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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공동체의 윈-윈을 위한 하룻밤, 이틀낮

by 황교장 2009. 7. 19.

공동체의 윈-윈을 위한 하룻밤, 이틀낮

 

7월 15일 방학식을 마치고 직원연수를 떠났다. 연수 여정은 부산-남해안고속도로- 섬진강 하동재첩-곡성 기차마을 레일바이크-곡성 태안사-프라자호텔-화엄사-연곡사-쌍계사 앞 참게탕-부산으로 정하고 연수가 시작되었다.

비가 제법 많이 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행은 항상 설렘과 함께 한다. 친목회장인 교무부장의 사회를 시작으로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에 이어서 내가 마이크를 잡고 문화재를 보는 기본적인 관점을 설명을 했다.

이번 연수의 주제는  조직 공동체의 공동선과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를 체험하게 하여 삶의 질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있다고 하겠다.

연수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가 6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16점이 있다.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로는 화엄사각황전(국보 제67호), 화엄사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 화엄사사사자석탑(국보 제35호), 화엄사영산회괘불탱(국보 제301호), 연곡사동부도(국보 제53호), 연곡사북부도(국보 제54호)이다.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는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대안사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대안사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제1349호), 연곡사삼층석탑(보물 제151호), 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 동부도비(보물 제153호), 서부도(보물 제164호), 화엄사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 화엄사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 화엄사대웅전(보물 제299호), 화엄사원통전앞사자탑(보물 제300호),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 화엄사서오층석탑사리장엄구(보물 제1348호), 화엄사대웅전삼신불탱(보물 제1363호)이다.

그리고 천연기념물인 화엄사올벚나무(천연기념물 제38호)가 있다.

 

엄청난 양의 문화재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국사선생님 두 분이 먼저 보물과 국보의 차이점과 문화재가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였다.

문화재보호법 상 문화재에는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 기념물, 그리고 민속자료가 있다. 이중 유형문화재는 형태가 있는 문화재로, 국가가 지정하는 국보와 보물, 그리고 국가가 지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경우 시·도 지정 유형문화재로 크게 나뉜다.

 

그러나 국보와 보물, 시·도 지정 유형문화재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문화재보호법 제5조 ‘보물 및 국보의 지정’에 따르면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그리고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국보와 보물 등에 붙여진 번호는 해당 문화재의 중요성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 번호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보 1호의 교체를 요구하는 사례는 여러 차례 있어 왔다. 감사원은 지난 2005년 “국보 1호를 교체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한 적이 있다.

 

남대문보다 훨씬 중요한 문화재가 많은데 굳이 남대문을 국보 1호로 삼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대문이 불탔음에도 불구하고 복구 후에도 여전히 국보 1호는 그대로 유지한다고 밝혔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 때도 국보 1호 교체 여부가 문화재위원회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문화재위원회는 “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문화재위원회의 자존심은 대단하다. 정치권력에 굴하지 않고 전문성을 꿋꿋이 지킨 것에 박수를 보낸다.

 

출발할 때부터 시작된 비가 많이도 내린다. 문산휴게소에 도착하니 소강상태다. 차는 휴게소에서 10분간 정차를 했다. 휴게소에 있는 관광버스의 승객은 대부분이 방학을 맞은 선생님들이다. 참 오랜만에 보는 다른 학교의 선생님들을 여기에서 많이 만났다. 학교문화 풍토 중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방학하는 날 가는 직원연수일 것이다. 그런데 약간 변화된 형태의 직원연수를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같은 학교에서 온 차가 두 대다. 차량 앞의 안내문에는 당일 연수차량과 1박 2일 차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바쁜 분들에 대해 배려한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그냥 차만 타고 가면 무료하다. 사회자를 선정하여 그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와 숨은 노래실력도 뽐내고 찬조금도 모금하면서 가면 1석3조다. 체육과의 최선생의 사회로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이러한 모습 또한 직원연수의 꽃이다. 서로가 소통하는 시간이다. 분위기를 한창 고조시키는 절정의 순간은 우리 학교 원어민 교사인 세라 선생님의 ‘피아노맨’이라는 노래였다. 가수 이상으로 잘 불렀다. 누군가가 영어발음이 너무 좋다고 치켜 세운다. 그러자 동시에 하동 섬진강 재첩마을에 도착했다.

