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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스페인 역사 3-2, 합스부르크 왕조의 펠리페 2세

by 황교장 2023. 2. 5.

스페인 역사 3-2 합스부르크 왕조의 펠리페 2세(1527~1598, 재위 1556~1598)

 현재 유럽사에서 관련 전기가 가장 많이 쓰인 인물로는 아돌프 히틀러, 나폴레옹 다음으로 펠리페 2세라고 한다.

펠리페 2세

스페인을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한 시기는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1516~1558), 펠리페 2세(1556~1598), 펠리페 3세(1598~16210, 펠리페 4세(1605~1665), 카를로스 2세(1665~1700)의 184년 동안이다.당대 유럽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군주인 펠리페 2세의 비중은 부왕인 카를로스 1세에 버금간다. 스페인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가 다스렸던 82년간이 세계 최강의 해가 지지 않는 글로벌 제국이었다.

카를로스 1세가 죽기 2년 전에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펠리페 2세는 선왕의 영토 중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방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1580년 포르투갈의 왕 엔리케 1세가 자녀 없이 죽자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병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포르투갈의 왕도 겸하게 된다.

펠리페 2세

펠리페 2세를 역사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레판토 해전(1571)에서 오스만 튀르크를 물리친 것이다.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점령하여 동지중해 패권을 잡게 된 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키프로스를 공격했다. 그러자 베네치아 공화국은 교황청에 도움을 구했다. 교황 피우스 5세는 펠리페 2세에게 성전 참전을 요청했다. 펠리페 2세는 이복동생인 돈 후안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스페인은 로마 교황청, 베네치아, 제노바 등과 연합하여 신성동맹을 결성해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튀르크를 물리쳤다.

돈 후안

레판토 해전

이후 스페인 함대는‘무적함대’로 불리며 한동안 지중해와 대서양 항로를 독점했다. 이 전투에 참전한 세르반테스는 한쪽 팔을 잃게 되어 ‘레판토 해전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의 경험을 소설 ‘돈키호테’에서 등장인물들의 증언으로 말하고 있다.

펠리페 2세는 1588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폐위시킬 목적으로 무적함대를 영국에 보냈다. 그러나 태풍을 만나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영국 함대는 뛰어난 기동력과 야간기습으로 무적함대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패배로 이후 스페인의 해상권은 영국과 네덜란드에 게 넘어갔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수도를 톨레도에서 바야돌리드를 거쳐 1561년, 현재의 수도인 마드리드로 천도하였다. 마드리드 북서쪽 50킬로미터 거리에 ‘엘 에스코리알’이라는 왕궁 겸 당대 스페인 최고의 수도원을 세웠다.

엘 에스코리알 궁전

펠리페 2세는 ‘관료제’를 확립하여 왕국과 식민지에 총독(Virrey)을 파견하였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해 새로운 절대주의 통치를 완성하였다.

펠리페 2세를 계승한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카를로스 2세 왕들은 좀 떨어지는 군주들이지만 펠리페 2세 시절 완성된 전문적 관료집단 중심의 행정통치 체계가 유지되어 국가가 지탱할 수 있었다.

펠리페 2세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일을 신중하게 처리했다하여 ‘신중왕(El Prudente)’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 다른 별명은 ‘서류왕’이었다. 하루에 읽고 서명하는 문서가 약 400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약하고, 병약하고, 의심 많고,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100페세타 지폐

2. 가족

펠리페 2세는 결혼을 네 번 했다. 첫 결혼은 4촌인 포르투갈 공주 마리아 마누엘라와 했다. 하지만 공주는 18살에 죽었다.

마리아 마누엘라

두 번째 아내는 영국의 여왕 메리 1세다. 소위 ‘피의 메리’로 알려진 인물이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딸로 부친인 카를 5세의 이종사촌으로 펠리페 2세에게는 5촌 고모가 된다. 메리 1세는 펠리페 2세에게 첫눈에 반해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심은 둘의 결혼에 부정적이었다. 펠리페 2세도 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메리 1세와 결혼한 뒤에도 영국에 잘 찾아가지 않았다.

