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교육청 교감단 연수 3-단양팔경, 소수서원
12일 아침이다. 어제는 덕산온천 오늘아침은 수안보 온천이다. 온천탕에서 먼저 온 일행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다들 표정이 밝아 보인다. 수안보는 몇 년 전에 수안보 온천 마라톤 풀코스를 달려본 경험이 있다.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달린 기억이 새롭다. 마라톤 코스가 너무 좋았었다. 그때 다른 곳은 몰라도 수안보 마라톤만은 매년 참가하기로 결심하였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삶이 그리 여의치 않아 마음과는 달리 참가하지 못했다. 더구나 지금은 풀코스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연습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다잡고 착실히 연습을 하여 매년 풀코스를 봄가을로 두 번은 완주할 수 있도록 견실하게 살기로 결심해 본다.
덕산온천은 pH 8.7, 수온 45℃로 류머티즘, 부인병, 소화기질병, 각종 피부병 등에 효과가 크다. 반면에 수안보 온천은 pH 8.6, 수온 53℃로 피부병, 위장병, 부인병, 신경통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온천욕이 좋다. 온천욕은 일반 목욕탕과는 기분이 다르다.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온천 투어를 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오늘은 충주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단양팔경 중 구담봉과 옥순봉을 유람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답사하고 부산으로 향하면 된다. 아침 뉴스에 중부지방에 물난리가 났다고 야단이다. 우리가 있는 이곳도 150mm까지 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빗방울은 아주 약해서 다행이다. 충주호의 장회나루 선착장에 도착하니 안개와 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있다.
장회나루 입구
유람선에 오르니 대만에서 온 가족 여행단들이 승선하고 있다. 어설픈 중국어 실력으로 몇 마디 말을 붙여 보았다. 서투른 나의 말을 알아듣고는 미소까지 지어준다. 예쁘게 생긴 아가씨에게 你漂亮(ni piaoliang, 너 예쁘다)라고 말하자. 상냥하게 웃으면서 씨에씨에 니(謝謝你, 감사합니다)라고 답을 한다. 난생 처음으로 한 중국인과의 중국어 대화다. 방통대 중문과에 한 학기를 다닌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유람선 선장은 단양팔경의 유래와 아름다움에 대하여 안내 방송을 한다. 그 중 내 귀에 스치는 내용이 있었다. 퇴계선생의 여인인 기생 두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향의 무덤이 바로 건너에 보이는 저 무덤이라고 한다. 그때서야 두향의 무덤이 여기 이쯤 있다는 것을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퇴계선생과 두향이의 러브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퇴계선생이 단양 군수로 부임하자. 기생인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다. 선생도 당시 둘째 부인과 둘째 아들을 잃었던 관계로 외로웠다. 두향은 빼어난 미모뿐 아니라 시(詩), 서(書),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시화와 음률을 논하고, 산수를 거닐며 인생을 즐겼다. 이때 선생은 48세, 두향은 18세 였다니....
그러나 두 사람의 깊은 사랑도 9개월 만에 끝이 나게 된다. 퇴계 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은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관기를 그만두고 오로지 선생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었던 강변을 거닐면서 즐거웠던 시간들을 추억하며 외롭게 살아갔다.
퇴계 선생에게는 단양을 떠날 때 두향이에게 받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퇴계 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고 한다. 선생은 그 이후로는 두향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다. 선생은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도산서당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선생의 빈소를 차리고 3년상을 지냈다. 3년상을 마치고는 퇴계와 함께 노닐었던 강선대 아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진하였다.
저 건너 어디쯤이 두향의 묘소
두향의 묘소는 강선대(降仙臺)에서 30여 미터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충주댐이 완공되면 물에 잠길 것을 염려하여 인근 마을 유지들과 퇴계 후손 집안에서 의견을 모아, 강선대로부터 좌측으로 200여 미터, 위로 40여 미터 떨어진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그때 이장하면서 비석에다 ‘杜香之墓’라고 썼다고 한다. 이 ‘杜香之墓’라는 글씨는 올해 101세인 퇴계선생의 현 종손 이동은 옹이 직접 썼다고 한다. 두향의 존재가 선생의 집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는 450여 년이란 세월이 걸린 셈이다.
