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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영남문화와 퇴계

by 황교장 2009. 8. 14.

영남문화와 퇴계

 

7월 27일부터 8월 7일까지 2주간 ‘영남문화와 퇴계’라는 주제로 영산대학교에서 2009년도 하계 교원 직무연수를 받았다.

퇴계선생의 핵심사상인 경(敬)을 알기 위하여 인터넷에서 찾은 ‘경’ 사상에 대한 10여 편의 글을 읽어 보아도 아리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과 ‘사단칠정’ 논쟁을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여 퇴계선생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 연수를 신청하였다. 3년 전에 받은 ‘논어의 현대적 재조명’의 연수도 매우 좋았다. 지금까지 많은 연수를 받아왔지만 이 연수만큼 알찬 연수는 없었다.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에서 하는 연수는 정말 알찬 연수다.

 

연수과정은 퇴계선생에 대하여 열두 분의 교수님들이 주제를 나누어서 강의를 하고 마지막으로 8월 5일과 6일을 직접 안동지역 일원을 답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답사가 연수의 대미인 셈이다. 답사는 영산대학교-국학진흥원-도산서원-퇴계 태실-퇴계종택-퇴계묘소-수졸당종택-육사문학관-병산서원-부산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여행에는 날씨가 좋아야 한다. 특히 가시거리가 좋아야만 풍광을 즐기기에 제 맛이 난다. 8월 5일 아침부터 가시거리가 너무 좋다. 지루한 장마 끝에 한창 더워야 될 8월 초에 선선한 가을 날씨다. 이런 날씨는 3대 적선을 해야만 만난다고 하니 연수원생 중 누군가가 3대 적선 가지고는 턱도 없고 5대 적선은 해야만 된다고 주장한다.

첫 방문처가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이다. 도착하니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이신 김형수 박사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한국국학진흥원

 

2년 전 이곳에 들렀을 때는 보지 못했던 귀하디귀한 진본들을 볼 수 있었다. 한석봉의 글씨인 도산서원과 탁청정, 퇴계선생의 글씨인 도산서당 현판 등 수많은 진품들을 볼 수 있었다. 탁청정 현판은 김박사께서 손수 가지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본인이 오천 군자리 마을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 연수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산서당 현판

 

 도산서원 전교당 현판

 

 도산서원 현판

 

또한 초상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농암 이현보(1467-1555)선생의 초상화와 퇴계선생의 삼촌인 송재 이우(1469-1517), 학봉선생의 부친인 청계공 김진(1500-1580)의 초상화다. 농암종택과 내앞종택을 들르고 글을 썼던 일들이 이분들의 초상화와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다.

 

 송재 이우 초상화

 

 청계공 김진 초상화(보물 제 1221호)

 

 농암 이현보 초상화(보물 제872호)

 

박물관에는 퇴계선생의 교지가 있다. 교지는 조선시대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등을 내려주는 명령서다. 교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어보(御寶)가 사용된다. 교지 내용을 보니 정2품 자헌대부 공조판서이자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등 몇 개의 벼슬을 겸직하고 있다.

 

 교지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국학자료를 수집 보존하여 훼손 및 멸실을 예방하고, 미공개 자료를 조사 발굴하여 한국학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자료는 고서 8만3천여 점, 고문서 12만여 점, 목판 5만7천여 점, 기타 2천6백여 점으로 총 26만3천여 점에 달하며 수량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기록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일반 민간 사족 가문에서 생산된 기록자료라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다고 한다. 국보 1종 1점, 보물 50종 592점, 시도유형문화재 69종 1,023점, 문화재 자료 2종 105점 등이다.

가장 큰 특징은 도둑으로부터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는 데 있다고 한다. 어느 문중에서는 초상화를 기증하고 난 일주일만에 집에 도둑이 들어 가지고 있던 모조품을 도둑맞았다. 이에 다시 모조품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국학진흥원을 나와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도산서원 가는 길은 언제보아도 풍광이 뛰어나다. 이중환은 택리지의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사람이 살기 위한 터전을 잡을 때 가장 중요한 네 가지를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라고 했다. 이 넷을 가장 잘 갖춘 곳이 ‘도산’과 ‘하회’다. 이는 도산과 하회가 아름다운 경관뿐만 아니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심도 좋고 땅도 기름지다는 의미일 것이다.

