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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스페인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이해

by 황교장 2023. 1. 20.

2022학년도 졸업논문

문화교양학과

논제 : 스페인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이해

부제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알함브라 궁전을 중심으로

. 서론

20227월 스페인의 대표적인 여행지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알함브라 궁전을 탐방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기독교 문화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고,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문화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세계 양대 종교로 전 세계에서 기독교를 믿는 인구는 21억 명이 넘고, 이슬람교를 믿는 인구는 18억 명이 넘는다.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며, 다양한 인간의 삶을 고찰하는 것이다. 종교를 모르면 종교적 문맹이라고 할 만큼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라고 한 것처럼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 지성인의 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 양대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은 동서양의 다양한 인간의 삶과 문화를 바르게 알게 하여 우리의 삶과 문화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들어서면 대부분 그 규모와 기교가 인간의 세계가 아닌 천상의 세계를 구현한 것 같아 압도당한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압도감은 이곳이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기둥은 나무줄기나 그루터기와 같고, 지붕은 산등성이와 산비탈이 있는 산과 같으며, 둥근 천장은 포물선 모양의 동굴이고, 튼튼한 테라스는 산의 절벽 모양이다.”라고 주장했다. 건축에 대한 가우디의 철학이 이곳,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실현된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정원에는 124개의 대리석 기둥이 줄지어 서 있고 중앙에 12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분수와 바닥에 반사된 햇빛이 다시 천장을 밝혀 은은한 분위기와 방을 장식하는 아치 문양, 연속적인 반원 무늬 등 기하학적인 무늬와 그 패턴의 반복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구현되어 있다.

이들은 세계문화유산이다. 세계문화유산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 유산 및 문화유산들을 발굴 및 보호, 보존하기 위하여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의 규정에 따라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유산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이질적인 두 문화유산을 탄생시킨 스페인의 역사와 스페인만의 독특한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교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스페인의 역사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기본이 된 스페인 기독교의 역사와 알함브라 궁전의 기초가 된 이슬람교의 역사를 알아보고, 스페인에서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고찰함으로써 스페인의 대표적인 세계 문화유산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바른 이해의 바탕을 마련하고자 한다.

 

. 본론.

1. 스페인의 역사

스페인은 구석기 시대의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발견된 곳이다. 대략 기원전 만 오천 년 이전부터 스페인에는 인류가 살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북쪽에서 건너온 이베리아인이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이베리아반도라고 한다.  그 뒤 유럽 중앙부에 살던 켈트족이 기원전 600년경에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와 원주민 이베로족과 피가 섞이면서 켈티베로족이 나타났다. 그러나 켈티베르족과 켈트족은 뒤늦게 흘러온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에 쫓겨 이베리아 반도의 서북쪽인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지방 언어인 갈리시아어는 스페인 언어와는 전혀 다른 포르투갈어와 가깝고 켈트족의 후예가 모여 사는 프랑스의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쪽과 공통점이 많다.

켈트족이 육지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로 옮겨 왔다면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종족은 페니키아인이다. 기원전 1,000년경에 페니키아인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살았는데 지브롤터 옆에 있는 카디스를 건설해서 무역의 거점을 마련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올리브와 포도나무, 향수와 보석, 철 등을 이때 전해 주었다. 카디스는 지금 스페인 최대의 군항이다. 이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8세기경에 그리스인도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지중해 문명권이 형성되었다.

뒤늦게 지중해로 뻗어 나가려는 로마군은 BC 209년에 이베리아반도를 공격해 카르타고의 세력을 물리쳤다. 이 지역은 로마의 속주 히스파니아가 되어 스페인의 어원이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로마인들이 히스파니아로 많이 이주했다. 로마인들과 혼혈된 켈트족과 이베리아인들은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은 대개 다음 족속들의 피가 골고루 섞여 있다.

이베리아 켈트족, 바스크인(이베리아인), 라틴족(로마인), 게르만족(바이킹 및 서고트족), 유대인(현대의 스페인인 유전자 분석 결과에도 유대계 조상을 둔 인구가 약 20%로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 조상을 둔 경우가 11%로 나온 것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았다), 아랍인/무어인, 베르베르인, 페니키아인 등이다.”

