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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제주여행

제주도 우도

by 황교장 2010. 2. 7.

부산중앙중학교 부장연수 2-제주도 우도

 

한라산 설경을 가슴에 담아두고는 숙소 근처 횟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자연산 황돔이 주 메뉴다. 황돔은 제주에서만 주로 맛볼 수 있다. 부산에서는 귀한 회이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는 숙소인 라마다 프라자 호텔로 갔다.

 

 

 라마다 프라자 호텔

 

라마다 프라자 호텔은 교원공제회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다. 우리 모두 공제회회원이기에 우리가 주인인 셈이다. 선생님들에게는 할인 혜택이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비수기에는 더욱더 할인을 해준다. 방 배정을 하고는 조금 쉬었다가 9시에 다시 모였다.

 

 근처의 토속집에서 오손도손 등산이야기며 살아가는 이야기 등 화기애애하게 회포를 풀었다. 아직 회포가 덜 풀린 사람들끼리 숙소에 다시 모였다. 남자 네 명이 자는 방은 1박에 60만 원이 넘는다. 그런데 회원이면서 비수기라 할인이 되어 15만 원이다. 4명이 잠자기에는 너무 크고 좋다. 숙소가 마음에 든다고 다들 기뻐한다.

호텔 9층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광도 아주 일품이다.

 

 

 

 

 숙소와 숙소에서 바라본 풍광

 

다음날 8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다. 조금 늦은 8시 45분에 버스에 올랐다. 처음 계획은 가까이 있는 원당사지오층석탑부터 차례대로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사분이 가장 먼 곳인 우도를 10시 배로 먼저 보고 1시 배로 나와서 다른 코스로 이동을 하면 오히려 더 좋다고 조언을 한다.

역시 현지 기사분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여겨 우도를 먼저 가기로 결정을 했다.

 

 

 

9시 45분에 우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우도에 가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관광버스를 배에 실어서 가면 안 되는지 기사에게 물으니 우도에도 일주 관광을 하는 버스들이 있다고 하면서 일종의 묵시적인 협약이 되어 있다고 한다.

서로 나누어서 먹고 살기 위한 협약인 것이다. 우도 일주 버스에 우리가 타고 온 관광버스 회사 이름으로 예약을 해 두었다. 성산항에서 우도까지 가는 데는 15분이 걸린다. 그런데도 배는 아주 웅장하고 크다. 그만큼 관광객이 많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섬 가운데 다시 가고 싶은 섬을 꼽으라면 단연 우도였다. 우도는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다. 특히 물빛이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우도만한 물빛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선생님들도 우도에 처음 가는 분들이 더 많았다. 몇 번이나 다녀온 우도이지만 마음이 설레기는 처음처럼 느껴진다.

 

우도 선착장에 도착하니 우도 일주 관광버스들이 손님을 기다라고 있었다. 관광버스의 종류는 단체관광버스와 개인관광버스 그리고 일반버스 등이 있었다. 우리는 열세 명이라 개인관광버스에 올랐다. 관광버스가 제일 먼저 안내한 곳은 우두봉이다. 관광버스의 기사는 우도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우도는 멀리 성산포쪽에서 바라보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해서 우도라는 명칭이 지어졌다고 설명을 한다. 우도에는 아름다운 절경 8경이 있다. 이중 지금 가는 곳에서 제4경인 지두청사(指頭靑沙)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지두의 ‘푸른 모래’를 뜻한다.

등대가 있는 우두봉 꼭대기에서 바라본 우도 전경과 맑고 푸른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눈부시게 빛나는 백사장의 풍경을 통틀어 일컫는다.

 

 

 

 

 

 

 

 

 

 

 

 

지두청사와 우두봉 일대

 

기사는 11시 20분까지 개인관광이라고 쓰인 버스를 타라고 안내를 하고는 우리들을 내려 주었다. 마침 내리자 어묵을 먹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바로 사우나를 갔다 왔기에 배가 출출해서 어묵을 하나 먹고 나니 일행들은 저 멀리까지 가 있다.