 

 도산서원 입구

 

택리지에서 도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도산은 양쪽의 산이 합쳐져서 긴 골짜기가 되었는데 산이 별로 높지 않다. 황지물이 여기에 와서 비로소 커지고, 골짜기 어구에 이르러 큰 시냇물이 되었다. 양쪽 산발치는 모두 석벽이며 물가에 위치하여 경치가 훌륭하다. 물은 거룻배를 이용하기에 족하고 골 복판에는 고목이 매우 많아 조용하고 시원하다. 산 뒤와 시내 남쪽은 모두 좋은 밭과 평평한 밭골이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巖棲軒) 두 칸이 아직도 있고, 그 안에는 퇴계가 쓰던 벼룻집과 지팡이, 신과 함께 종이로 만든 선기옥형(璇璣玉衡)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안동댐과 도산서원 정비사업으로 인해 많이 변했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한창 수리 중에 있는 도산서당과 광명실을 보고 진도문을 들어서면 도산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당이다. 전교당 마루에 둘러 앉아 부남철 원장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이어서 별유사의 지도로 대표 세 분이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고 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에 참배하는 알묘(謁廟)를 행했다.

위패에는 ‘退陶李先生’을 주향으로 ‘月川趙公’을 종향으로 모셔놓았다. 위패의 재질은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자라고 있는 밤나무를 사용한다. 혹시나 싶어 별유사에게 물어보니 밤나무라고 한다. 도산서원에 올 때마다 위패를 모신 상덕사 안의 구조가 늘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소원성취를 하였다.

 

 위패

 

 월천 조목 위패

 

다음 목적지는 태실인 노송정 종택이다. 온혜온천 맞은편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수박이 한창이다. 수박을 모두 봉지에 싸놓았다. 연수생 한 분이 왜 수박을 봉지로 쌌는지를 물었다. 봉숭아, 포도, 배 등은 봉지로 싼 것을 보았지만 수박을 이렇게 싸놓은 것은 처음이라 하니 병충해의 피해를 줄이고 모양을 좋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수박은 햇빛을 많이 받은 쪽은 누른빛을 띤다. 그러나 수박넝쿨이 좋은 데서 자란 수박은 수박 고유의 색깔이 나온다.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봉지로 싼 것이다.

 

 노송정 종택 전경

 

수박밭을 지나면 노송정 종택의 대문이다. 대문에는 ‘聖臨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선생의 어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선생을 낳았다고 한다. 즉 성인인 공자가 대문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림문

 

선생이 태어난 태실방은 연수생들이 서로 앉아 보려고 경쟁을 벌였다. 명당의 에너지를 서로 많이 받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음 여정지는 퇴계종택이다. 종택 앞 다리 건너기 전 천 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나오는 계상서당이 있다. 23세의 율곡 이이(李珥)가 계상서당을 찾아와 58세인 선생과 도학을 논했다는 곳이다. 우리 연수생들은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어 강세황이 그렸다는 계상서당도와 지금의 경치를 맞추어 보느라고 여념이 없다. 어느 한 분이 그림과 다르다고 하기에 도로가 없다고 생각하면 같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정말 맞네’라고 하면서 즐거워한다.

 

 계상서당

 

이어 종택에 들어갔다. 종택 마당에서 15대 종손인 이동은 옹(1909년생)이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 나이로 백한 살이다. 백 세가 넘은 연세인데도 원장님이 명함을 주니 ‘영산대학교에서 오셨네’라고 하시면서 명함에 있는 글자를 안경 없이 또렷이 읽으셨다. 얼굴의 피부결도 아주 곱다. 경(敬)의 실천과 위기지학을 한 삶이어서 그런지 참으로 청정하시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종손님과 원장님

 

종택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선생의 묘소에 갔다. 선생은 직접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는 묘지명을 써놓고 돌아가셨다. 묘소는 이번이 처음이다. 늘 시간이 없어 지나치기만 했다.