스페인은 기원전 38년에 정식으로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스페인의 많은 사람들이 로마 시민 자격을 얻었다. 로마 통치체제가 안정돼 번영을 누린 시기를 뜻하는 팍스로마나시기에 스페인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400년경까지 도시 곳곳에 도로와 수로, 원형경기장 등이 들어섰다. 스페인 사람들은 속주 출신이라는 차별대우도 받지 않았다. 로마의 저명한 철학자요, 정치가이자 웅변가였던 세네카(BC4-AD65)가 스페인 출신이다. 여기에 더해 오현제(五賢帝) 2명인 트라야누스 황제(재위 98-117)와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가 에스파냐 남부 바이티카 이탈리카에서 출생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347-395)도 지금의 스페인 코카(Coca)에서 태어났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확립했지만(395), 바로 그해에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 곧 비잔틴제국으로 분리되었다.” 372년 볼가강을 건너 훈족의 침입이 시작되자 이를 피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되었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으로 내려왔다가 같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에게 쫓겨 스페인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서고트족은 415년에 이베리아반도에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서고트 왕국에서는 점차 가톨릭의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이들은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침입한 아랍과 무어인에 패해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이슬람은 10세기에 전성기를 맞는데 수학, 과학, 건축, 장식 예술 등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기독교인 에스파냐인들은 이슬람이 지배를 시작한 무렵부터 이미 북쪽을 중심으로 국토 회복 운동(레콩키스타)을 벌였다. 이 운동이 점차 세력을 넓혀 남쪽으로 내려왔고 그 과정에서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카탈루냐 등의 기독교 왕국이 탄생한다. 이들은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조금씩 이슬람으로부터 땅을 빼앗았는데 13세기가 되면 코르도바와 세비야까지 되찾았다. 코르도바를 뺏긴 이슬람의 중심지는 이때 그라나다로 옮겨졌다.

1469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면서 기독교를 통합했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가톨릭 부부왕은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를 1492년에 정복해 국토 회복 운동을 완성했다. 스페인의 역사에서 1492년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어 레콘키스타가 끝난 해이면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연합하여 스페인 왕국이 세워진 해이기도 하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첫 항해를 한 해이기도 하다.

스페인 왕국은 레콩키스타가 마무리되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한 무슬림과 유대인을 추방하는 종교 재판을 시작하였다. 한편,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은 여기서 나온 막대한 재화를 이용하여 16세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150년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이자 가장 넓은 해외 영토를 갖는 세계제국이 되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캘리포니아에서 파타고니아에 이르렀다. 이 시기 스페인에서는 회화, 건축과 같은 문화가 발전하고, 문학과 철학이 융성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잉글랜드, 스웨덴 등과 전쟁을 벌이고 유럽 각국 정치에 간섭을 벌이는 등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17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의 경제 사정은 잦은 전쟁으로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 국가 가운데 모스크바를 제외하고 가장 넓은 영토를 갖고 있는 강력한 국가였다. 18세기에 들어 부르봉 왕가가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하는 등 개혁을 실행하였다.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신생 미국의 편에 서서 영국을 견제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뒤이어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군대에 대패하고 만다.

19세기 스페인은 멕시코 독립 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들이 독립하기 시작하였고, 스페인-미국 전쟁에서도 패하여 쿠바와 필리핀을 미국에 할양하였다. 국내에서도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의 갈등으로 결국 19세기 말 스페인 제1공화국이 세워져 왕정이 폐지되었으나 곧바로 군부쿠데타와 왕정복고가 연달아 일어나 심각한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인민 전선의 승리로 수립된 스페인 제2공화국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패하였고, 1939년 프랑코 정권이 수립되어 이후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까지 36년간 군부 독재가 지속되었다.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집권하자 입헌군주제를 표방하고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스페인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독재정권이 물러난 후 스페인은 고도의 경제 성장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하였다. 1992년 하계 올림픽이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2. 스페인의 기독교 역사

스페인에서 기독교는 매우 이른 시기인 서기 64년경에 사도 바울에 의해 전파되었다. 스페인에 다녀갔던 성자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아그리파 1세의 박해로 순교했다. 아그리파 1세는 유대의 통치자(재위:37-44), 신약성경 사도행전에서 헤로데 왕으로 언급되는 사람이다. 야고보의 제자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수습해서 스페인으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시신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800년 뒤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간의 전쟁 중에 기독교도가 갈리시아 벌판을 비추는 별빛을 보았다. “별빛이 비춘 곳은 바로 성 야고보가 묻힌 자리였다. 이곳을 별이 비추는 들판이라는 뜻인 캄푸스 스텔라에라고 불렀는데,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다.그 자리에 세워진 대성당은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기독교의 3대 순례지가 되었다.

기독교는 인간 중심적인 헬레니즘 문화와 유일신 사상의 유대 종교인 헤브라이즘이 결합해 만들어진 종교다. 세계제국이 된 로마는 과거의 그리스, 로마의 종교로는 더 이상 대제국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로마제국 내의 모든 민족이 믿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린,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전체제국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다.