 

몇 번이나 왔던 우도의 추억들을 떠올려 보면서 우도봉으로 천천히 갔다. 우도에서 가장 높은 우도봉에 오르면 섬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전에 왔을 때는 날이 맑아서 제주도 중산간 지대의 오름과 한라산까지 뚜렷이 잘 조망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가시거리가 미치지를 못해 중산간 오름까지만 조금 보인다.

 

버스기사가 이곳 등대를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등대라고 자랑을 했다. 내가 알기로는 인천 앞바다에 있는 팔미도에 세워진 팔미도등대가 첫 등대고, 포항 호미곶에 있는 장기곶등대가 두 번째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곳이 두 번째라고 하니 틀린 말이다.

 

 

 우도등대

 

전에는 이런 잘못된 설명을 들으면 아는 척, 잘난 척하면서 고쳐주었는데 이젠 내 옆에 앉은 선생님에게만 그것도 살짝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나이가 들어서 그 만큼 겸손해진 것도 있지만 인간의 기억이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등대의 건립 순서를 찾아보니 우도등대의 역사도 오래된 등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기사분이 자랑할 만했다. 우리나라 등대의 설립순서를 보면 팔미도(1903년), 소월미도(1903), 백암(1903), 북장사서(1903), 장기곶(1903), 부도(1904), 제뢰(1905), 거문도(1905), 영도(1906), 우도(1906)순으로 되어 있다.

 

등대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20세기 초반은 ‘제국의 시대’이자 ‘등대의 시대’였다고 할 정도로 등대가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의 설립 목적은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세웠다. 우도 등대 또한 러일전쟁 직후에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고 어선의 뱃길을 안내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등대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20세기 초만 해도 등대는 ‘선진기술’이 집약된 곳이었다. 등대는 최초로 무선전신지국을 설치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정세의 동향을 감지하고 보고하는 중요한 목적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당시에 무선사는 최고의 첨단기술자였다. 따라서 전쟁이 벌어지면 적의 함대나 항공기가 등대를 우선 공격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우도 등대는 1906년 3월 1일 불을 밝히기 시작해서 100년간의 임무를 완수하고는 그 옆에 새로운 등대에게 임무를 물러주었다.

 

 

 성산일출봉

 

등대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면 바다 건너 성산일출봉이 코앞에 보인다. 영주 10경 중 영실기암과 쌍벽을 이룬다는 성산일출(城山日出, 성산의 해돋이)이다.

 

일출봉은 우리가 잘 아는 가곡인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되는 ‘기다리는 마음’의 가사에도 나온다. ‘기다리는 마음’은 천재시인으로 알려진 부산고 출신의 김민부 시인이 작시하고, 작곡은 ‘비목’, ‘기다리는 마음’을 작곡한 한양대학교의 장일남 교수다.

장일남교수도 몇 년 전에 타계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어 안타까워한 기억이 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일행들이 한분 두 분 모여들었다. 우리학교의 대표사진 작가인 생활지도부장의 인기가 대단하다. 여기저기서 사진요청을 한다.

 

11시 20분에 맞추어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조금 기다리자 우도 개인관관버스가 왔다. 버스의 기사가 다른 분으로 바꿔져 있다. 그런데 이분의 입심이 보통이 아니다. 입담이 구수하면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음색이다. 수염도 길러 털보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털보기사가 알려준 우도에 관한 내용을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우도는 남북 3.53㎞, 동서 2.5㎞, 둘레 17㎞이다. 우도는 전복, 소라 등 각종 해산물이 풍부해, 아직도 해산물 채취로 수입을 올리는 해녀들이 많다. 우도 주민이 1700여 명인데, 여성 900여 명 중 절반 가량이 지금도 물질을 직접 한다.