유람선은 구담봉을 지나가고 있다. 구담봉은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의 바위의 형태가 거북을 닮았다 하여 구봉이고, 물속의 바위에 거북무늬가 있다하여 구담이라한다.”하여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선생이 지은 이름이다. 구담봉은 충주호 유람선 관광의 백미로 꼽힌다. 오히려 옥순봉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된다. 퇴계선생은 구담봉의 장관을 보고 이렇게 읊었다.
碧水丹山界 (벽수단산계) 푸른 물 단양과 경계를 이루고
淸風明月樓 (청풍명월루) 맑은 바람은 명월루에 이는데
仙人不可待 (선인불가대) 신선은 기다려 주지를 않아
怊悵獨歸舟 (초창독귀주) 슬퍼하며 홀로 배 타고 돌아오네
구담봉
유람선은 다시 옥순봉으로 다가가고 있다. “옥순봉은 희고 푸른 바위들이 대나무 순 모양으로 힘차게 치솟아 절개 있는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퇴계선생이 지은 이름으로 여러 개의 기이한 봉들은 조화의 묘를 다하였으며 산세의 기복과 굴곡이 자유분방하니 소금강이란 별칭이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옥순봉은 원래 청풍에 속해 있었는데 조선 명종 때에 관기 두향이가 단양 군수로 부임하는 퇴계 이황 선생에게 옥순봉을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퇴계 선생이 청풍부사에게 청을 하였으나 청풍부사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퇴계선생이 석벽에 丹丘洞門(단구동문)이라는 글을 암각하여 이곳을 단양의 관문이며 군경계로 정했다고 한다. 뒤에 청풍부사가 남의 땅에 군계(郡界)를 정한 자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옥순봉에 가보니 글씨가 힘차고 살아 있어 누구의 글씨냐고 묻자 퇴계의 글씨라고 하니 감탄하면서 옥순봉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단원 김홍도는 1796년 옥순봉도(玉筍峯圖)를 남겼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중의 한 폭으로 현재 보물 제7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구담봉과 옥순봉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구담(구담봉)은 청풍에 있다. 두 언덕에 석벽이 높이 솟아 해를 가리고, 강물은 그 사이로 쏟아져 흐르며, 문처럼 겹겹이 서로 막고 있다. 좌우에는 강선대와 채운봉과 옥순봉이 있다. 강선대는 강 옆에 따로 서 있는 평평한 높은 바위다. 그 위는 백 명이 앉을 만큼 넓으며, 만 길이나 되는 두 봉우리는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이보다 더 높고 곧게 솟은 옥순봉은 마치 거인이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 같다. 무자년 여름에 내가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단양읍 앞에서 배를 타고 옥순봉을 지나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地上形高端士立 (지상형고단사립, 땅위에 높이 솟은 것은 단정히 서 있는 선비요)
波心影動老龍飜 (파심영동노룡번, 물 가운데 움직이는 그림자는 꿈틀거리는 늙은 용일세)
又曰 (우왈, 또 말하기를)
精神秀發江山色 (정신수발강산색, 정신은 빼어나 강산의 경치가 되고)
氣勢高撑宇宙形 (기세고탱우주형, 기세는 높아서 우주의 형상이 되었네)”
옥순봉
이중환이 살았던 시절에는 단양읍에서 서울까지 배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댐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강이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다.
유람선이 옥순봉을 지나자 유람선 선장은 선객들을 대상으로 노래를 시키고 있다. 특히 대만에서 온 여행객과 우리 일행에게 노래하기를 권유한다. 우리 일행과 대만관광객 일행이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놀았다. 국제화시대다. 이젠 어딜 가나 외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유람선은 옥순봉을 돌아 출발지인 장회나루에 다시 도착하였다.
이제 마지막 남은 곳은 소수서원이다. 주변에서 첫날처럼 다시 사회를 보라고 권한다. 오늘로 함께 연수한 지 삼일째가 되다 보니 이젠 래포가 아주 많이 형성되었다. 사회 보기가 한결 부드럽다. 한창 화기애애해지는데 버스는 소수서원에 닿았다.
소수서원 앞으로 죽계천이 흐르고 있다. 죽계천은 멀리 소백산 비로봉으로 부터 발원한 계곡으로 단양팔경처럼 빼어난 맛은 없으나 천변의 바위와 소나무 숲이 적당하게 어우러져 품위가 있어 편안함을 준다. 이곳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곳이다. 소수서원 입구에서 죽계천 건너 바위를 바라보면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바위가 있다. 경자는 주세붕선생의 글씨고 백운동은 퇴계선생의 글씨다.