초기에 로마제국 안에 다섯 개의 교구가 설치되었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다. 313년 그리스도가 공인되면서 제국의 수도인 로마교구가 기독교의 총본산이 되었다. 하지만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기독교의 중심은 로마교구에서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교구로 옮겨졌다. 교회의 수장이 새 수도로 옮겨가 로마교구의 최고 지도자 자리가 비게 되자 황제를 대신해 교회를 이끌 교황을 선출하여 동로마제국의 교황(황제)과 서로마 교황 즉 두 사람의 교황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로마교황과 동로마제국의 황제 사이에 갈등이 수백 년 지속되다가 11세기 초 로마교구가 동로마제국의 그리스도권에서 탈퇴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동, 서로 분열된다.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로 나뉘었다. 정확히 말하면 동방정교에서 로마교구가 분리 독립해 로마가톨릭이 되었다.

 동방정교는 동로마제국 전역에 널리 퍼져 발전했으나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어 동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러시아가 그 정통성을 인수해 러시아 정교가 동방정교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제외한 옛 동로마제국의 영토는 거의 모두 이슬람에 정복되어 이슬람 통치 아래 교구 간, 지역 간의 교류가 어려워 로마가톨릭처럼 세계를 하나로 묶지 못하고 그리스 정교, 루마니아 정교, 불가리아 정교 등 지역별로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

로마가톨릭의 교황은 왕 위에 군림하는 절대 권력자가 되어 유럽을 지배했고 꾸준한 포교 활동으로 10-11세기에 이르러 전 서유럽, 북유럽이 기독교, 즉 로마가톨릭교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거머쥔 교황과 교회 세력은 차츰 부패하고 오만해져 점차 강력해지는 세속 왕들과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는 교황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모순은 결국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더해 영국의 성공회가 따로 독립해 나왔다. 이유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헨리 8세가 시녀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왕비 캐서린과 이혼을 요청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거부했다. 이를 빌미로 헨리 8세는 성공회를 세웠다.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교회가 되었다.

로마가톨릭, 루터교, 영국성공회는 교리상 큰 차이가 없는 농경 시대적 종교였다. 이는 새롭게 성장하는 상인, 공장주, 지식인 등 중산층 부르주아계급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맞춰 나타난 것이 장 칼뱅(1509-1564)이 주도한 청교도 운동이다이처럼 기독교는 스스로 변화하면서 유럽인들의 정신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자 가장 시급한 것은 새로운 국교인 그리스도의 교리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근교에 있는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열었다. 이를 제1차 공의회라고도 한다. 교리 확정을 위한 전체 성직자 회의가 무제한 난상토론을 한 결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바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내려오신 하느님 아버지, 바로 그분이시며, 이 지구상에 내려진 하늘의 성스러운 영혼, 즉 성령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세 가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합쳐지는 삼위일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받아들여 기독교의 첫 통일 교회인 가톨릭교회가 출발하였다. 이 이론의 가장 핵심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격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인격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의 신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신이라는 신격과 인간의 모습을 지닌 인격을 동시에 가지는 있는 그리스, 로마 정신인 헬레니즘의 계승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로 시작되었지만 헬레니즘문화와 융합되어 세계 종교로 발전하였다. 기독교의 기본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 나사렛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예수로 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구체적인 신학을 구축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느님의 영인 성령에 의해 마리아에 잉태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목수 요셉의 양아들로 성장하였다. 예수는 갈릴리 지역에서 성장하는 동안인 12세에 율법학자들과 토론하는 등 총명함을 보여 주지만, 복음서에는 30세까지의 성장기에 대해서는 찾을 수 없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고 하늘에서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전해진다.

예수가 처음으로 전한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예수의 목회는 3년간 이루어졌다. 12명의 제자를 거느리며 파격적인 가르침을 전하였다. 예수의 열두 제자는 구약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천국의 복음을 외치며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이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운동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받는다. 그 후 3일 만에 부활한 예수는 세계에 선교하라는 유언을 하고 승천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형성되었다. 오순절에 성령이 내려오는 사건을 통해 강력한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 부활한 예수의 음성을 듣고 눈이 머는 경험을 한 바울에 의해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13권의 서신이 기록되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총 66권이 되었다.

기독교의 공통된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인은 한 분 하느님을 예배한다. 둘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다. 셋째, 성도들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동행한다고 믿는다. 넷째, 성도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이룬다. 다섯째, 경전인 성경을 읽으며 떡, 포도주, 물의 상징과 관련된 성례를 반복해서 거행한다 등이다.