 

사계절이 모두 좋지만 유채가 만발하는 3월말에서 4월초가 제일이고, 다음은 해수욕하기 좋은 7-8월이나, 억새꽃이 흐드러지는 10월이 좋다고 한다.

 

우도는 조선시대에는 말 사육장이었다. 숙종 때인 1697년 150여 필을 우도에 풀어놓고, 중앙에서 관리했다. 1843년 헌종 때 이르러서야 말들을 제주도의 다른 목장으로 분산시키고 주민의 이주·경작을 허가했다.

 

선사시대 유물로는 초기 철기시대의 고인돌로 추정되는 돌과 돌도끼, 몽돌 등이 발견됐다. 70%는 농경지로서 땅콩, 고구마, 파 등 6가지 작물을 재배한다. 1년에 이모작하며 행정구역상 4개리로 되어 있다.

 

우도의 특산물로는 땅콩과 소라, 마늘 등이다. 우도는 주로 마을과 마을 사이에 혼인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이 다 씨족이 아니면 사돈 팔촌이라고 한다.

 

우리 학교 인문사회부장은 제주도에서 여고를 졸업한 제주도분이다. 이분 말이 제주도에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산간지역에는 양반들이 주로 살았고 해안가 주변은 주로 평민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산간지역 사람들은 해안가 사람과의 혼인을 꺼렸다고 한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육지 사람들이 혼인을 꺼리니 당연히 우도에서는 자기들끼리 성씨만 다르면 할 수밖에 없겠다.

 

 

 

 

 

 

 

 

 

 

 

 

 동안경굴과 검멀레 해안

 

다음 코스는 우도 팔경 중 제7경인 동안경굴(東岸鯨窟)이다. 한자로 풀이하면 ‘동쪽 해안의 고래굴’이라는 뜻이다. 콧구멍'이라는 2개의 해식동굴이 있는데, 옛날에 거인고래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안경굴이 있는 해변에는 검은 모래가 깔려 있다고 하여 '검멀레' 해변 또는 ‘검멀레’ 해수욕장이라고도 불린다.

 

동안경굴은 입구는 작지만 안에 들어가면 아주 넓다.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다. 한 달에 2번 정도 열린다는데 나는 운 좋게도 전에 두 번이나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동굴 입구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있다. 동안경굴은 해식 동굴로 수백 명을 수용할 정도로 깊고 넓다. 노래를 부르면 동굴 입구를 통해 바다로 퍼지고, 파도가 밀려들면 해조음이 동굴을 채운다.

 

동안경굴은 자연이 빚어낸 동굴의 음향을 활용해 음악회를 열었던 동굴음악회의 진원지이다. ‘동굴소리연구회’ 주최로 1997년 9월 시작된 동굴음악회는 그동안 세 차례 열렸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잠깐 내려 사진만 찍고는 다시 버스를 탔다. 그러지 않으면 30분을 더 기다려서 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30분의 시간을 벌어야 우도의 최고 하이라이트인 사빈백사를 좀 더 구경을 하고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8년 전에 가족과 왔을 때 이곳 검멀레 식당에서 먹은 갈치조림의 맛을 잊지 못한다. 제주갈치의 진수를 맛본 것 같아서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시간이 아직 점심을 먹기는 약간 이른 시간이라 다음 곳에서 먹자고 하는 것이 중론이다.

 

하는 수 없이 털보 아저씨에게 사빈백사의 식당 중에서 맛있는 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 추천할 것도 없이 한 집밖에 없다고 한다. 자신이 먹어본 경험으로는 맛이 좋으나 사람의 입맛이라는 것은 다 다르기 때문에 뭐라 장담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살짝 말하기를 ‘우리 마누라보다는 못하지만 식당아주머니가 음식솜씨가 좋기로 소문은 났다고 한다. 내 경험상 대놓고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치고 진실인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분은 진실인 것처럼 보인다.