메리 1세

메리 혼자서만 무심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두 번이나 상상임신을 할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결국 결혼 2년 만에 메리가 병으로 사망했다.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메리를 이어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엘리사베트(이사벨)

펠리페 2세의 세 번째 부인은 엘리사베트(이사벨)이다. 프랑스의 앙리 2세와 메디치 가문의 장자 계열인 국부 코시모 혈통의 유일한 상속녀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맏딸이다. 프랑스 앙리 4세 왕의 첫 번째 부인인 마르그리트가 자매이고, 프랑수아 2세 왕, 샤를 9세 왕, 앙리 3세 왕 과는 남매이다. 이사벨은 수줍음이 많은 성격에 귀엽고 예뻤다. 펠리페 2세는 그녀와 결혼한 이후에 애첩도 들이지 않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이사벨은 출산 도중 사망하였다.

안나 공주

펠리페 2세의 네 번째 부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스페인 출신의 마리아 황비 사이에 태어난 안나 공주이다. 안나 공주의 어머니 마리아 황비는 펠리페 2세의 여동생이고,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는 펠리페 2세와 사촌지간이다. 펠리페 2세는 안나의 외삼촌이자 5촌 당숙이다. 안나는 외가인 스페인에서 태어나서 4살까지 살다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빈에서 성장했다. 결혼 당시 안나는 21살, 펠리페 2세는 43살이었다. 펠리페 2세는 이사벨처럼 안나를 아끼며 애첩을 들이지 않고 오로지 부인에게만 충실했다고 한다. 안나 또한 펠리페의 세 번째 부인인 이사벨이 낳은 두 명의 의붓딸들에게 좋은 새어머니가 되어주었다. 안나는 펠리페 2세와의 사이에서 펠리페 3세를 낳았다. 안나는 활발한 성격으로 스페인의 궁정을 발랄하게 이끌어 나갔지만, 결혼한 지 10년 만인 1580년 31살의 젊은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안나보다 18년이나 더 살다가 1598년 9월 13일 마드리드에서 암에 걸려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왕만큼이나 굴곡 많고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유해는 자신이 지은 엘 에스코리알의 왕실 영묘에 안장되었다. 아들인 펠리페 3세가 왕위를 이었다.

펠리페 2세 영묘

3.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48)

펠리페 2세의 최대 실책은 80년 전쟁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한 점이다. 아버지 카를로스 1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스페인 왕이 된 뒤에도 네덜란드인을 최측근에 두었다. 왕실에서도 네덜란드어로 정치를 하여 비록 높은 세금이 불만스럽기는 해도 네덜란드인은 카를로스 1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어를 전혀 못했고 네덜란드인들을 경멸했다. 개신교에 대한 혹독한 탄압과 높은 세금은 네덜란드인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펠리페 2세

 

분노한 네덜란드 개신교들은 1566년에 교회를 습격해서 성상을 파괴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정예군과 공포의 총독으로 불린 알바 공을 파견해 개신교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피의 탄압을 했다. 이에 80년간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1648)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한 차례 휴전(1609~1621)을 거쳐 삼십 년 전쟁이 끝나는 1648년에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끝을 맺는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 벌이는 전쟁인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군대, 무기, 전쟁 물자 등을 전부 배로 실어 날라야 했다. 그 와중에도 이슬람과의 전쟁, 영국과의 전쟁 등으로 국가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1575년 모라토리엄(moratorium, 파산선언)을 했다. 이를 계기로 스페인은 세계적인 신용 불량국가로 대제국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무려 네 차례나 모라토리엄을 했다. 스페인은 최대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에도 이미 몰락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