 

3. 스페인의 이슬람교 역사

702년에 서고트 왕국은 위티사가 왕위에 올랐다. 그때까지 서고트 왕국의 왕은 선거로 뽑았다. 그런데 위티사왕은 귀족들과 의논도 없이 국왕 선거제도를 폐지하고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 세습제로 바꾸어 아들 아길라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710년 위티사왕이 죽자 권력의 암투가 벌어졌다. 귀족들은 전통 방식대로 로드리고 공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아길라왕로드리고왕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길라왕의 세력이 약했다. 이에 아길라왕은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무어인 영주 무사 빈누사이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길라왕의 도움을 요청받은 무어인 영주 무사 빈누사이르711년 부하 장수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장군에게 만 이천 명의 이슬람 군대를 주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로드리고왕의 군대를 물리치게 하였다. 또한 도움을 요청한 아길라 왕의 군대까지도 물리쳤다. 결국 서고트 왕국은 내부 분열로 멸망하고 말았다.

이슬람 군대는 불과 7년 만에 북서 산악지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이슬람군은 기세를 이어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732년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에 의해 격퇴됨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북진이 저지되어, 피레네산맥이 유럽과 이슬람 세력의 경계가 되었다.

750년경 옴미아드 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왕자가 다마스쿠스에서 이곳에 도망쳐 왔다. 다마스쿠스에는 정변이 일어나 옴미아드 왕가에서 아바스 왕가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옴미아드 왕가의 정통성이 인정되어 아브드 알라흐만 왕자는 756년에 알안달루스 왕국을 세우고 알라흐만 1세라고 칭했다.

이들이 믿고 있는 이슬람교에 대해 알아보자.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 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 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교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인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기독교 등의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슬람교의 핵심 교리는 유대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사상이지만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삼위일체의 부정이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 다섯 번 성지인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데 반드시 다음과 같은 구절로 기도를 시작하고 끝을 낸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

이 구절이야말로 이슬람 핵심 교리의 압축으로 모든 기도의 시작과 끝이 될 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는 것은 예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 무함마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고로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뜻이다. 이슬람의 핵심은 예수의 신격을 부정하는 데 있다.  “기독교에서는 자신들 종교의 생명인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이슬람교를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결국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불구대천지원수가 되어 1,400년 동안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인데,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인데, 마음으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인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5주 등)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무함마드(570-632)는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25세에 15살 연상인 부호의 미망인 하디자와 혼인하여 한때 시리아 등지에서 대상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아라비아반도 주민들은 종교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자연신과 신령을 믿는 복합적인 신앙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급속한 상업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부작용과 갈등적 요소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존의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사색과 명상을 계속하던 그는 40세 되던 610년 경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 마지막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띠고 포교에 나섰다. 이때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 꾸란이다. 그러나 보수적 전통이 강한 메카 지도층 코레시아족의 탄압으로 포교에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6229월 메카 북방 400지점의 메디나로 옮겨갔다. 이 메디나행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부르고 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이주한 무하자룬(교도)과 그 지역 협력자들을 모아 최초의 움마(교단)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를 강화하여 나중에 이슬람국가로 발전시켰다.

그는 6326월 메디나에서 죽었다. “그에게는 10명의 아내와 2명의 첩이 있었지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4대 정통 칼리프(caliph)가 계승한 순수 인간 통치 시대가 전개된다. 1대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부 바크르이다. 아부 바크르는 아내를 잃은 무함마드에게 자신의 딸 아이사를 아내로 보냈는데 뒷날 아이사가 전해준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하디스가 쿠란과 더불어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칼리프 2년만인 634년에 숨을 거두면서 우마르를 2대 칼리프로 지명했다.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또 다른 친구로 우마르의 딸도 무함마드의 아내이다. 우마르는 642년에 사산조페르시아제국을 점령하고 이집트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우마르는 644년 기독교도인 페르시아계 노예의 손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어 3대 칼리프에 우스만(577-656)이 추대되었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친구로 무함마드는 작은딸을 우스만의 아내로 보냈다. 우스만은 부유한 상인출신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영토를 확장하고 이슬람교리를 체계화했지만 자신의 가문인 옴미아드가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다른 가문들의 불만을 샀다. 우스만은 결국 불만을 품은 타민족 폭도들에게 암살을 당한다.