 

관상을 보니 호남형에 수염을 길러 멋이 있었다. 거기에다 입담까지 갖추었다. 말의 내용은 긍정적이고 힘이 있다. 만약에 식당에 간다면 털보기사아저씨 소개로 왔다고 하면 좀 더 잘해준다고 한다. 이 말에 사빈백사에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을 했다.

 

검멀레 해수욕장을 나와 해안선을 따라 일주도로가 형성되어있다. 조금 지나자 기사분이 흥분된 목소리로 바다를 한번 보라고 한다. 우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저렇게 많은 갈매기가 따라다니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갈매기가 저렇게 많이 있는 것은 고기떼가 지나가기 때문이다. 내가 보아도 갈매기 떼가 수만 마리는 될 것 같다. 진귀한 구경을 한 셈이다.

 

 

 갈매기 떼

 

절경을 따라가면 우도 속의 섬인 비양도가 나온다. 제주도에는 두 개의 비양도가 있다.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한림 협재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비양도를 ‘서비양도’라 하고 우도에 있는 비양도를 ‘동비양도’라고도 한다.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양 날개를 이뤄 날아오르는 모습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구분이 된다. 우도의 비양도(飛陽島)는 ‘볕 양(陽)’을 쓰고, 한림 비양도(飛揚島)는 ‘오를 양(揚)’을 쓴다. 지금은 120m 돌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비양도

 

우선 보기에는 별 보잘것없는 섬 같지만 주민들에겐 해산물의 보고다. 전복, 소라, 오분작 등 우도 주요 해산물의 4분의1 가량이 비양도 부근에서 나온다고 한다.

 

비양도를 지나면 여름 우도 관광객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인 하고수동 해수욕장이 나온다. 우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으로는 이곳 하고수동 해수욕장과 서빈백사(西濱白沙)라 불리는 ‘산호모래 해수욕장’이다.

그러나 산호모래 해수욕장은 지금까지 산호가 부서져 이뤄진 새하얀 모래밭으로 이름 높았으나, 최근 산호모래가 아닌 굳어진 홍조류가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밭으로 확인되어 지금은 홍조단괴해빈(紅藻團槐海濱)해수욕장으로 불린다.

 

 

 하고수동 해수욕장

 

하고수동 해수욕장은 일반 모래로 이뤄졌지만, 널찍하고 완만하여 해수욕장으로는 홍조단괴해빈 해수욕장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고수동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밤 멸치잡이 배들의 풍광이 우도 8경중 제2경인 야항어범(夜航漁帆)이다.

특히 6-7월이 되면 섬 전 지역에서 집어등을 켠 채 조업을 하는 수많은 멸치잡이 어선들의 휘황찬란한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고수동 해수욕장을 조금 지나면 바로 우도팔경 중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서빈백사가 나온다. 차는 서빈백사에 정차를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아주머니가 아주 반갑게 맞이해 준다. 털보기사님에게 소개를 받아서 왔다고 하면 잘해준다고 해서 왔다고 하자 웃으면서 알겠다는 표시를 한다.

 

 메뉴판을 보니 제일 먼저 나온 것이 갈치찌개였다. 갈치찌개 하나면 네 사람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인원이 총 13명이니 한 곳은 다섯 사람이 먹어야 하므로 좀 더 많이 넣어주면 좋겠다고 하고는 서빈백사를 구경했다.

 

 

 

 

 

 

 서빈백사

 

서빈백사의 퇴적물은 산호 파편이 아니라 이 근처 바다에 서식하는 홍조류가 석회화되면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형성된 것을 홍조단괴라고 말한다. 2004년 세계적으로 희귀한 ‘홍조단괴 해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천연기념물 제438호로 지정되었다.

 

서빈백사(西濱白沙)를 한자로 풀이하면 ‘서쪽 물가의 흰 모래’라는 뜻이다. 濱은 ‘물가 빈’이다. 즉 해안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제일경을 가장 좋은 곳을 선정하는데 이곳 ‘우도 8경’은 제8경인 서빈백사가 우도팔경의 최고로 쳐 준다.