 

 세라 선생님

 

미리 주문을 해 놓은 재첩정식과 재첩회를 맛있게 먹었다. 다시 출발하여 첫 목적지인 곡성 기차마을에 도착했다. 처음 계획은 섬진강 래프팅을 하기로 했지만 홍수로 인해 래프팅은 할 수 없어 레일바이크로 프로그램이 바뀐 것이다.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갔다. 얼굴 표정들이 다 방실방실이다.

 

 

 레일바이크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목적지인 태안사로 향했다. 태안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다. 구산선문이란 신라 말 선종이 아홉 곳의 사찰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태안사는 신라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창건했고, 고려 태조 24년(941)에 광자대사가 고쳐지었다. 우리나라 길 중에서 태안사로 가는 길만큼 아름다운 길은 드물다. 맑은 계류와 곳곳에 폭포수로 형성된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가면 제일 먼저 맞이해 주는 건물이 능파각이다.

 

 능파각

 

태안사에 남아 있는 옛날 건물로는 능파각과 일주문뿐이다. 그 외에는 한국전쟁 때 다 불타버린 것을 그 이후에 중창한 것이다. 능파각은 다리와 누각과 금강문을 겸한 셈이다. 비가 많이 온 관계로 능파각 밑의 계류는 아름답고 장엄한 폭포수가 되어 있다. 지금의 능파각은 조선 영조 43년(1767)에 복원된 것이다. ‘능파(凌波)’란 ‘물결 위를 건넘’을 뜻하는데, ‘세속의 번뇌를 버리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에 이르는 것이다.

능파각을 지나면 호젓한 오솔길이 나온다. 아직도 남아 있는 태안사의 옛길이다. 비에 젖은 길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느덧 일주문을 만난다. 일주문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동리산은 봉두산(鳳頭山)이라고도 불린다. 절 이름도 ‘대안사(大安寺)’로 불리다가 ‘태안사’로 바뀌었다. 동리(棟裏)는 오동나무숲을 뜻한다. 봉두(鳳頭)는 봉황의 머리이다. 봉황은 오동나무숲이 아니면 앉지 않는다고 하는 전설의 새다.

 

 일주문

 

이곳의 풍수가 바로 봉황이 날개를 안으로 접으면서 둥지로 막 들어오는 형국인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이다. 따라서 태안사는 봉황의 둥지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비봉귀소형의 지세는 생동감과 힘은 있으나 안정감이 부족한 면이 있다. 비봉귀소형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국인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과는 그 기운에 차이가 있다.

봉황포란형은 편안하고 온화한 기운을 띠지만 기세가 약하고, 반면 태안사와 같은 비봉귀소형의 땅은 힘과 생동감이 넘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이 넘치는 기세를 오동나무숲속으로 감싸 안으려는 의도에서 동리산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태안사 전경

 

비봉귀소형의 조건에는 네 가지가 있다. 동쪽으로는 흐르는 물이 있어야 하고, 남쪽에는 연못이, 서쪽에는 큰길이, 북쪽에는 높은 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태안사의 입지는 남쪽에 있어야 할 연못이 없었다. 이를 비보하기 위해서 연못을 팠다고한다.

일주문 오른쪽에 아담한 부도밭이 있다.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의 부도인 광자대사탑과 탑비인 광자대사비를 비롯하여 몇 기의 부도가 있다.

광자대사의 부도는 상륜부인 노반, 앙화, 복발, 보륜, 보개, 보주가 차례대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일주문에서 보면 아래로는 꽤나 넓은 연못이 있다.

 

 태안사 연못

 

연못의 중앙에는 작은 섬이 있고 섬 안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의 석탑이다. 새로 만들어 끼운 부재가 너무 많아 아쉬움을 더한다. 섬으로 건너가는 나무로 만든 다리도 놓았다. 원래 이 탑은 부도밭 옆에 있던 것을 연못을 꾸미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연못을 꾸민 것을 두고 고찰의 무게를 깎았다고 비판하는 사람과 풍수상으로 비봉귀소형국을 이루려면 남쪽에 연못이 있어야 되는데 연못이 없어 비보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사람들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 전에 왔을 때에는 이 연못이 어색하기만 하더니 지금 보니 제법 잘 어울린다. 사람의 마음이 세월의 무게에 따라서 이처럼 바뀌는 것이다.

