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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경주여행

교육사랑 20주년 기념 구룡포 나들이 1 - 석굴암

by 황교장 2026. 5. 17.

교육사랑 20주년 기념 구룡포 나들이 1 - 석굴암

 

교육사랑 20주년 기념 ‘구룡포 나들이’를 2026년 5월 14일(목) 08시 30분에 동래역에서 출발하였다.

교육사랑은 최영도 선생이 만든 교육에 관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나의 글쓰기도 선생의 권유로 교육사랑에 ‘황도사의 사주여행’ 코너를 만들어 ‘사주팔자란 무엇인가?’를 쓴 것이 시작이었다.

이중 교육사랑 트레킹은 20년 동안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의 정기 산행과 숙박을 하면서 답사하는 특별 여행을 포함하여 총 2,580회 실시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41명이 1박 2일 ‘구룡포 나들이’를 떠난 것이다.

여정은 동래역-석굴암-포항 스카이워크-호미곶-구룡포 일본인 거리-구룡포 청소년수련원에서 숙박-울산 대왕암공원-진하해수욕장-동래역이다.

동래역을 출발한 버스는 온천장을 지나 장전동으로 향한다.

197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닐 때 부산대학교 구정문과 온천장 사이를 친구들과 하숙집 동료들이 함께한 추억이 떠오른다. 반백 년 전으로 되돌아가 지금은 무성한 빌딩 숲으로 변한, 단층집과 이층집들로 줄지어진 당시의 골목들이 연상되어 입가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석굴암 불두화

버스가 금정산을 지나니 영취산, 신불산, 간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저 능선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휴게소에 잠깐 들렸다가 경주로 향했다. 버스는 불국사를 지나 토함산 고개를 힘겹게 올라 주차장에 도착했다.

석굴암에서 만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다. 내 나이보다도 더 들어 보이는 노랑머리 외국인도 많이 보인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세계의 중심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주차장에서 석굴암 가는 길은 걷기 좋아 옛날을 회상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석굴암에 도착했다.

석굴암에 올 때마다 안타까운 점은 부처님이 감옥에 있다는 느낌이다. 오죽하면 석굴암을 수(水)굴암, 암(暗)굴암, 전(電)굴암이라는 별칭을 얻었겠는가!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재다. 중국이 자랑하는 둔황의 막고굴이나 대동의 윈강석굴, 낙양의 룽먼석굴에 있는 불상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불상은 석가모니 사후 수백 년이 흐른 기원전 4세기에 히말라야 산맥 밑에 위치한 간다라 지역에서 처음 조성되었다.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더대왕이 동방원정을 할 때의 진입로였다. 알렉산더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간다라지방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모습을 빌려 신을 조각하는 모습을 보고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 이 시기는 대승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깨달음을 얻은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아미타, 약사, 비로자나, 미륵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부처가 출현하게 되었다.

간다라 불상

초기 불상은 인도 서북부의 간다라지방과 내륙의 마투라지방에서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지만, 그 양식은 확연히 달랐다.

히말라야 산맥 밑에 위치한 간다라는 인도의 다른 지역보다 서구 헬레니즘 문화를 빨리 수용했다. 따라서 간다라 불상은 유럽인을 닮았다. 반면에 마투라 불상은 인도인을 닮았다.

마투라 불상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1세기 후한초지만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후한(25-220)이 망하고 북방의 호족들이 일어나는 오호십육국시대(316-389)였다.

둔황 막고굴

북방의 호족들은 문화적으로 뛰어난 한족의 유교에 대응하는 사상으로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5호16국은 선비족이 화북지역에 세운 북위(北魏,386-534)의 태무제가 439년 강북을 통일했다.

둔황 막고굴 불상

486년 북위의 효문제는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고 한화정책과 용문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던 위진남북조는 혼란을 극복할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사상체계가 필요했다. 여기에 불교는 가장 적절한 대안이었다.

따라서 선비족이 세운 북위(386-534)는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강력한 왕권 불교를 추진했다. 지금 중국이 자랑하는 거대한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이 이때 건립되었다.