 

오늘 같이 맑은 날은 풍수 보기에는 너무 좋다. 묘소로 오르는 초입에는 경사가 심하다. 그러나 묘소에 올라서니 방위가 완벽하다. 계상서당 뒤쪽 산에서부터 이어져온 북현무의 맥이 이곳에서 혈이 멈춘 형국이다. 청룡맥과 백호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주작도 아주 훌륭하다고 느껴진다. 선생이 영면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오늘 우리들의 숙소는 수졸당종택이다. 수졸당종택은 선생의 셋째손자인 동암의 장손들이 대대로 이어져온 집이다. 상계파인 퇴계종택의 종손도 동암의 둘째아들이 양자로 들어가서 대대로 대를 이어온 것이다. 이점이 하계파의 자존심인지를 마침 마중 나온 수졸당 종손님에게 질문을 하니, 단호하게 아니라고 한다. 상계에 있는 종택을 깍듯이 예우한다고 하신다.

 

 수졸당 종택

 

수졸당에서도 불천위 제사를 지내느냐고 물으니 지낸다고 하신다. 종택 안마루에 수박을 썰어 놓았으니 먹고 가라시기에 안마당에 들어서니 종부가 다정스럽게 맞이한다. 종부들의 얼굴은 대개가 한결 같다. 농암종택의 종부도 그랬고 다른 종가의 종부들도 한결같이 온화한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 겸손과 부덕을 지닌 귀상이다. 귀상으로 태어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종부로서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이러한 관상을 만들어 내는 것일 게다.

 

저녁식사는 안동 시내에 있는 유명한 닭찜을 먹으러 갔다. 닭찜을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보름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있다. 안동호에 비친 보름달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도시생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광이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다시 수졸당 종택에 도착했다. 우리 연수생들은 종택 마루에 빙 둘러 앉아 수박을 비롯한 과일과 맥주와 소주로 전을 벌렸다. 반장을 기점으로 시계방향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나씩은 반드시 하도록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하나씩마치니 시계는 이미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공식적은 모임은 파하고 삼삼오오로 흩어져 시골의 고요한 풍광과 자유를 만끽하였다. 달밤의 산책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너른 들판을 배경으로 보름달이 절정을 이룬다. 전기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밤에 보름달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옆 사람 얼굴의 윤곽선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낙동강 너럭바위

 

토계를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낙동강 본류와 합류가 된다. 낙동강 백사장에 있는 화강암으로 된 너럭바위 위에 일행들이 모였다. 모두들 너무 행복해 한다. 성악이 전공인 선생님과 성악이 취미인 선생님께서 가곡을 부르면서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각자의 장기들이 다 나온다. 악기가 없어도 잘도 놀고 있다. 철들고 이렇게 재미있는 날은 기억 속에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다. 그러나 삶에는 항상 항룡유회(亢龍有悔)의 법칙이 적용된다.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도 극에 달하지 않게 비룡(飛龍)에서 멈추어야지 항룡까지 가면 후회만 있을 뿐인 것이다. 아쉬움을 남기면서 숙소인 수졸당을 향했다. 수졸당에 돌아오니 아직도 흥이 남아있는 몇 분은 이야기꽃을 더 피우고는 일정을 마감했다.

 

8월 6일 아침이다. 수졸당 안집에서 먹는 식사는 종택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가의 가정식이다. 종부의 맛깔스런 식사는 삼십여 년 동안 아침을 먹지 않고 살아온 내 입맛에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도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내 어릴 적 먹어 보았던 바로 그 맛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어릴 적 맛있게 먹었던 그 맛을 평생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이육사문학관이 있는 원촌이다. 먼저 육사의 생가터부터 보았다. 이어 내 초등학교 동창의 처갓집인 목재고택을 방문했다.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친구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직장에 바쁜 일이 갑자기 생겨 오지 못했다. 일 년 만의 방문이다. 원촌은 시인이 탄생할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다. 육사의 따님인 이옥비 여사를 만났다. 신문에서 본 적이 있지만 실제 혈육을 대하니 또 새로운 감정들이다.

