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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남부교육청 교감단 연수 2-남연군묘소, 해미읍성, 공항중학교

by 황교장 2009. 8. 22.

부산남부교육청 교감단 연수 2-남연군묘소, 해미읍성, 공항중학교

 

남연군 묘소는 처음에는 여정에 없었지만 내가 주장을 하여 들르기로 한 곳이다. 숙소인 덕산온천 부근이고 우리 일행 중 가 본 적이 있는 분이 한 분도 없었기에 한번쯤은 꼭 들러보아야 할 장소라고 생각하여 내가 추천하여 가기로 하였다.

남연군 묘소가 유명한 것은 국사시간에 배운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독일인 오페르트가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남연군의 유골을 확보하여 통상개방 협상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굴하다 실패한 일이다. 이 사건은 대원군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한 계기가 되었다.

남연군은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1623-49 재위)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7대손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다. 순수 혈통으로만 보면 왕권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에게 입양된 뒤 남연군에 봉해졌다. 즉 정조의 조카이자 순조와는 사촌간인 셈이다.

풍수지리설을 신봉했던 대원군은 당대의 최고 풍수가인 정만인에게서 충청도 덕산땅에 만대를 거쳐 영화를 누릴 곳(萬代榮華之地)과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는데, 아버지 남연군 묘를 그 둘 중 한 곳에 이장할 것을 권유받았다고 한다. 대원군은 당연히 二代天子之地에 부친의 묘를 이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묘를 쓸 명당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봉분을 모셔야 할 자리에는 금탑이 있었다.

대원군은 꾀를 하나 내었다. 우선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후손에게서 절 뒤에 임시 묘자리를 빌렸다. 그 후 여러 가지 술수를 써서 가야사의 중들을 내쫓고, 절을 불태워 폐사시켰다.

시신을 매장할 곳은 탑이 있는 금탑 자리였다. 매장을 위해서 금탑을 쓰러뜨리고 나니 그 속에 백자 두 개와 단다(團茶) 두 병, 사리구슬 세 알이 있었다고 한다. 사리구슬은 머리통만 하여 밝게 비쳐 물에 담겨도 푸른 기운의 빛이 물을 뚫고 번쩍이며 빛이 났다고 한다.

정만인은 매장 후에 철근 수만 근을 녹여서 붓고, 그 위에 석회를 비벼서 다져 놓으라고 했다고 하니 이미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예견한 명풍수가인 셈이다.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18년 후 대원군이 정권을 잡았다. 그 후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등극하여 명당설이 맞아 들어간 셈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공식기록에 황제 칭호를 쓴 분이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다. 이 두 분의 능도 황제의 능으로 조성되어 있다. 비록 조선이 망했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닌가.

 

 남연군 묘소

 

남연군 묘소에 올라 풍수를 보았다. 주산은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다는 석문봉이다. 좌청룡은 옥양봉, 만경봉이 덕산을 거쳐 30리나 뻗쳐 있다. 우백호는 가사봉, 가엽봉, 원호봉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정일품 이상 벼슬한 사람의 묘에만 세울 수 있다는 장명등 창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그 안에 보이는 평야를 지나 멀리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봉수산이 안산이다.

주산인 석문봉에서 내려온 기운은 잘 뻗어서 이곳에서 혈이 형성된다. 혹자는 이곳까지의 지세가 너무 짧아서 2대 황제로 끝이 났다고 한다. 물도 양쪽 계곡물이 만나는 합수 지점 위가 가야사 절터다. 풍수가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명당터가 바로 이곳이라고 하는 분들도 많다. 아쉽게도 안산이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이 결점으로 보인다.

남연군 묘소르 내려와 숙소인 덕산온천에 여장을 풀었다. 덕산온천은 온천수로는 유일하게 충남문화재 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선생의 저서인 ‘충보’에 의하면

"들판 한가운데 학 한 마리가 온 종일 날 줄을 모르고 한 자리에 서 있기에 이를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가까이 가 본즉 날개와 다리에 상처를 입은 학이 논물을 열심히 찍어 바르고 있었다. 얼마 후 상처가 깨끗이 아문 학은 유유히 하늘 높이 날아갔다고 한다. 학이 머물었던 곳에 매끄럽고 따뜻한 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는데 인근 주민들이 그 물을 상처 난 곳에 발라보니 신기하게도 상처가 아물기에 이곳을 가리켜 온천골이라 하고 이 물을 약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된 역사를 가진 덕산온천이지만 부곡이나 백암처럼 개발이 잘 되어 있지 않고 논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주변을 산책하니 오랜만에 걸어보는 시골의 논밭이다. 농촌의 정취가 그대로 살아 있다. 시골에서 태어나서 시골에서 자란 나로서는 푸근한 고향마을에 온 느낌이었다.

11일 아침이다. 약수인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기분이 상큼하다.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하루를 즐기려면 목욕을 하고, 한 달을 즐기려면 장가를 가고, 1년을 즐기려면 집을 사고, 평생을 즐기려면 예술을 하라”는 고등학교 때 클래식 기타리스트이신 국사선생님께서 자주 들려주신 말씀이다. 하루를 즐기는 데에는 온천욕만한 것도 없을 것 같다.