 

태안사의 중심에는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앞에서 풍수형국을 보니 좌청룡과 남주작은 청룡맥에서 남주작까지 이어져 있어 정말 멋지게 앉았다. 그런데 백호의 기세가 너무 약하다. 백호자리에 연못으로 비보를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대웅전

 

대웅전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천불전이 자리하고 있다. 천불전에서 오른쪽은 선원이 왼쪽으로는 염화실이다. 선원 앞에 높은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오르면 배알문(拜謁門)이란 편액이 달린 작은 문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편액의 ‘拜謁門’이란 글씨는 조선 후기 명필인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1770-1847)의 작품이다.

 

 배알문

 

배알문 안으로 들면 정면에 잘 생긴 부도가 나타난다. 이 부도야말로 태안사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바로 이 부도의 주인공이 태안사를 창건한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이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선생님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내 나름대로 우리나라 부도의 랭킹을 정했다고 소개를 하면서 혜철선사부도는 랭킹 4위, 광자대사 부도는 5위라고 주장을 했다.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그 다음 질문은 당연히 1, 2, 3위는 어느 곳의 무슨 부도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1위 연곡사동부도, 2위 쌍봉사철감선사부도, 3위 연곡사북부도’ 라고 설명을 하면서 내일은 1위와 3위를 볼 수 있으니 4. 5위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잘 관찰해 보라고 하였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은 혜철선사가 돌아가시자 왕으로부터 적인선사(寂忍禪師)란 시호와 조륜청정(照輪淸淨)이란 이름을 하사받아 부도와 부도비를 세운 것이다. 적인선사부도를 보고는 화강암의 재질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없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의문이다. 부도밭에 있는 광자대사부도보다도 근 100여 년이나 더 오래된 것이라고 설명하자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적인선사부도의 특징은 탑의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가 잘 되어 있고 특히 상륜부가 온전히 남아 있다. 상륜부인 앙화, 복발, 보륜, 보주 등이 차례로 잘 남아 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게 한다.

탑 옆의 비문에는 탁본이 남아 있어 그 내용을 보니 적인선사는 신라 원성왕 1년(785)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에 입적하였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도탑도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적인선사의 법명은 혜철(慧徹, 785-861)이고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서당 지장(西堂 智藏, 735-814)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는 서당 지장의 제자가 세 분이 있다. 가지산문을 연 도의국사, 실상산문을 연 홍척국사, 동리산문을 연 적인선사이다. 구산선문을 연 세 분 모두가 6조 혜능의 증손자뻘인 9조 서당지장의 제자다.

 

도의선사는 760-77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추증된다. 도의선사는 784년에 당에 건너가 821년에 귀국했다. 홍척국사는 헌덕왕(809-825)때 당나라에 건너가 826년(흥덕왕 1년)경에 귀국했다. 적인선사는 탑비에서 정확한 생몰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785-861). 따라서 도의선사-홍척국사-적인선사의 순으로 서장 지장의 제자가 된 것으로 추증할 수 있다.

구산선문에서 말하는 선의 출발은 석가모니 부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마하가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자 가섭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바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인 것이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선의 시작으로 본다. 이는 부처님과 제자인 가섭 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법을 전한 즉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전한 것이 선이다. 인도의 스물여덟 번째 존자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그는 중국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달마에서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으로 계승된다. 이를 일러 ‘33 조사’라 한다.

 

6조 혜능부터 본격적인 중국선종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한다. 불립문자란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주장한다.

육조 혜능(638-713)은 선종의 법통을 단순히 이어받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선종의 진정한 창립자로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이르러서야 중국불교는 인도적인 것에서 벗어나 중국의 성격에 맞게 독자적인 영역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7조가 회양(懷讓, 677-744), 8조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가 서당 지장이다. 이 지장의 제자가 도의선사-홍척국사-적인선사이다. 태안사의 적인선사는 중국으로 치면 10조와 동급이다.

이처럼 태안사는 우리나라의 불교계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태안사에 몇 번이나 와도 볼 수 없었던 것이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였다. 태안사에 올 때마다 스님 구경을 하지 못했다. 태안사가 선종사찰이어서 스님들이 참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몇 분의 스님이 보인다. 그 중에 연세가 많아 보이는 스님에게 대바라를 물어보니 자기도 모른다고 하면서 관리하는 관리스님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관리스님도 자세히 모른다고 하면서 유물보관실에 있는가보다 라고만 대답한다.

