
<과제명>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에메 세제르, 프랑수아즈 베르제 지음, 변광배 옮김, 출판 그린비, 2016)을 읽고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정리하시오.
Ⅰ. 서 론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는 에메 세제르와 런던 대학 정치학 교수인 프랑수아즈 베르제의 대담집이다. 베르제가 대담을 기획한 이유는 세제르가 현재 프랑스에서 거의 잊힌 존재일 뿐 아니라 보수적인 인사로 오해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고 세제르 사유의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두 사람은 세제르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의 정치 활동, 식민지 해방운동과 탈식민 이후에 관한 생각 등에 이르는 광범한 주제를 압축적으로 논의한다.
에메 세제르는 프랑스 식민지 해방 운동에 앞장선 인물로 ‘네그리튀드의 아버지’라 불린다. 세제르는 1913년 카리브 해의 조그만 섬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2008년에 9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에메 세제르와 프랑수아즈 베르즈의 대담은 2004년 7월에 마르티니크 포르드프랑스의 시장실에서 이루어졌다. 세제르는 56년 동안 시장직을 수행했다. 이미 그의 나이가 92세일 때이다.
세제르는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낸 뒤 프랑스로 유학 갔다. 당시 최고 교육 기관 중 하나인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세제르가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그가 고향인 마르티니크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유럽인을 모방하는 데 몰두하는 마르티니크의 유색인 프티부르주아들의 속물근성에 진저리를 쳤다. 프랑스 파리에서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전 고등사범학교 준비 1학년 반에서 준비 2학년 반에 있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이후 세네갈 대통령) 등과 친한 친구가 되어 아프리카, 식민주의, 문명에 대해 끝없이 토론과 질문을 주고받으며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키워 나갔다.
Ⅱ. 본 론
1.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아주 옷을 잘 입고, 아주 속물근성에 젖어 있던 한 젊은 사람이 내게 와서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세제르씨, 난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이 한 행동을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비난합니다. 왜 당신은 자꾸 아프리카를 입에 담습니까? 우리는 그들과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들은 원시인이고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하지만 그 젊은 사람은 피부색이 나보다도 더 ‘밤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작자는 상당할 정도로 인종적 위계질서에 빠져 있었던 것이죠. 내가 보기에 동화는 소외이고, 이는 가장 중차대한 것입니다. p29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티니크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마르티니크는 1502년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1635년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세인트키츠섬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마르티니크에 상륙하면서 마르티니크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된다. 1658년에 마르티니크의 원주민들이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원주민들은 학살당했다.
마르티니크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에 의해 사탕수수 농업을 통해 발전했다. 마르티니크는 생도맹그(현재의 아이티), 과들루프와 함께 프랑스의 대서양 삼각 무역의 거점이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 프랑스와 영국 간의 쟁탈전이 치열하게 일어난 곳이다. 또한 마르티니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의 아내인 조세핀 드 보아르네 황후의 고향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 중이던 1793년에 마르티니크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1804년에 아이티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하면서 나폴레옹은 마르티니크에서 노예 제도를 부활했다. 다음 인용문을 보면 이곳 사람들이 노예제도 부활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 수 있다.
“부두로 뻗어 있는 큰 사바나 광장에 가면 목 부분이 잘리고 붉은색 페인트로 뒤덮인 조세핀 드 보아르네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조세핀은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1802년에 노예제도를 제정하게끔 한 여자로 남아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잘려 나간 그녀의 목 부분을 수리하려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목 부분이 다시 잘려나가기 때문이다.” p 9
1815년에는 마르티니크가 프랑스의 영토로 확정되었고 1848년에는 마르티니크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1902년에는 펠레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피에르시에서 28,000명이 사망했다. 카리브해의 파리로 불렸던 이 도시는 몇 분 만에 유령의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마르티니크 주도 역할을 포르드프랑스에 양보하게 되었다. 1946년에는 프랑스의 해외 현이 되었다. 주민은 아프리카계 흑인과 백인(주로 프랑스인)이다. 프랑스 해외 주 가운데 가장 작다. 남북길이 약 80km이며 동서 최대너비가 약 35km 정도이다. 해안에는 산호초가 있으며, 관광지로서도 중요하다.