이어 알리가 제4대 칼리프에 추대되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무함마드의 큰딸 파티마의 남편이다. 알리는 청빈한 성격에 높은 도덕성을 지닌 인물이지만 20여 년간 칼리프 자리에 오르지 못해 불만에 차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우스만 암살의 배후에 알리가 있을 거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이슬람교가 분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혈통과 정통성을 지닌 알리가 칼리프가 돼야 한다는 무리와 알리가 아니더라도 무함마드의 언행을 따르는 훌륭한 인물이면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무리로 갈라졌다. 엄격하고 극단적인 알리 지지파를 시아파라고 하고, 보편성을 중시하는 무리를 수니파라고 한다.

이에 우스만의 옴미아드가는 알리 응징을 선언하여 알리를 지지하던 시아파와 옴미아드가의 지도자인 무아위야가 이끄는 수니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알리는 칼리프 자리에 오른 지 5년만인 661년 무아위야가 보낸 자객의 손에 암살되고 말았다. 무함마드를 통해 신의 계시를 직접 듣고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네 명의 후계자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라고 한다. 알리를 처단하고 제5대 칼리프에 오른 무아위야는 무야위야 1(602-680)로 등극하면서 옴미아드 왕조(661-750)를 열었다. 옴미아드 왕조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다스리는 대제국이 되었다.

무아위야는 68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 야지드를 제6대 칼리프로 지명했다. 이는 선거로 칼리프를 뽑던 전통을 무시한 것이다. 이에 시아파는 야지드의 칼리프 계승을 전면 거부하고 알리의 차남이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인 후세인을 칼리프로 추대했다. 이에 야지드가 시아파를 습격하여 후세인의 눈앞에서 그의 형제, 조카 등 혈족을 모조리 죽여버리자 충격을 받은 후세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로써 칼리프는 선거로 뽑는 제도에서 세습제로 바뀌게 되었다.

옴미아드 왕조는 711년 베르베르인 장군 타리크가 에스파냐 원정으로 유럽까지 진출하여 713년 북부 갈리시아지방을 제외한 에스파냐 전체를 정복했다. 718년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진격해 나르본을 공격하고 725년에는 리옹을 점령해 유럽 전체가 정복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732년 카를 마르텔이 푸아티에에서 이슬람군을 저지하였다. 기세가 꺾인 옴미아드 왕조는 749년 이란 북동쪽 호리산에서 일어난 아바스 가문의 아부 알아바스가 옴미아드 왕조를 무너뜨렸다. 아바스 가문의 지도자인 아부 알아바스는 무함마드 백부 아바스의 자손이라고 지칭하면서 옴미아드가는 알리를 암살하고 칼리프를 도둑질한 무아위야의 씨앗들이라면서 옴미아드 일족을 모조리 색출해 살해했다. 그런데 옴미아드 가문에서 단 한 명의 왕자가 생명을 건져 에스파냐로 도망을 쳤는데 바로 아브드 알라흐만이다. 에스파냐의 무슬림들은 옴미아드 왕조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아브드 알라흐만의 정통성을 인정해 자신들의 지배자로 받아들였다. 아브드 알라흐만 왕자는 756년에 알안달루스 왕국을 세운 알라흐만 1(731-788)로 코르도바에 도읍을 정했다. 그 이후 10세기경에는 스스로 칼리파트로 승격하여 무함마드의 뒤를 잇는 정통 후계자인 칼리프가 되었다. 10세기에는 인구 50만 명으로 콘스탄티노플과 더불어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4. 스페인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722년 코바동가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독교 세력은 300년 가까이 이슬람의 세력에 눌려 북서부 지방에서 미미하지만 저항을 계속했다. 그들은 자신의 본거지인 아스투리아스 지방과 이슬람 세력의 경계 지대에 수많은 작은 성을 쌓아 아랍인의 침략을 막아왔다. 아직도 수천 개의 성채가 대부분 이 지역에 몰려 있는 이유다. 이들 대부분이 아스투리아스인이다.

아스투리아스 지역은 최후까지 이슬람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은 순수한 기독교 청정 지역이라 그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아스투리아스인은 서고트족의 혈통과 전통을 이어받았고 무어인의 침략으로부터 스페인과 그리스도를 지켜야 하는 신성한 의무를 수행한 스페인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도 왕세자 시절에 아스투리아스 왕세자라고 불렸다.

지금까지도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크게 분류하면 게르만족보다는 라틴족이다. 그런데도 서고트족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서고트족이 이슬람에 저항하여 가톨릭을 수호한 데 있다고 생각된다.