대바라는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이곳에서 세종과 왕비, 왕세자의 안녕을 빌기 위해 제작했다고 한다. 바라는 사찰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쓰이는 악기의 하나이다. 언제 인연이 닿으면 볼 날도 있기를 기대하면서 태안사를 떠났다. 그런데 몇 분의 선생님들은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입구까지 간다면서 먼저 걸어갔다. 걷다보면 태안사 길이 ‘갖고 놀고 싶은 길이자 데리고 살고 싶은 길’임을 느낀 것이다.

 

태안사 입구 주차장 옆에는 태안사 출생인 조태일시인의 문학관이 있다. 조태일(1941-1999)시인은 태안사에서 태안사 주지 스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처승을 아버지로 둔 셈이다. 생전에 시인은 “나의 시는 태안사에서 비롯되었고 태안사에서 끝이 난다”고 했다고 한다.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

 

조태일 시인은 민족, 민중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70년대는 유신독재에 저항하고, 80년대에는 신군부에 저항해 문단의 민주화를 이끈 분으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그는 광주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지낸 분으로 주(酒)님을 너무 사랑한 관계로 59세의 일기로 간암으로 타계했다. 평소에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사람치고 장수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이 점 늘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조태일문학관을 우리 선생님들이 너무 좋아한다. 지적, 정서적 만족감을 동시에 느낀 것일 게다. 문학관을 관리하는 분과의 대화 중에 특이한 것은 풍수 상 일반적인 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반해 보성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그래서 그런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열사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한다. 일종의 풍수 상 배역지지다.

 

보성강은 보성군 웅치면 제암산 남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화강천(花江川)이라 불리며,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장흥군에서 장평천(長平川), 보성읍 북쪽에서 노동천(蘆洞川)과 합류하고 북쪽으로 흘러 율어천(栗於川), 동복천(同福川)과 합류하고 북동쪽으로 흘러 순천시 송광면에서 주암 댐을 이룬다.

곡성군에 이르러서는 온수천(溫水川)과 죽곡천(竹谷川)과 합류한 뒤 북으로 올라와서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에서 순자강과 만나 섬진강이 된다.

 

순자강은 임실, 순창을 발원지로 하여 곡성군 옥과면에서 옥과천과 합류하고 곡성읍에서 남원에서 내려오는 요천수와 합류하여 압곡에서 보성강을 만나 섬진강이 되어 구례와 하동을 거쳐 남해로 흐르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순자강을 섬진강이라고 한다고 한다. 전남에는 삼성이 있는데 장성, 보성, 곡성이다. 이 삼성에 열사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한다.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시집을 사가지고 왔다. 관리하는 분이 모금함에 마음대로 조금만 넣어도 된다고 하기에 2만원을 넣고 3권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정가를 보니 만 삼천 원이라 2만원을 더 넣었다.

시집 1권에 있는 ‘골목을 누비며’가 보는 즉시 가슴에 와 닿는다.

 

골목을 누비며

 

어렸을 적 동무들 다 어디 갔나.

그 활달했던 팔다리들 다 어디로 숨었나.

그 부끄럼 많던 계집애들 다 어디로 갔나.

 

도무지 알 길 없어

신새벽부터 동무들 발자국 따라

골목골목을 누빈다.

 

들려오려나

쏟아지려나

 

울타리 넘어

골목까지 얼굴 내민

붉은 장미꽃 한 송이.

 

이젠 화엄사 앞에 있는 숙소로 가면 된다. 오전에 그리도 많이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빛이 쨍쨍하다. 가시거리가 너무 좋다. 적덕을 한 분이 많이 있어서 아마도 그런가 보다. 숙소에서 노고단 정상을 보니 바로 손에 잡힐 듯 가시거리가 좋다.

 

 노고단

 

호텔에서 저녁으로 삼겹살 가든파티를 열어주었다.  

 가든파티

 

신선한 공기와 함께 한 저녁식사는 단연 압권이다. 식사 후에는 직원연수의 하이라이트인 단란주점에서는 단합대회다. 직장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버리는 대 화합의 장으로 변했다. 그 동안 쌓인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시간이다. 건강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원갈등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필수코스이기도 하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성공리에 끝이 났다. 삼삼오오로 다시 모여 즐거운 시간을 더 보냈다.