 

목욕을 하고 밖을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다.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할 때에는 더욱더 심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다음 여정인 해미읍성은 그냥 차 안에서 감상만 하자고 하니 그 중 한 분이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이유인즉 자신은 천주교신자여서 꼭 들려야 된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들은 해미읍성을 성지로 여긴다고 한다. 해미읍성 주변에 거주하던 천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해미읍성 성문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기에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곳에 옮기고자 축성되었다. 그후 효종 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이곳의 수장은 종2품의 병마절도사였다. 선조 12년(1579)에 이순신 장군이 훈련원봉사로 근무했던 기록도 있다. 그리고 고종 3년(1866) 병인박해 때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의 회화나무에 목매달아 죽게 했다는 비극이 서린 곳이다.

 

 회화나무

 

해미읍성에는 그 당시를 재현한 태형을 집행하는 형틀을 만들어 놓았다. 동심으로 돌아간 두 분은 태형을 집행해 보고 있다. 마침 이때 한 분이 조선시대의 형벌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

 

 동심

 

조선시대에는 태, 장, 도, 유, 사라고 하는 다섯 가지의 형벌이 있었다.

1. 태형(苔刑) :우리나라에서 태형이 보편적으로 시행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인데 조선에서도 이 제도를 답습하였다. 태형은 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벌이다. 매의 재질은 물푸레나무를 사용하였고 없으면 다른 나무를 대신 썼다고 한다. 태형은 가장 가벼운 형벌인데 10대에서 50대까지 5등급이 있다.

2. 장형(杖刑) : 장형은 태형보다 중한 벌로서 60대에서 100대까지 5등급이 있다.

3. 도형(徒刑) : 도형은 오늘날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형 기간 동안 관아에 구금하여 두고 일정한 노역에 종사시키는 자유형의 일종이다.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까지 기간이 다섯 가지로 정해져 있었으며 각각에 장60, 장70, 장80, 장90, 장100대형이 반드시 뒤따랐다.

4. 유형(流刑) : 유형은 중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유는 황무지와 해변의 고을에 보내어 배치시키는 것이며, 도형과 같이 노역을 과하지는 않았다. 유배 보내는 거리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의 세 등급이 있었으며, 각각에 장 100대형을 집행하였다.

5. 사형(死刑) : 사형은 형벌 중에서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대명률의 규정에 의하여 교형(絞刑)과 참형(斬刑)의 2종으로 정하였다. 교형은 신체를 온전한 상태로 두고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며, 참형은 보통 신체에서 머리를 잘라 죽이는 것이다. 능지처사 혹은 능지처참이라 하여 반역자나 대역죄인의 신체와 목을 모두 베어 분리시키고 매장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더 가혹한 사형 집행 방식이었다. 또한 효수라 하여 참형에 처한 후 그 머리를 매달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시신을 가져와 지금의 서울 양화대교 근처에서 능지처참한 뒤 효수한 것이 그 예이다.

 

해미읍성을 떠나 차는 제부도로 향한다. 제부도는 처음 가는 곳이다. 늘 처음 가는 곳은 설렘이 따른다. 비가 많이도 온다. 총무께서 ‘연수자료’와 ‘미리 알아보는 퀴즈문제’를 준비했다. 이 중에 제부도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다음 중 제부도 안에 있는 것은?

1. 은행 2. 병원 3. 주유소 4. 카센터 5. 119구조대

다음 중 제부도의 특산물이 아닌 것은?

1. 바지락 2. 백굴 3. 세발낙지 4. 포도 5. 김

이 중 정답은 119구조대와 세발낙지다.

 

 제부도

 

제부도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리에 딸린 섬이다. 하루에 2번 바닷길이 열려 '모세의 기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제부도 입구에서 점심을 먹었다. 풍부한 해산물이 많이 나와서 맛있게 먹었다. 제부도는 비가 오는 관계로 버스를 타고 일주를 했다. 비 내리는 차창에 비친 제부도는 부산의 바닷가와는 달리 갯벌이 멀리까지 나 있다. 이곳은 서울과 거리가 가까워서 서울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다음의 여정은 서울공항중학교다. 이번 연수에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가 공항중학교이다. 역시 서울은 서울이다. 평소에도 차가 많이 막히지만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더욱더 막힌다. 예정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 반이나 늦었다.

공항중학교는 5년 전부터 교과교실제를 운영하고 있다. 교과교실제란 대학교처럼 학생이 교과교실로 이동하면서 수업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교사는 교과교실에 상주하고 있고 학생들이 옮겨 다녀야 되는 제도이다. 내년부터 시범 실시하는 학교가 는다. 앞으로 점차 학교수를 늘려 궁극적으로 교과교실제로 가자는 데 목적이 있다 하겠다.

 

 

 공항중학교

 

이 학교 교무부장은 개인 의견으로는 교과교실제에 찬성을 하지 않는다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다. 이유는 학생들이 고정된 자기 교실과 지정된 좌석이 없어 소속감과 안정감이 떨어져 허전해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교사들은 너무 좋아하는데 이유는 관리자의 눈을 피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서라고 한다. 특히 자질이 부족한 교사는 이것을 악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교사는 교실을 사유화하여 쉬는 시간에 학생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편히 쉬기 위해서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사들의 자질과 수준이 높아진다면 장점도 많다고 한다.

교과교실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지금은 시작단계이니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반대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익숙해진 것이 좋기 때문이다. 과연 교과교실제를 누구를 위해서, 어느 선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시행 중에 끊임없는 연구와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교과교실제인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저녁 숙소인 수안보로 향한다. 버스전용차로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른 차선은 많이 막히는데 버스전용차로는 거침없이 잘도 달린다. 무사히 수안보에 도착하니 저녁 8시 20분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둘쨋날 밤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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