아스투리아스는 레콩키스타의 시발점이자 총본부였다. 그런데 아스투리아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아스투리아스 지역이 험악하고 황량한 지형으로 이슬람 입장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땅이라 점령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데 성공한 아스투리아스 왕국, 나바라 왕국과 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1세가 수복한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중심으로 국토회복운동이 시작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현재 스페인 서북부의 레온 왕국, 북중부의 카스티야 왕국, 포르투갈 왕국으로 나누어졌다. 바르셀로나는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변해 새로운 국가들이 국토 수복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레콩키스타를 좀 더 쉽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코르도바(알안달루스)왕국 때문이다.

코르도바 왕국의 하샴 2세의 재상이었던 알만수르(재임 977-1002)는 오늘날의 코임브라를 불살라 7년간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로 만들고, 985년에는 바르셀로나를 몽땅 태워버렸다. 무르고스, 레온까지 침략해 주민을 모조리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기독교의 성지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을 파괴하고 대성당의 쇠문과 종을 가톨릭교도 포로에게 짊어지게 하여 코르도바까지 옮겨 이슬람 사원의 촛대와 천장을 만드는 등 수모를 주었다. 그러나 1002년 알만수르의 죽음과 함께 가톨릭교도들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어 결국 1031년에 코르도바 왕국이 멸망했다.

코르도바 왕국이 무너지면서 이슬람은 여러 개의 작은 이슬람 왕국으로 쪼개지는 타이파 시대가 열렸다. 이슬람 왕국들은 지역에 따라 성격과 지배 계층이 서로 달랐다. 세비아, 사라고사, 톨레도 같은 곳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도인 물리다가 지배했고, 그라나다는 베르베르인이 지배했는가 하면, 무르시아, 데니아, 발렌시아 등 동쪽 지방은 무어인이 지배했다. 그래서 서로 연락도 동맹도 이루어지지 않는 허약한 작은 왕국에 지나지 않아 가톨릭 세력이 거침없이 약진했다

1085년에 드디어 이슬람 세력의 심장과도 같은 톨레도가 가톨릭교도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시기는 십자군 전쟁(1096-1270)과도 맞물려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로마 교황은 십자군에 스페인은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스페인의 기독교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교도인 이슬람 침략자와 싸우고 있어, 이 또한 십자군 전쟁과 다름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군대를 십자군에 보내지 않고 레콩키스타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212년 라스나바스톨로사 전투에서 가톨릭군의 승리로 대세가 기울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라나다에 자리 잡은 나스르 왕조뿐이다. 그나마 카스티야의 봉신국이 되는 조건으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로코의 무와히드 왕조 역시 옛 제후국이던 마린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그 모든 발단은 라스나바스톨로사 전투였다. 14세기 초 마린 왕조가 마지막으로 반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1410년에는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북쪽 끝인 세우타를 빼앗기며 쇠퇴했다.

146910월 가장 강대한 양대 세력인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레온-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이사벨라 1세 여왕의 결혼을 통해 통일 에스파냐(스페인) 왕국이 성립되어, 1492년에는 마지막 거점인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가 항복해 무혈 함락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711년 이래 무려 782년 만에 끝이 났다. 무어인들 대다수는 이슬람 세력이 수세에 몰리는 동안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아랍인들은 아라비아나 이집트로, 베르베르인들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5.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우리말로 성가족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사그라다는 성스러운이라는 뜻이고, 파밀리아는 가족이란 뜻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 가족'이라는 뜻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을 뜻한다

1882년에 짓기 시작하여, 1891년부터 가우디가 이어받았다. 수석 건축가가 가우디로 교체되면서 전통적인 고딕 양식에서 고딕 양식과 아르누보 양식을 결합한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변모했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현대 건축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가우디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동쪽 파사드(Facade·건물의 전면) 등 전체 계획의 4분의 1 정도만 완성된 상태였다. 나머지 부분은 가우디의 제자들이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진행 중이었는데 그마저도 1936년 스페인 내전 중 일부가 파괴됐다. 이때 현장에 있던 설계안과 사진, 석고 모형도 함께 불타버렸다. 이 때문에 가우디가 직접 완성한 '탄생의 파사드(Nativity Facade)'를 제외한 나머지 외관은 후대 건축가들이 가우디가 남긴 자료를 복원·재해석해 현대적으로 설계한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는 총 세 개의 파사드가 있는데 이 중 유일하게 가우디가 직접 완성한 것은 동쪽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이다. 예수의 탄생과 유년기를 묘사한 조각상들로 꾸며져 있다. 탄생의 파사드에서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청동문은 왼쪽부터 희망의 문’ ‘자비의 문’ ‘믿음의 문으로 불린다. 중앙의 자비의 문 위에는 말 구유에서 성모 마리아의 손에 일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아기 예수와 그 둘을 감싸고 있는 성 요셉을 나타낸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가우디가 직접 조각했다고 알려져 있다.  