 

우리 일행들은 아이들 마냥 사진도 찍고 거닐기도 하고 표정이 너무 맑고 좋다. 눈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기온도 영하에 가까운 쌀쌀한 온도다. 더 이상 밖에서는 있을 수 없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가 준비되기까지는 20여 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때서야 털보기사가 서빈백사에 가면 우도 해녀들이 딴 싱싱한 홍삼과 소라를 꼭 맛보아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주인에게 이 말을 하니 식당주인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오늘 해녀의 집 당번이 털보기사의 마누라라고 하면서 주문만 하면 자기들이 갖다 준다고 한다.

홍삼 한 접시에 만 원이다. 3접시를 시켰다.

 

양도 제법 많고 싱싱하다. 한라산 소주 한 잔에 홍삼 한 점 바로 이 맛이다. 이 맛이야말로 여행의 백미다. 평소에 약주를 거의 안하시는 교장선생님도 한 잔을 하신다. 교장선생님게서 참소라도 한번 먹어 보자라고 하는데 마침 갈치조림이 들어왔다. 아쉽다. 참소라에 한라산 소주 한잔의 기쁨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새로 나온 갈치조림의 맛은 일품이다. 우선 싱싱하다. 지금이 한창 갈치잡이철 이라고 한다. 역시 제철 음식이 좋은 것이다. 음식점은 손님의 60%만 만족시키면 좋은 식당이라고 하는데 전원 만족이다.

 

이곳에서는 우도의 특산물인 우도땅콩을 팔았다. 한 봉지 5천원이다. 육지땅콩에 비하면 크기는 반도 안 되지만 고소하기는 더 고소한 것 같다. 땅콩의 크기만 보아도 이곳의 토질이 얼마나 척박하다는 것을 알겠다.

 

1시배를 타려면 12시 45분에 이곳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차는 어김없이 12시 40분에 왔다. 모두들 다 탔다고 생각되어 출발을 했다. 그런데 생활지도부장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분이 안 탄 것이다.

다시 차를 돌려서 태워왔다. 왜 늦었는지에 관해서 질문을 하니 서빈백사를 조금 더 감상할 욕심으로 갔는데 그곳에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서 감상하다가 늦었다고 한다.

 

관광버스기사는 또 다른 분이다. 이분은 털보기사분과는 음성과 관상에서 차이가 난다. 기질상 반대기질이다. 우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빈백사는 몇 년 전만 해도 넓고 좋았는데 앞에 있는 저 펜션이 사유지라서 주인이 둑을 쌓아서 유실되었다고 한다.

 

우도는 하루 평균 650대의 차가 들어오는데 특히 여름에는 렌트카만 천 대 이상이 밤에 우도에 머무르는데 이들은 광란의 질주도 한다고 한다. 이 많은 차량 때문에 하루에 5cm 가량 우도가 가라앉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광객들은 제주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다 사갖고 와서는 쓰레기만 우도에 남기고 떠나 우도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한다.

 

대책은 하루에 들어오는 차의 수량을 제한하고 주 관광지는 마차만 운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해결책도 내어놓는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제안이다. 이 내용은 제주도지사가 참고해야 할 내용인 것 같다.

 

소개되지 않는 우도팔경은 다음과 같다.

 

제1경은 주간명월(晝間明月)이다.

동천진항 오른쪽 300m 지점에 있는 '광대코지[岬]'로 불리는 암벽 주위에 여러 개의 해식동굴이 있는데, 맑고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오전 10시와 11시 사이에 한낮의 태양이 수면에 반사되면서 동굴 천정에 비쳐 마치 둥근 보름달이 서서히 떠오르는 광경처럼 보인다고 한다.

 

제3경은 천진관산(天津觀山)이다.

동천진항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산허리에 구름이 감겨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의미다. 우도의 관문에 해당하는 동천진항에서 성산 일출봉과 수산봉(水山峰), 지미봉(地尾峰)을 비롯해 각종 기생화산을 품고 있는 한라산의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제5경은 전포망도(前浦望島)이다.