윈강석굴

북위부터 불상의 모습은 중국화되어 얼굴은 갸름하면서 살이 복스럽게 오르고, 옷은 북방의 날씨를 반영하여 두툼해지면서 옷주름이 굵어진다.

룽먼석굴

북위불상의 이러한 특징은 고구려 불상에도 나타난다.

고구려는 소수림왕2년(372) 5호16국의 하나인 전진(351-394)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백제는 침류왕 때인 384년 동진(317-420)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해주었다. 백제의 불상은 불교 전래 초기의 것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대부분 부여 천도 이후의 작품만 남아 있다. 대표적인 불상은 서산마애불이다.

서산마애불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했다. 이후 신라불교는 왕실의 주도 아래 급속히 퍼져나갔다. 7세기의 석조상으로서는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을 비롯하여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등이다.

경주 서약동 마애여래 삼존입상

경주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는 우리나라 불교 문화의 전성기라 부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숭상되어 오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기틀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의 사원 건축이나 불상 조성 등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 그리고 불상의 종류나 표현도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조각 중 가장 우수하며 또한 대표적인 예는 이곳 석굴암이다. 마치 불국토를 재현하듯 본존과 보살 · 천(天) · 나한 등 여러 권속들이 모두 모여 있으며 여러 개의 다듬어진 돌로 쌓아서 축조한 궁륭 천정의 석굴 사원은 중국에서도 그 유례가 드물다.

석굴암 본존불

특히 조각 기술의 세련도나 상의 알맞은 비례, 부드러운 조형성 위에 불상 전체에 흐르는 숭고한 종교성이 조화되어 종교 예술로서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돋보인다.

중국 불상의 양식적 변천을 보면 고구려는 북위, 백제는 양나라, 신라는 북제와 수나라, 통일신라는 당나라 불상과 궤도를 같이하면서 삼국 특유의 불상을 전개해갔다.

그리고 삼국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여 일본의 고대국가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상은 중국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경향에 동참하고 한편으로는 이를 일본에 전파하면서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보편적 흐름을 형성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이는 서양에서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와 로마에서 시작한 르네상스 문화가 베네치아와 프랑드르 지역인 오늘날 벨기에, 네덜란드 및 독일까지 전파되면서 유럽문화의 특성을 이루게 된 경우와 비슷하다.

일연(一然)스님의 ‘삼국유사(1281)’에 석굴암은 751년(경덕왕 10년)에 김대성(金大城,700~774)이 751년에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불사를 세웠다고 하여, 석굴암 창건 연대를 751년으로 여겨 왔다.

수리하기 전 석굴암

그러나 근래에 불국사 삼층석탑인 석가탑 중수기인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1024)’에는 경덕왕이 즉위한 742년, 김대성이 중시(中侍)가 되기 이전에 불국사 양 탑의 건축을 시작하여 혜공왕 대에 공사를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보다 250년 가량 앞선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신빙성이 높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 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 있다. 2구는 1907년 일본인 도굴꾼들이 훔쳐 갔다. 이때 불국사 다보탑에 있는 네 마리 돌사자 중 상태가 좋은 3개를 잃어버리게 된다.

 

석굴암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지만 그 중 석굴암에 대한 대표적인 논쟁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석굴암 천장덮개돌

첫째, 천장덮개돌은 왜 세 동강이 났는가?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대성이 천개석(덮개돌)을 만들려고 돌을 다듬는데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분통을 터뜨리던 김대성이 깜빡 조는 사이,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덮개돌을 얹다가 그만 9m 바닥으로 떨어졌고, 또 그것을 분하게 여긴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석공들이 서둘러 공사를 마무리했다는 설이다. 그때 세 조각 난 부실공사의 흔적이 128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설은 경덕왕(재위 741~765년)이 ‘대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기도를 드릴 사찰(석굴암)을 서둘러 지으려 공사를 재촉하다가 벌어진 사건이라는 설이다.

또 완공 후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때문에 균열됐을 수 있다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 ‘혜공왕조’는 “779년 경주에 큰 지진이 일어나 집들이 무너지고, 100여 명이 사망했다”고 했다. 김대성이 죽은 지 5년이 지난 때였다. 따라서 천개석은 지진의 진동에 의해 발생하는 내부의 응력에 가장 약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설(說)일 뿐이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세 조각 난 천장덮개돌은 1284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붕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석굴암 부처님의 바라보는 방향이 어디인가?

