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남부교육청 교감단 연수 1-수덕사
올 여름방학은 연수 복을 많이 받았다. 안동답사를 다녀오자마자 또 부산남부교육청 교감단 연수다.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2박 3일간이다. 연수의 주제는 ‘교육활동 선진학교 현장방문 및 문화유산 답사’이다. 답사는 부산-천안북중학교-예산수덕사-남연군묘소-덕산온천-해미읍성-제부도-서울공항중학교-수안보-단양팔경-소수서원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제일 먼저 천안 북중학교에 도착했다. 북중학교는 지금 교육현장에서 뜨거운 감자 중 하나인 방과후 학교를 전국에서 모범적으로 잘 운영하고 있는 학교이다. 북중학교의 방과후학교 운영을 견학하고 느낀 것은 좋은 학교를 만드는 데에는 관리자의 깨어있는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방과후교육부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천안북중학교
다음 일정은 수덕사 답사다. 그냥 차만 타고 가면 심심하다. 자진해서 사회를 맡았다. 차안에서 사회를 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중 하나다. 수준을 어디에 맞추어야 할지가 제일 문제가 된다. 너무 형이상학적이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형이하학적이어도 안된다.
나름대로 형이하학에서 시작하여 형이상학으로 갈 수 있도록 방침을 세웠다. 나는 사회를 볼 때 내 전공을 살려서 사람들의 관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이야기하여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 맞추는 게임을 자주 한다. 이 게임은 다른 사람들의 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궁금하여 대부분 잠도 자지 않고 귀를 기울인다. 해당되는 관상에 당첨된 분은 평소 하고 싶은 이야기나 좋아하는 노래실력을 뽐내거나 하면서 가는 여정이다. 이 게임은 구성원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면서 가기 때문에 처음의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고 금세 친해지는 계기가 된다. 모든 분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어 갔다.
차는 드디어 수덕사에 도착했다. 날씨는 맑으나 너무 덥다. 그런데도 모두들 표정이 맑다.
수덕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이다. 백제 법왕 원년(599) 지명법사에 의하여 창건되고, 대웅전은 그 이듬해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연혁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대웅전은 1936년에서 1940년에 걸친 중수 시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墨書)에 의하여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되었음이 밝혀져 올해로 칠백한 살이 되는 고려 시대의 건축물이다.
수덕사는 조선시대 말에 경허선사가 선풍을 일으킨 뒤 1898년 그의 제자인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현재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수덕사는 경허선사, 만공선사, 일엽스님으로 인해 유명해진 사찰이다.
만공선사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총독이 일본불교와 조선불교가 합쳐야한다고 말하자 “淸淨本然(청정본연)하거늘 어찌 문득 山河大地(산하대지)가 나왔는가!” 라고 하면서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한 일화로 유명하다.
또한 만공선사는 입적할 때 저녁을 맛있게 먹고는 거울을 보면서 혼자말로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 년 동안 동고동락해왔지만 오늘은 마지막일세. 그동안 수고 했네”하고는 요를 펴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구전되어 오고 있는 만공선사와 동자승과의 딱따구리 노래는 들을 때마다 미소짓게 만든다.
딱따구리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뒷동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어진 구멍도 못 뚫는구나”
어린 동자승이 마을에 내려가 뜻도 모르면서 이 노래를 배워 왔다. 만공스님 앞에서 노래를 배워 왔다고 자랑을 하면서 부른다. 스님의 방 안에는 마침 대궐에서 심부름 차 들린 상궁나인들이 가득 있었다. 동자승의 노래를 듣고 난 상궁나인들은 배를 쥐고 까르르 웃느라고 난리가 났다.
만공스님 왈
"참 좋은 노래로구나. 진리라는 것은 이미 뚫려 있는 것인데 우리 절의 멍텅구리들은 이미 뚫려 있는 진리도 알지 못하는구나”
만공스님을 생각하면서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 입구에는 수덕여관이 있다. 이곳에는 고암 이응로(1904-1989)화백이 새긴 암각화가 유명하다.
이응로 화백이 새긴 암각화
한국화를 세계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은 분이다. 그는 당시 유명한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으로 1948년부터 홍익대학교 주임교수였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주목받았고 이해부터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묵화, 서예 등을 가르쳐 삼천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 1967년에는 6·25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 주선으로 석방,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특히 1957년 파리로 건너갈 때는 21세 연하인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여사와 함께였다.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서 석방되어 잠시 이곳 수덕여관에서 암각화를 만들고 있을 때 본부인 박귀희여사께서
“당신 너무 고생하시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쉬지 않고 왜 그 어려운 돌에 글자를 새긴다고 그러세요. 좀 쉬세요”라고 하자 고암께서 “당신은 모를 거야 삼라만상의 성쇠를 만들고 있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암각화가 삼라만상의 성쇠를 나타낸 추상화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옥고를 치를 때 지극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한 본처를 버리고 다시 파리로 갔다. 이 부분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이 많았다. 명리공부를 하는 나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우선 궁합이 맞지 않았다고 본다. 만약에 같이 살았다면 두 분 모두 천수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화백은 86세, 박여사는 92세의 일기로 타계를 했다. 세인들의 잣대로만 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닌가.