 

 이육사 문학관과 이옥비 여사

 

따님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고는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병산서원은 7년 만이다. 그런데 병산서원 가는 길은 아직도 그 당시의 비포장도로 그대로다. 너무 반가웠다. 부시대통령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반드시 포장도로로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옛날 비포장 그대로다. 어떠한 이유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자연 그대로 비포장으로 둔 것에 대하여 박수를 보낸다.

병산서원은 역시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서원이다. 만대루의 호쾌함은 어느 서원에서도 느낄 수 없다. 우리 연수생들은 만대루에서 과거시험을 보았다. 시제는 ‘영남문화와 퇴계 이황, 도산서당, 병산서원답사’가 들어가면 된다. 장원에 두 작품이 선정되었다. 시에 대해 무지한 내가 보아도 멋진 작품이다. 방송통신대학교 중문학과 3학년 1학기 과목에 중국명시감상이라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 이 과목을 열심히 하여 내년에는 장원에 한번 도전하고자 하는 다짐도 해 보면서 하회마을에서의 점심식사를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만대루 앞 전경

 

 한글장원

 

 

장원

 

이렇게 좋은 연수를 시켜주신 부남철 원장님과 영산대학교 관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함께한 연수생님들과 이 글에 좋은 동영상을 제공해 주신 권기현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권기현 선생의 동영상

 

마지막으로 연수 전과 후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이상익 교수님이 출제한 ‘퇴계의 이기호발설의 취지와 함의를 논함’의 답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퇴계의 이기호발설의 취지와 함의를 논함.

Ⅰ. 사단 칠정

1. 사단

사단(四端)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 있는 도덕적 감정이고, 칠정(七情)은 욕망을 포함한 일반 감정이다. 사단은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본 맹자의 성선설에 근거를 한 다음의 네 가지다.

가. 남의 어려움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나.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다.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라.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

측은지심이 발전하면 인(仁)이 되고, 수오지심이 발전하면 의(義)가 되고, 사양지심이 발전하면 예(禮)가 되며, 시비지심이 발전하면 지(智)가 된다고 했다. 결국 사단(四端)은 인의예지(仁義禮智)다.

2. 칠정

칠정(七情)은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가. 희(喜, 기쁨), 나. 노(怒, 노함), 다. 애(哀, 슬픔), 라. 락(樂, 즐거움), 마. 애(愛, 사랑), 바. 오(惡, 미움), 바. 욕(慾, 욕심)이다.

결국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고, 칠정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다.

 

Ⅱ. 이기호발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사단과 칠정을 理發과 氣發로 나누는 것이다. 즉 四端은 理가 발해서 氣가 따르는 것(理發而氣隨之)이고 七情은 氣가 發함에 理가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이다.

호발설의 취지는 둘로 요약할 수 있다.

 

1. 이(理)와 기(氣)의 분개설(分開說)이다.

사단칠정론은 인간의 心, 性, 情에 관한 논의다. 즉 인간의 자아에 관한 논의인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자아를 理와 氣로 나누었다는 뜻이다.

심(心)의 차원에서는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구분하였고, 성(性)의 차원에서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었고, 정(情)의 차원에서는 四端과 七情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이(理)의 영역을 추종하면 군자(君子)가 되고, 기(氣)의 영역을 추종하면 소인(小人)이 된다.

2. 이(理)와 기(氣)의 능발성(能發性)이다.

이(理)에도 능동성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理와 氣의 능발성은 이(理)는 더 이상 기(氣)에 의존하지 않고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퇴계의 敬 사상의 핵심인 理와 氣의 승부에 있어서 이(理)의 승리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理의 승리는 자아(自我)와 천리(天理)의 합일이다. 퇴계의 敬사상은 근원적으로 성숙된 자아의 화락(和樂)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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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se / Westlife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Some say love it is a hunger,

An endless aching need.

I say love it is a flower

and you it's only seed.

It's the heart, afraid of breaking

that never learns to dance.

It's the dream afraid of waking

that never takes the chance.

It's the one who won't be taken

who cannot seem to give.

and the soul afraid of dying

that never learns to live.

When the night has been too lonely

and the road has been too long

and you think that love is only

for the lucky and the strong,

Just remember in the winter

far beneath the bitter snows

Lies the seed that with the sun's love

in the spring becomes the r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