 

새벽 빗소리에 잠을 깼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하늘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계곡에 물이 불어나 비상 사이렌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뉴스에 부산에도 물난리가 나 초등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런 비에도 불심이 강한 분들은 비가 많이 오기 전 새벽에 화엄사까지 다녀온 불자들이 더러 있었다. 아마 무사히 직원연수를 마친 데에는 이분들의 기도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오늘의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부산으로 바로 돌아가기를 교장선생님과 의논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선생님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숙소에서 놀다가 12시 체크아웃시간에 나가자고 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가정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비가 그친 11시에 출발을 했다.

 

 연곡사 대웅전 오르는 길

 

예정대로 연곡사를 들렸다. 연곡사가 있는 피아골 계곡도 범람을 해서 주변의 농경지가 잠긴 것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연곡사까지의 길은 높은 위치의 포장도로가 잘 닦여 있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연곡사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다시 굵어졌다. 혹시나 모를 산사태에 대비하여 가파른 언덕에 있는 북부도는 보지 않고 동부도만 보기로 했다.

 

 연곡사 동부도

 

설명을 너무 장황하게 하면 지루하기에 동부도의 특징 중 논란거리가 되는 부분만 설명을 했다. ‘부도 상륜부에 있는 머리 없는 새가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인지, 봉황새인지와 탑신(塔身)에 새겨진 것 중 향로 모양을 한 것을 두고 향로인지 아니면 황제의 수레인 보여(寶輿)인지에 대한 논란점만 이야기 하고 연곡사를 떠나고자 하는데 한 선생님이 질문을 한다. 사리는 어디에 보관을 하는가이다. 사리함은 탑신에 있다. 일반적으로 자물쇠모양의 문비형(門扉形)이 그려져 있으면 사리가 그곳이 있다는 뜻이다.

 

석탑이나 부도를 볼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는 늘 허전함을 느낀다. 잠깐 살다가 가는 우리네 인생살이를 영원한 삶으로 승화시키려는 처연한 노력이 이처럼 아름다운 탑과 부도를 만들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탑과 부도를 보고 돌아설 때는 마음이 애잔하다.

 

아쉬움이 있는 사람은 다음에 좋은 사람과 같이 다시 오기를 기약하면서 쌍계사 입구의 유명한 참게탕집으로 떠났다. 참게 알이 노랗게 들어 있는 참게탕을 맛있게 먹고는 여정을 마무리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연수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배웠다. 관리자의 첫 번째 덕목은 포용력이라는 사실이다. 관리자는 감정의 자제가 제일 중요하다. 전임교에서 퇴직한 여선생님이 나에게 들려준 첫 말씀이 생각이 난다.

“교감선생님 교감 자리는 수양하는 자리입니더. 무조건 참아야 되고 여러 얼굴의 사나이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기에 너무 지나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리더는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여러 얼굴을 가져야 하는 것이 리더십의 상황이론이기도 하다.

 

 호불호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면 관리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포용을 하고 뒤에 개인적으로 조용히 대화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사랑과 신뢰로써 상대를 대하고 대화를 통하면 윈-윈의 인간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리더가 자신만이 이기고자 한다면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또한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야 된다. 내 머릿속으로는 잘못된 결정이라고 느껴져도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결정은 반드시 따라야 된다는 것을 이론적이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았다.

 

 좋은 리더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봉사를 바탕으로 한 공동선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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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GREEN / Susan Jacks

Sometimes love would bloom in the springtime

Then my flowers in summer it will grow

Then fade away in the winter

When the cold wind begins to blow

But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Like my love for you

 

So hold my hand and tell me

You'll be mine through laughter and through tears

We'll let the whole world see our love will be

Evergreen through all the years

For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Like my love for you

 

봄이 되면 때때로 사랑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내 사랑의 꽃도 활짝 피어납니다.
그리고는 겨울이 다가와 꽃은 시들어가고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그 사랑이 푸르고 푸르러있다면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푸르른채로 남아있지요.
사랑이 푸르고 푸를 때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처럼...


그러니 나의  손을 잡고 말해줘요.
웃음과 눈물 속에서도  나의 사랑으로 남겠다고...
푸름을  간직한 우리사랑
모든 세상이  볼 수있게 말 이예요.
하지만 사랑이 언제나 푸르고 푸르러 있기에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푸른  채 남아있겠죠.
사랑이 푸르고 푸를 때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