경자바위
‘경(敬)’은 유교의 근본정신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리글자이다. 마음을 오직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또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하는 거경궁리(居敬窮理), 지극한 선의 경지(止於至善)를 말한다. 理로서 天과 人間이 합일하는 천인합일의 인간완성이다.
‘경자 바위’는 단종 복위 운동 때 실패하여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죽계천 백운담에 수장시킨 후로는 밤마다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여 유생들이 밤에 나가는 것을 꺼리자, 주세봉선생이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경(敬)’자 위에 붉은 칠을 하여 제를 드리니 그때부터 울음이 그쳤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때 흘린 의사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이곳에서 약 7㎞ 떨어진 동네 앞까지 가서 멎었다고 해서 지금도 동네 이름을 ‘피끝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소수서원 정문의 왼쪽에는 수려한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서 있다. 그리고 서원의 담장을 돌아가며 울창한 송림이 조성되어 있다. 학자수라 불린 적송숲이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라 칭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학자수로 불리는 나무는 회화나무나 은행나무이다. 은행나무는 행단(杏亶)이라 하여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친 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회화나무는 중국 주나라 때 삼공(三公)들이 조정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각자 회화나무 그늘 아래 앉아 서로 마주보면서 정사를 의논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나무를 학자수로 정한 것은 좀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학당이 있다. 강학공간인 강학당에는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고, 건물 안쪽은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백운동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다음해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소수서원의 소수(紹修)는 旣廢之學 紹而修之(기폐지학 소이수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이다. 명종은 직접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소수서원에는 국보 1점과 보물 5점이 있다.
◆ 국보
1.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 보물
1.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
2. 대성지성 문선왕전 좌도(보물 제485호)
3. 주세붕 초상(보물 제717호)
4. 소수서원 문성공묘(보물 제1402호)
5. 소수서원 강학당(보물 제 1403호)
소수서원은 우리 어릴 적에 많이 듣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어릴 때 ‘내가 어떻게 태어났어요?’하고 물으면 어른들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출생 민담의 근원지가 소수서원이라고 한다. 소수서원 앞에는 청다리라는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옛날 이 청다리 근방에는 서원에 공부하러 온 유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종들이 많이 살았다. 유생들이 종이나 마을처녀와 정분이 나 아이를 낳게 되면 일부러 다리 밑에 가져다 두고 우연히 지나다 그 아이를 주운 것처럼 해서 기르게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유교국가라고 하지만 피 끓는 청춘의 욕정을 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이를 무작정 버린 것이 아니라 기지를 발휘해서 현명하게 잘 처리한 대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행 중 일부는 박물관 관람을 하고, 전에 와 본 분들은 선비촌 음식점에서 토속 동동주와 파전, 녹두전, 도토리묵을 안주로 여행의 즐거움을 더했다. 부석사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내처 달려 부산에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넘었다. 2박 3일의 연수가 무사히 끝이 났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누구와 함께 함으로써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때문이다. 남부교육청 소속 중학교 교감으로 만난 것만으로도 큰 인연인데 더불어 2박 3일을 함께 함으로써 그 인연을 더 깊게 한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연수를 받아왔지만 그 어떤 연수보다도 실질적이고 효과적이고 인간적인 연수였다.
이렇게 좋은 연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과 봉사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이 연수를 주선하고 뒷바라지한 회장님과 총무님의 노고를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가난한 농부 페르귄트가 살고 있었고
같은 동네에 아름다운 소녀 <솔베이지>가 있었다.
둘은 사랑했고 결혼을 약속했지만
가난한 농부였던 페르귄트는
돈을 벌기위해 외국으로 떠난다.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국경에서 산적을 만나
그동안 번 돈은 다 빼앗기고
고생 끝에 겨우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고향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살던 초가집에서는
사랑하는 연인 솔베이지가 어머니 대신,
백발노인이 되어버린 페르귄트를 맞는다.
병들고 지친 페르귄트는
연인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는다.
솔베이지는 꿈에도 그리던 연인 페르귄트를 안고
노래를 부르다가
그녀도 페르귄트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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