성당 안에서 나와 반대편인 서쪽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은 십자가를 진 예수 조각상 등 예수의 수난기를 묘사한 것으로 1954년 착공해 1976년에 완성됐다. 수난의 파사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최후의 만찬과 제자들의 배신, 십자가 죽음, 부활 사이의 시기를 표현했다. 수난의 파사드 중앙의 수난의 문은 스페인의 현대 조각가인 주제프 마리아 수비라치가 음각으로 조각한 예수상이다.

예수의 부활을 표현한 남쪽 '영광의 파사드(Glory Facade)'2002년 착공해 현재도 공사 중이다. 현재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목표 완공 시점은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이다. 가우디는 건축 시작 후 완공까지 200년을 잡았다. 그러면 2082년에 완공되어야 하지만 그동안 건축 기술이 발전되어 2026년이면 완공될 것으로 보고 있다. 완공되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첨탑은 총 18개가 된다. 2015년에는 성당의 12개 첨탑 가운데 가장 높은 예수 그리스도의 탑(172.5m)이 완공됐다. 두 번째로 높은 성모 마리아 탑(140m)도 이미 완성이 되어 마지막 공정만 남은 셈이라고 한다. 나머지 각 파사드에 4개씩 있는 12개의 첨탑은 12사도들을 상징하고, 다른 4개의 첨탑은 전도자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6. 알함브라 궁전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알 함라(Al Hamra)’, 빨강, 붉은이라는 뜻으로, 붉은 철이 함유된 흙으로 지은 붉은 성을 뜻한다.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이곳은 로마시대에 조그만 요새가 있었다. 9세기에 그라나다의 에미르가 성벽과 토대를 올렸다. 1238년에 그라나다의 술탄 무함마드 1세가 나스르 왕조를 이곳에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100년에 걸쳐 점차 화려한 궁궐로 변모시켰다.

나스르 왕조는 수도가 그라나다여서 그라나다 왕국이라고도 한다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내쫓으려는 기독교도의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옴미아드 왕조의 알안달루스 왕국의 수도인 코르도바가 1236년에 점령당하자 남쪽으로 후퇴하여 이곳으로 왔다. 나스르 왕조의 영역은 북쪽은 시에라네바다산지, 남쪽은 알메리아로부터 지브롤터에 이르는 해안선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 시기에 이미 나스르 왕조 외의 모든 이슬람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나스르 왕조도 카스티야 왕국에 막대한 상납금을 지불하여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무어인 최고의 예술이라 불리는 알함브라 궁전은 알안달루스 왕국의 황혼기에 세워진 셈이다. 1469년 아라곤과 카스티야 두 왕국이 합병한 것은 나스르 왕조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나스르 왕조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가톨릭 부부왕에 의하여 1492년 정복되었다. 나스르 왕조는 이베리아반도에서 250년간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으로서 번영을 누렸지만 결국은 북아프리카로 쫒겨 갔다.

알함브라 궁전은 총 7개의 궁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 3개의 궁만 남아 있다. 이슬람 왕이 거주하는 카사레알은 사자의 정원과 대사들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자의 정원에는 무하마드 5세 때 조각된 124개의 대리석 기둥이 줄지어 서 있고 중앙에 12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분수가 있다. 12마리의 사자는 그라나다에 살던 유대인 12부족을 의미한다. 대사들의 방은 왕이 방문객을 만날 때 사용하는 공식 행사장으로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일곱 하늘을 재현해 놓았다.

무엇보다도 알함브라 궁전의 하이라이트는 아라야네스 정원이다. ‘천국의 꽃이란 뜻을 가진 아라야네스의 정원에서 바라보면 하늘과 연못, 건축물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조화와 질서, 완벽한 균형은 지상에서 꿈꿀 수 있는 천상의 세계를 알함브라에 투영했다고 한다.