엘 그레코 목자들의 경배

펠리페 2세의 또 다른 실책은 오직 가톨릭 하나만을 고집하는 ‘가톨릭 순혈주의’이다. 이사벨 여왕이 1492년 1월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국토를 통일한 뒤 바로 시작한 정책은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스페인에서 추방한 알람브라 칙령(1492.3.31.)이었다. 펠리페 2세는 알람브라 칙령에 더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이슬람교도들까지도 쫓아내었다. 이러한 비타협적이고 비관용적인 순혈주의는 스페인의 몰락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무데하르(가톨릭 지역에 사는 이슬람교도)나 모스리코(1492년 이후 개종한 이슬람교도)는 주로 건설업이나 농업에 종사했다. 이들의 추방으로 농사를 짓던 농촌 일꾼들이 엄청나게 줄어들어 스페인의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곡물 가격이 폭등하여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스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스페인 전국의 의사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고, 금융업, 법률가, 회계사, 무역 등 유대인이 차지하는 몫이 대단히 중요했다. 이들이 모두 쫓겨나자 생산은 감소하고 상업, 금융까지 마비되어 스페인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이는 스페인의 순혈주의에 따른 비관용의 결과였다. 이와 달리 유대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그들을 환영했다.

 

엘 그레코 라오콘

4.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네덜란드는 플랑드르지방과 부르고뉴 공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천 년 전 플랑드르지방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로마군이 물러가자 이곳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리센족, 바타비아족, 작센족 등이 살았다. 이 가운데 바타비아족은 로마인들에게 토목 기술을 잘 배워 토목 기술이 뛰어난 종족이었다. 1600년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그 수도 이름을 ‘바타비아’라고 한 것도 새롭고 험한 땅을 개척한 그들의 선조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뒤에 인도네시아가 바타비아를 그들의 언어인 ‘자카르타’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지방에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당시 유럽의 최강자였던 프랑크 왕국이었다. 네덜란드를 차지한 프랑크 왕국의 카를대제 즉 사를마뉴는 800년 로마교황으로부터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고 이 지방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카를대제는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각 지방에 자기가 보낸 신하가 다스리게 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다.

엘 그레코 톨레도 풍경

카를대제가 세상을 떠난 뒤 프랑크 왕국은 서프랑크왕국(프랑스), 중 로타르령(이탈리아), 동프랑크(도이칠란트)로 나누었다. 서쪽(벨기에 지방)은 프랑스에 동쪽은 도이칠란트에 속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지방은 평야에다 물이 풍부하고 물길이 편리해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양털로 옷감을 짜는 방적 산업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방적 산업이 발달한 곳이 플랑드르다. 플랑드르에 돈이 몰리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도시들이 크게 번창했다. 위트레흐트, 암스테르담, 브뤼셀, 겐트 같은 도시들이 북부유럽에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네덜란드는 북부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엘 그레코 성모의 죽음

도시가 번성하고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가자 상인, 은행가, 의사, 법률가, 학자 등이 행세하는 새로운 계급으로 탄생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계급을 부르주아 계급(Bourgeoisie)이라 부른다. 북부유럽에서는 플랑드르 지역에서 시민계급이 가장 먼저 등장했다. 네덜란드에서도 플랑드르는 옷감 짜는 공업이 가장 발달한 곳이다. 전 유럽의 왕족, 귀족들이 입는 옷의 옷감은 대부분 플랑드르에서 만들었다. 당시의 영국은 후진국이라 양을 길러 그 털을 깎아 옷감 짜는 원료로 플랑드르에 내다 파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런데 이웃 프랑스가 플랑드르를 위협하여 막대한 세금을 요구했다. 양털 무역으로 플랑드르에 와 있던 영국 상인들을 잡아 가두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영국은 프랑스에 큰 불만과 분노를 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의 왕위계승 문제가 발생하여 영국군이 프랑스에 침입하게 된다. 이것이 백년전쟁(1337~1453)의 시발점이었다.

엘 그레코 오르가츠 백작의 매장

백년전쟁의 명분은 프랑스의 왕위계승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플랑드르의 이권 확보를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플랑드르를 비롯한 네덜란드 각 지역은 영국 편에 서서 프랑스와 싸웠다. 그런데 프랑스 안에서도 영국 편을 들어 프랑스와 싸운 지방이 있었다. 그곳은 부르고뉴지방이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에 맞서 경쟁하던 지방이었다. 부르고뉴는 보르도와 함께 프랑스 최고의 포도주를 생산하는 지방이기도 하다. 백년전쟁이 터진 뒤 부르고뉴지방과 네덜란드 지방은 아주 가까워졌다. 완전한 한편으로 묶기 위해 부르고뉴의 필리프 2세와 플랑드르 왕위계승자 마르그리트 공주가 1369년 결혼하게 됨으로써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공국은 하나로 합쳐졌다. 이때부터 부르고뉴 왕족이 네덜란드 지방을 지배하게 되었다.