이처럼 마르티니크는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 노예들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다. 그래서 피부색에 의해 모든 서열이 결정되는 계층사회였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프랑스의 해외 현으로 결정됨에 따라 프랑스의 동화정책에 의해 이곳에 사는 흑인들은 비록 피부는 검으나 아프리카 흑인과는 완전히 다른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레노폴, 알겠는가? 세상은 그대로일세, 자네는 옷을 입고, 양복을 입고, 살롱에 가곤하지. ‘부인, 인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흑인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엔 흑인이 없네. 하지만 흑인은 자네 안에 있네. 마음속 더 깊이 패인 곳에 말일세. 자네는 자네 안 더 깊은 곳에서 그걸 발견할 걸세. 문명의 모든 층위 너머에 있는 ‘근본적인’ 흑인을 말일세. 알겠는가? 근본적인 걸세” 정확히 이것이 내가 문학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흑인이었으니까요. 우리 내부에 있는 흑인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였던 겁니다. 우리는 원주민 문학, 민중설화 등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이론, 우리의 은밀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이 생각에는 아프리카의 특수성이라는 생각과 흑인의 고유성이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었죠. 하지만 상고르와 나는 흑인 인종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어요. 나는 나 나름대로의 인격을 갖게 되었고, 해서 백인을 존중했습니다. 물론 상호 존중이어야 하겠지만요. 이와 같은 자기의식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유럽문명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이론을 정립하게 되었지요. 유럽에 동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우선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p28-29
위의 내용은 이 책의 핵심이다. 프랑스는 식민지 통치를 영국과 달리 직접 식민통치를 했다. 영국은 식민지역의 추장이나 족장에게 고유 권한을 부여하고 부족민을 직접 다스리게 했지만 프랑스는 소위 문명화 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정파를 초월하여 프랑스 식민지배의 근간을 이룬다. 문명화정책이란 아프리카의 독립이 아니라 서구문명의 선두자라는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 문화를 통해 프랑스 제도권에 묶어두는 것이다. 즉 자치를 허용하지 않는 대신 프랑스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행사하게 하여 식민지인들을 프랑스식으로 개화시키는 동화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동화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네그리틔드다.
2. 네그리틔드
에메 세제르는 ‘네그리튀드의 아버지’라 불린다. 네그리튀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아프리카의 문화적 유산이며 가치라고 정의한다. 네그리튀드(Negritude·검둥이라는 뜻의 negre와 상태·성질이란 뜻의 itude의 합성어)는 아프리카 흑인문명의 유산·정신을 일깨우고 흑인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다. 그 주도적 인물은 1960년 세네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와 에메 세제르다.
이들은 프랑스의 동화정책이 이론적으로는 인간평등의 신념에 근거를 두지만 아프리카 문화보다 유럽 문명이 우월하며 심지어 아프리카에는 역사와 문화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주장하며 여기에 반박했다. 세계대전에서 동포들이 자신들과 상관없는 명분을 위해 죽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종처럼 취급받는 것을 보고 분노했으며, 역사연구를 통해 흑인들이 처음에는 노예제도로, 다음에는 식민통치로 고통과 굴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견해가 네그리튀드의 여러 기본사상을 형성하게 해준 요인이 되었다. 즉 자연과의 친근함 및 조상과의 부단한 접촉으로 비롯되는 아프리카인 삶의 신비로움과 포근함은 서구문화의 영혼부재, 물질주의에 맞서 올바른 자리를 찾아야 하며, 아프리카인들은 현대사회에서 어떤 가치와 전통이 가장 유익한가를 선택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풍요로운 과거와 문화유산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사상이다.
Ⅲ 결론
인류학자 커틴(Curtin)에 의하면, 18세기 말까지 1,1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무역을 통해 대서양 너머로 팔려갔다고 추정하고 이것은 공식적인 통계가 되었다. 그러나 페이지(Fage)는 아프리카 노예 1명이 신대륙에 도착하기까지 약 5명의 아프리카인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한다. 노예무역으로 희생된 아프리카인은 5,000만 명이나 된다.
이러한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인륜에 반하는 범죄’로 선언한 것은 2001년 5월에 프랑스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노예무역선이 대서양을 건너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착한 해는 1530년이다. 무려 470년 만에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인륜에 반하는 범죄로 인정한 것이다. 그 후로 몇몇 단체는 배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세제르는 금전적 배상은 배상금을 주고 나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금전적인 배상이 아니라 도덕적 배상 즉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도덕적 감정에 입각한 배상을 주장한다. 이는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우리나라의 문제 해결에도 참고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세제르의 말년의 가치관을 알아볼 수 있는 인상적인 대목은 “필요한 것은 동화와 독립이 아닙니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자주입니다. 다시 말해 마르티니크 섬 고유의 특수성, 고유의 제도, 고유한 이상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에 속하면서 말입니다.”
이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마르티니크의 자주와 고유한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한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생각은 민족, 국가, 인종, 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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