수덕사를 오르니 전에는 없던 박물관이 완공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수덕사대웅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목조건물은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영주 부석사무량수전과 조사당, 강릉 객사문이다. 그리고 북한에 황해도 성불사 응진전과 심원사 보광전이 남아 있다고 한다. 남북한 합해 총 7채가 남아 있는 셈이다.
문화재청 자료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은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앞서 말한 대로 수덕사는 1308년에 건립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건되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봉정사 극락전은 1363년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비록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옛날에는 보통 백 년 내지 백오십 년 만에 건물을 보수하였다하니 중건 연대가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선 데다 건축양식이 고식(古式)이어서 건축사가들은 이 건물을 우리나라 최고령 목조건축으로 추정하여 건립 연대를 1200년대 초까지 올려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
지금껏 절집 건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이 대표선수라고 생각했는데 수덕사 대웅전을 다시 보니 무량수전 못지않다. 측면에서 본 대웅전은 맛배지붕의 선, 지붕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배흘림기둥이 자연스럽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웅전 기둥에 기대어 수덕사의 풍수를 보니 청룡맥과 백호맥이 아주 우수하다. 그러나 남주작이 조금 떨어지는 감이 있다. 대신에 앞이 툭 트이어 호방함을 준다. 그래서 경허선사나 만공선사같이 스케일이 큰 분이 나오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정경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가의 음식점에는 먼저 내려온 분들이 동동주판을 벌이고 있다. 여행의 멋 중 하나가 그 지방에서만 나는 토속주에 토속안주를 먹는 즐거움이다. 몇 분은 제법 얼큰하게 되어 아주 기분 좋은 혈색과 웃음을 보이고 있다.
수덕사를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인지 송춘희가 불러 히트한 ‘수덕사의 여승’을 멋진 가락으로 한 분이 불렀다. 이 노래 때문에 수덕사가 비구니절이라고 생각하는데 수덕사 말사에 비구니절은 한 곳뿐이다. 김일엽스님(1896-1971)이 살았던 견성암이다. 지금의 환희대가 견성암이 있던 곳이다. 일엽스님 때문에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청춘을 불사르고’, ‘어느 수도인의 회상’ 등을 쓴 근대문학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불리는 김일엽은 춘원 이광수와의 염문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녀는 오랫동안 폐쇄된 규범 속에 묻혀 있어야만 했던 여성들이 사회활동과 문학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선구자적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1928년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였다.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렸다고 한다. 목사의 딸이었기에 기독교 신자였으나 수덕사에서 불제자로 일생을 마쳤다. 그런데 일엽스님에게는 일본의 명문가의 자제였던 오오타세이죠(太田淸藏)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이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일당 김태신 스님이다. 도서출판 삼화에서 일당 김태신 스님의 자전적 기록인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에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한다.
김일엽 스님을 이야기하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분이 한 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인 나혜석여사다. 이 둘은 친한 친구 사이였다.
나혜석(1896-1948)은 구한말에 군수를 지낸 수원 '나부자집'의 딸로 태어났다. 진명여학교를 나온 뒤 일본 동경여자 미술전문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3·1운동 때 옥고를 치른 뒤 1921년에 경성일보사의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였다. 일제시대 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과 입선을 했고, 최고 권위를 갖고 있던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도 입선했다. 오빠의 친구인 김우영 변호사와 결혼했다. 결혼한 다음해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를 열어 화가와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927년 일본 정부의 외교관 신분이었던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여행에 올라 파리에서 8개월 간 머물면서 ‘자화상’, ‘스페인 해수욕장’, ‘불란서 마을 풍경’ 등 야수파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비극은 바로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마침 그때 파리에 와 있던 최린과 염문을 뿌린 것이다. 남편 김우영은 이러한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모든 언론은 나혜석을 ‘화냥년’으로 취급하였고 어느 누구도 나혜석의 편에 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일엽스님을 찾아와 스님이 되겠다고 했다.
일엽스님이 만공스님에게 이 뜻을 전하자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면서 예술활동을 했다. 이 당시에 엄마를 찾아서 수덕사에 온 김태신에게 "나를 엄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일엽스님을 보고, “어쩌면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나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을 만지게 해주었다고 한다.
암각화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 때 자주 찾아와서 한 수 배운 사람이 이응로 화백이었다. 이응로화백의 고향이 홍성이라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이화백에게 파리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사람도 나혜석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고로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이응로 화백이 수덕여관을 사들여 부인인 박귀옥여사에게 운영을 맡겼다.
수덕여관을 나온 나혜석은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세계여행을 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와 서양화를 그린 최초의 여류 천재 화가가 단 한 번의 외도로 모든 것을 잃었다. 참으로 안타깝다. 사주로 풀이해 보면 30년 대운이 다 지나버린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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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역사가 되어버린 비련의 사랑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버스는 또 다른 역사의 현장을 찾아 흥선 대흥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소로 향한다.
수덕사의 여승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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