문무대왕릉인 대왕암을 바라다 보고 있다는 설과, 동짓날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설이다.

석굴암을 토함산(吐含山,745m)에 건립한 이유는 토함산이 오악 중 동악(東岳)으로 신라인들이 숭상하던 산이기 때문이다.

신라를 방어하기 위해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文武王)의 장지로 알려진 대왕암(大王巖)을 바라보는 위치를 선정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석굴의 방향은 대왕암(28.5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동짓날 해가 뜨는 방향(29.4도)과 일치한다.

동지는 일 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 동지가 지나면 낮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이다.

명리학에서도 다수설은 일 년의 시작을 입춘으로 보지만 동지로 보는 설도 만만치 않다.

석굴암 11면 관음보살상

셋째는 석굴암을 수굴암, 암굴암, 전굴암으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석굴암은 지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세워졌다. 이 샘물은 석굴암 내부의 냉각 기능을 담당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이 샘물을 습기의 원인으로 오인해서 아연관을 설치해 모두 배수해 버렸다.

그러자 바닥의 온도가 높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굴 벽면 표면에 결로가 생겨 이끼가 끼었다.

또한 습기에 노출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탄산염과 칼슘염이 누출되어 화강암을 부식시키는 문제까지 일어났다. 이에 석굴암에게 수(水)굴암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결로현상을 해결해 주었던 것은 석굴암 밑을 흐르는 샘물이었다고 한다. 석굴암의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콘크리트를 완전히 없애고 샘물이 흐르던 처음 그대로 놔두는 것이라고 한다.

결로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

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일년내내 샘물이 콸콸 쏟아지는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것이었다.

석굴암이 암(暗)굴암으로 불리는 것은 후대에 석굴암을 이중 콘크리트 돔으로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결로현상을 더 유발했다. 이중 콘크리트 돔 사이에 들어 있는 더운 공기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함으로써 결로현상이 더 심해진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은 정확히 동동남 29.4도 방향, 과학적으로는 ‘태양의 길’을 철저하게 계산한 결과로 동해에서 해가 떠오르면 그 첫 햇살이 본존불의 이마(백호)를 비추며 석굴 내부를 환하게 밝히도록 설계되었지만, 지금은 차단된 것이다. 이를 두고 암굴암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다.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마지막 방법으로 에어컨을 설치했다. 이는 전기를 사용하여 강제로 습기를 제거하기에 석굴암은 전(電)굴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었다.

석굴암 본존불

넷째는 석굴암의 본존불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중 어느 분인가?

부처란 진리를 깨달은 자로, 득도하여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른 존재를 말한다.

1.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석가모니는 석가족에서 나온 성자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불은 인도에서 왕자로 태어나 출가하여 진리 탐구와 수행을 통해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실존 인물인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것이다. 석가모니불은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부처이다. 석가모니를 본존불로 모신 곳이 대웅전(大雄殿)이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바닥을 보이게 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본래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手印)이다.

또한 본존불 주변에 10대 제자상이 있다. 10대 제자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므로 석가모니 불상과 함께 배치한다.

석굴암 11면 관음보살상

그리고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는 십일면관음의 부조가 있는데, 관세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 따라서 본존불을 석가모니불로 보는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 아미타여래좌상

2.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로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여래는 ‘아미타경’의 중심부처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서방 극락정토로 이끄는 부처님이다.

서방정토는 서쪽으로 십만 억의 불국토를 지나서 있는 세계로,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있어 극락이라 한다.

아미타는 무한한 광명과 무한한 수명을 보장해 주는 부처라는 뜻을 지닌다.

‘아미타경’에 따르면 아미타여래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이다.