결혼으로 플랑드르와 합친 부르고뉴는 더욱 넓어진 영토와 강대해진 세력으로 영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 왕을 거의 파멸상태로 몰고 갔다. 그런데 프랑스의 애국 소녀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승리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에 부르고뉴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재판에서 잔 다르크는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당했다.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세례

한편 부르고뉴 왕 필리프 2세와 플랑드르 마르그리트 왕녀의 아들 필리프 3세에 이르러서는 네덜란드 지방의 여러 주들을 신하로 끌어들였다. 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지방 전부가 부르고뉴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필리프 3세의 아들 샤를(카를)이 아들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부르고뉴의 왕관은 샤를의 딸 마리에게 돌아갔다. 1477년 부르고뉴의 공주이자 왕위계승자인 마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황태자에게 시집을 갔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물론 부르고뉴까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리 공주와 막시밀리안 황제 사이에 미남 왕 필리프가 태어났다.

미남왕 필리프가 스페인의 펠리페 1세다. 필리프는 에스파냐 공주 후아나와 결혼하여 네덜란드에 살고 있었다.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죽자 왕위는 후아나에게 넘어왔다. 필리프와 후아나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이자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이다.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이 펠리페 2세이다.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5. 펠리페 2세와 엘 그레코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역사상 예술을 가장 사랑한 왕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다. 엘 그레코(1541?~ 1614)는 그리스 크레타섬 칸디아에서 출생하였다. ‘그리스인’이라는 뜻인 ‘엘 그레코’로 불렸다.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궁중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화풍이 펠리프 2세의 마음에 들지 않아 궁중화가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은 종교화와 초상화였다. 회색빛 명암과 색채,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고 뒤틀린 인체묘사는 당시 에스파냐에서는 매너리즘 미술로 평가절하되었다. 매너리즘 미술은 보통 미술사의 시대 구분에서 르네상스 미술에서 바로크 미술로 이행하는 사이(1530~1600)에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던 과도기적인 미술 양식을 말한다. 기존 방식이나 형식을 답습한 미술이라는 의미를 지닌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의 명칭이었다.

엘 그레코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엘 그레코는 톨레도에 정착한 후 평생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다 죽었다. 엘 그레코 작품의 특징은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어두운 단색으로 배경을 표현하여 인물을 강조했다. 그 인물들을 10등신에 가깝게 길게 그려서 눈에 띄도록 한 독특하고 파격적인 화풍이었다. 그 당시에는 실제 사람과 사물을 똑같이 표현하는 고전주의 사조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시각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풍은 16세기 말에 매너리즘이라는 사조로 발전한다. 후일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초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매너리즘이라는 사조가 현재는 객관성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미술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너리즘의 특징은 형태와 비율의 왜곡과 과장, 몽상적인 분위기 등으로 르네상스의 정확한 비율과 사실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려고 한 엘 그레코의 화풍은 펠리페 2세와는 양립할 수가 없었다. 펠리페 2세는 회화가 순교자나 성인들을 실재 그대로 올바르고 정확하게 그릴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성 마리우스의 순교’는 엘 그레코가 펠리페 2세의 눈 밖에 난 결정적인 그림이다.

성 마리우스의 순교

이 그림은 엘 그레코가 펠리페 2세의 주문을 받아 그린 그림이다. 완성된 그림을 본 펠리페 2세가 “그림값을 주되 제단에 걸지 말고 창고에 두라.”고 명령하면서 엘 에스코리알 창고에 보관되었다. 그 이유는 종교적 전통주의를 위반했기 때문인데, ‘성인들은 교인들이 기도하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트렌트 공의회의 원칙과는 달리, 엘 그레코는 성인들의 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인 순교의 순간을 그림의 중앙이 아닌 구석의 배경으로 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펠리페 2세의 의도와는 달리 현재 엘 에스코리알 궁전의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서 전시되고 있다. 엘 그레코는 오랫동안 그의 진가가 묻혀져 있었으나 19세기 이후 재평가되어 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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