헤네랄리페 정원은 14세기에 건설된 나스르 왕가의 여름별장으로 알려져 있다. 헤네랄리페 정원의 건물과 구조물들은 이곳 그라나다의 뜨거운 여름 날씨 때문에 물과 바람을 이용하여 시원한 공간을 만들었다. 그늘과 바람, 물이 흐르는 크고 작은 분수를 이용하여 여름철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인공적으로 시원하게 만들었다. 또한 흐르는 물의 압력을 이용하여 분수를 만들어 시원한 공간도 만들어 냈다그런데 이곳은 원형 그대로는 아니다. 기독교도의 손에 넘어간 뒤에 예배당으로 개조되었고, 그 후 나폴레옹 군인들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원형의 모습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모습으로도 당시 얼마나 아름다운 공간이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이곳은 아라베스크 무늬의 조각과 물 그리고 꽃이 어우러져 있다. 아라베스크 무늬란 벽면이나 공예품 등에서 볼 수 있는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화하여 만든 독특한 무늬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이슬람교의 특성상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 대신 신을 찬미하는 의미로 매우 정교하고 정형화된 양식을 만들게 된 것이다. 문자와 식물, 기하학적인 무늬가 배합되어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낸다. 알함브라궁전의 벽면과 천장은 대부분 아라베스크 무늬다

알함브라궁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은 카를 5세의 궁전이다. 카를 5세 궁전은 알함브라 중심에 있는 기독교 양식의 네모 건물이다. 그런데 안에 들어가면 타원형이다. 카를 5(독일어: Karl V, 라틴어: Carolus V, 프랑스어: Charles V, 이탈리아어: Carlo V, 네덜란드어: Karel V, 1500-1558)1519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으며,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스페인어: Carlos I)라고 불렸다카를 5세는 이 건물을 이슬람보다 기독교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한 욕심으로 만들었으나 미완성의 건물이다. 이 궁전은 무거운 하중을 다른 건물들에 떠넘기고 있어, 유지 보수에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카를 5세는 세계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황제였다. 그의 직책만 열거해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 국왕, 도이치 국왕,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트리아 국왕, 시칠리아 군주, 나폴리 군주, 슈티리아 군주, 카린티아 군주, 브라반트 군주, 밀라노 대공, 티롤 백작, 홀란드 백작, 바르셀로나 백작, 아스투리아스 대공, 황금양모기사단장, 페루 군주, 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 지배자 등이다.  이사벨 1세 여왕의 외손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는 이교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궁궐 일부분인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축하고, 성당에 딸린 수도원도 짓고, 궁궐 일부도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공사는 알함브라의 아름다운 건물들과 장식을 훼손하였다. 그 뒤로 알함브라 궁전을 왕궁으로 쓴다던 계획도 흐지부지되었다.

18세기 초 루이 14세의 손자인 펠리페 5(1683-1746)가 며칠 들렀던 것이 왕실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알함브라 궁전은 계속 훼손되었다. 1812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서 탑들이 철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연이어 1821년에는 지진 피해까지 입었다. 그 뒤로는 지역 총독마저 알함브라 맞은편의 헤네랄리페에서 거주하여 궁전을 방치하였다. 이로써 알함브라는 집시와 강도들의 무단거주지로까지 퇴락했다이 궁전이 다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미국인 작가이자 외교관인 워싱턴 어빙에 의해 1829년 알함브라의 이야기(Tales of the Alhambra)가 출판되면서부터였다.

1828년부터 호세 콘트레라스에 의해 원형을 찾기 위한 공사 및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1830년에 페르난도 7(1784-1833)의 기부로 지속적인 공사를 할 수 있었다. 1847년 호세가 사망했으나 그의 아들이 물려받아 공사를 계속하였다. 1870년에는 스페인 국보로 지정되고, 1984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 결론.

전 세계 문화재의 절반 이상이 종교 관련 문화재이다. 종교를 모른다면 그만큼 그 문화재를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기독교 문화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고,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문화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세계의 양대 종교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불안, 자연에 대한 신비감에서 해방될 수 없다. 따라서 위대한 힘, 절대적인 존재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마음이 곧 절대자, 위대한 힘에 대한 믿음, 즉 신앙으로 나타난다. 신앙이 체계화되고, 의식화되어, 제도화되면 이를 종교라고 한다. 종교는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종교는 지역과 민족, 환경에 따라 다르고, 시대와 필요에 따라 변화하고 분열한다. 이러한 종교의 속성을 모르면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오해하거나 곡해하기 쉽고, 그로 인한 갈등이 증폭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종교를 모르면 문화도 전통도 이해하기 힘들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는데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며, 다양한 인간의 삶을 고찰하는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알함브라 궁전은 세계유산으로 인류에게 속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스페인의 역사를 알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이해한 다음 스페인의 대표적인 세계문화 유산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알함브라 궁전을 탐방한다면 그 문화유산의 의미가 더 새롭게 더 깊게 우리 삶에 다가와 더 나은 삶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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