아무리 악한 중생이라 할지라도 아미타불을 간절히 부르면 극락으로 갈 수 있다. 아미타불이 봉안되는 불전은 극락전, 미타전,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광전 등으로 부른다. 아미타불을 모신 대표적인 곳이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석굴암 본존불은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에 안치한 아미타불과 비슷하다. 부석사 무량수전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창건자인 김대성 관련 설화 또한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김대성 설화에선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생의 부모가 극락왕생하길 바랐다면 아미타불을 조성함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석굴암 본존불은 아미타불의 광명(光明)을 뜻하는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현판이 있었다는 것 또한 아미타불 주장의 근거이다.

불국사 금동 아미타 여래좌상

3.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은 ‘화엄경’의 부처로서, 모든 곳에 광명을 비추고 인간세계를 포용하는 존재다. 비로자나는 광명을 말한다. 고요하고 고요한 가운데 진리의 빛이 가득한 세계라 하여 대적광전이라 부른다. 화엄경을 근거로 하기에 화엄전이라고도 하고,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뜻에서 비로전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대적광전, 화엄전, 비로전, 대광명전은 모두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비로자나불상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 지권인은 왼손의 검지를 곧추세워 오른손의 엄지 끝을 대고 감싸 쥔 수인이다.

보림사 철조 비라자나불 좌상

석굴암은 당시 유행한 화엄경(華嚴經)에 근거하여 건립되었는데, 화엄경의 주불(主佛)이 비로자나이기 때문에 석굴암 본존불은 처음부터 비로자나불을 염두에 두고 조성하였다는 설이다. 또한 비로자나불의 속성이 광명인데, 석굴암 본존불을 동향(東向)으로 안치하여 아침에 뜨는 동해의 햇살을 받게 한 것이 바로 비로자나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들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일본인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다. 그는 1932년 일본대학 전문학부 건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조선총독부 기사로 근무했다. 경주 사천왕사 천군동 석탑, 평양 청암리 사지, 부여 정림사지, 불국사와 석굴암의 측량을 맡았다. 마지막으로 백제 부소산성을 실측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35세의 젊은 나이에 총각으로 세상을 떠났다.

요네다는 불국사와 석불사 석굴을 측량하면서 당시 신라의 석공들이 사용했던 자는 곡척(30.3cm)이 아닌, 0.98곡척(29.7cm)인 것을 밝혀냈다. 이 길이를 당척(唐尺)이라 이름을 붙였다.

요네다의 석굴암 평면 분석에 따르면, 본존불 대좌의 지름인 12척이 석굴암 구조의 기본모듈이다. 석굴암은 모듈 건축을 통해 동짓날 해돋이 방향으로 공간 대칭축을 정교하게 일치시킨 좌우대칭의 건축이다. 전실(前室)과 주실(主室) 평면, 입면, 천장까지의 높이, 본존불의 높이와 무릎 너비까지 정밀한 기하학적 수리 원리가 반영되었다.

이 정확도는 1만분의 1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10m에 1mm의 오차를 말한다.

따라서 석굴암은 아름다운 예술품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과학과 수학 지식을 집대성하여 완벽하게 구현한 것이다.

하지만 요네다는 건축적 구조만을 설명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본존불의 크기가 왜 높이가 11.5자, 무릎과 무릎 사이가 8.8자, 어깨너비가 6.6자로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밝히지 못하였다.

마하보리사 석가모니 성도상

이 수치의 근거를 찾아낸 분은 강우방 선생이다.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 요네다와 똑같은 수치가 나온 것이었다.

당나라 현장법사가 남긴 기록에서 인도 부다가야의 마하보리사에 석가모니 성도상이 어깨너비의 4치 차이만 제외하고는 숫자와 방향과 모습이 일치하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따라서 석굴암의 본존상은 부다가야 마하보리사의 석가 성도상을 모델로 조영된 것이 확실한 셈이다.

그러나 강우방 선생은 그것이 꼭 석가모니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도와 동시에 붓다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석가이자 비로자나불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유홍준 교수는 당시 신라인들이 알고 있고 좋아하는 보살, 천(天), 나한 등이 총동원되어 각기 제 몫을 하게 배치한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본존불은 깨달은 자, 부처를 의미하는 보편적인 개념일 뿐 어느 경전에 나오는 특정불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면서 불국사를 나와 포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