전포망도는 구좌읍 종달리(終達里)와 하도리(下道里) 사이의 앞바다에서 본 우도의 모습이 누운 소의 형상으로 본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제6경은 후해석벽(後海石壁)이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우두봉 부근으로 가면 웅혼한 수직절벽인 '광대코지'가 온통 줄무늬여서 아름답다는 의미다.

 

 

 

 우도해녀항일기념비

 

 

이것으로 우도 관광의 대략을 마쳤다. 그런데 우도에서 그냥 넘어가면 서운한 것이 있다. 우도해녀항일투쟁기념비와 해녀상이다.

우리나라 여자독립운동가로는 이런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뭍에는 유관순, 우도엔 강관순”이다.

 

우도 길목에 세워진 해녀상과 항일투쟁 기념비는 우도면민은 물론 우도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친 파도와 싸우며 강인하게 살아온 우도 잠녀들의 항일투쟁 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적인 산물이다.

 

해녀항일투쟁기념비에는 우도 해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 마을 출신 강관순이 지었다는 '해녀의 노래'가 기록돼 있다.

 

우도 해녀들은 세화와 종달, 하도리 해녀들과 함께 1932년 1월 12일 세화 오일장날 집단 봉기를 일으켰다. 1932년 1월 극렬하게 불타오른 해녀항쟁은 3개월 동안 제주 동부 지역에서 연 인원 17,000명의 해녀가 참가한 국내 최대의 여성집단의 항일투쟁이면서 최대의 어민봉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32년 일제의 해산물 착취와 상권 독점 등 수탈이 극심해지자 해녀들이 떨쳐 일어나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거세게 항거했다. 이 해녀 항쟁은 전국 최대 규모의 어민 운동이자, 유례없는 여성 집단의 항일 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강광순은 옥중에서 ‘해녀의 노래’를 지어 보급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고 한다. 해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천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에 물결 위에 시달리던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밤이 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 주면서 저녁밥을 짓는다.

하루 종일 하였으나 번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 다 지고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조선 각처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간다.

가이 없는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이렇게 아름다운 우도에도 이처럼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해녀가의 내용 중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 있다. ‘배움 없는 우리 해녀’라는 구절이다.

인간은 배워야 한다.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우리들의 직업이기에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다시 배를 타고 성산항 선착장으로 나와 성읍민속마을로 향한다.

 

180

 

You believe that I've changed your life forever

and you're never gonna find another somebody like me

And you wish you had more than just a lifetime

to give back all I've given you and that's what you believe

 

I owe you all the sunlight in the morning

and the nights of all this loving that time can't take a way

and I owe you more than life, now more than ever

I know that it's the sweetest debt ever have to pay

 

I'm amazed when you say it's me you live for

you know that when I'm holding you your right where you belong

and my love I can't help but smile with wonder

when you tell me all I've done for you cause I've known all along

 

Cause I owe you the sunlight the morning

and the nights of all this loving that time can't take a way

I owe you more than life now more than ever

I know that it's the sweetest debt I'll ever have to pay

 

당신은 믿지요 내가 당신의 삶을 영원히 바꾸었다고
그리고 나와 같은 다른 이는 절대로 찾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 당신은 바라지요 한 평생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기를...
내가 당신에게 준 모든 것을 갚기 위해 그것은 당신이 믿는 것이지요

나는 당신 덕분에 아침의 햇살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랑의 밤들을 얻게 되었어요
삶 이상의 것을 얻었어요, 당신 덕분에 어느 때보다 지금
그것은 내가 갚아 나가야 할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빚이예요

난 놀라워요 당신이 사는 이유가 나라고 말할 때
내가 당신을 안고 있을 때 바로 당신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걸 안다고
내 사랑, 난 의아해하며 미소 지을 수 밖에 없지요
내가 당신을 위해 한 모든 일을 말할 때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