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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유럽바로알기

by 황교장 2021. 5. 21.

2021년 2월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이어서 문화교양학과 3학년에 편입을 했다. 살아오면서 관심이 많은 분야가 인문학이다. 문화교양학과의 주된내용은 문사철인 인문학이다. 퇴직후에 대학공부를 하는 것은 많은 즐거움을 준다. 퇴직 전의 학문은 어느정도 남에게 잘남을 보이기 위한 위인지학이라면  퇴직 후의 학문은 내자신을 위한 위기지학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출석수업을 했지만 지금은 과제물로 대채를 한다. 힘들게 작성한 과제물을 필요할 때 볼 수 있도록 블로그에 코너를 마련하여 계속 기록하고자 한다.

 

 

문제. 십자군시대 서유럽인들의 이슬람세계에 대한 태도와 인식을 읽고자신이 느낀 바를 서술하시오.

 

. 서론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벌어진 서유럽 기독교 군대와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을 말한다. 전쟁의 발단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로마교황에게 예루살렘을 이교도인 무슬림으로부터 탈환해 줄 것을 요청한데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활동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곳으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성지이다. 이러한 성지를 탈환하려는 무장순례길이 십자군 전쟁이다. 순례란 신앙을 고취시키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중세 유럽인들은 종교적 열정, 물적 탐욕, 교황에 대한 믿음 등 다양한 이유로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태도를 보여준다. 이에 십자군전쟁의 원인과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십자군 전쟁에 대한 상이한 인식의 변천과 십자군 전쟁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고방식과 태도에 대하여도 알아보고, 십자군 시기에 유행했던 이슬람 담론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 본론

 

1. 전쟁의 원인

십자군 전쟁은 비잔티움 제국의 알렉시우스 1(1081-1118 재위)가 우르바누스 2세 교황에게 예루살렘을 이교도인 무슬림으로부터 탈환해 줄 것을 요청한데서 시작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비잔틴 교회의 수장을 겸하고 있었다. 726년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황제는 예수와 성인들의 형상이나 조각상을 우상으로 생각하여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 일로 동로마 교회와 서로마 교회가 대립하였다. 결국 1054년에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동유럽의 그리스 정교로 나누어졌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11월에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열어 이교도들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이에 서방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했다. 대규모의 다국적 군대가 결성되어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 이때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들을 십자군이라 불렀다. 그때부터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은 예루살렘 성지를 두고 약 2세기 동안 싸웠다.

2. 십자군전쟁의 전개과정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명분이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여러 세력은 각기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먼저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분열된 동서 교회를 통합하여 교황권을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영주와 기사들은 새로운 영지와 재물을 얻기 위해 나섰다.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동방 세계와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노렸고, 농민들은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당시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와 기독교회의 수장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어 자신의 주도 아래 십자군을 일으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또한 당시 기사들의 안하무인적인 태도가 사회에 위협을 가할 정도로 난폭했다. 이러한 난폭한 기사들을 신앙이라는 영적 무기로 길들이는 신의 평화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3. 십자군 전쟁의 과정

. 1차 십자군 전쟁(1096-1099)

1차 십자군은 1096년 가을에 결성되었다. 1차 십자군에는 프랑스 왕 필립 1세의 동생인 위그 드 베르망두아가 총사령관으로 지휘를 맡았다. 비잔티움 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십자군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시리아 지방을 점령하였다. 심한 더위와 질병, 굶주림 등으로 고생하던 십자군은 내부 세력의 갈등까지 겹쳐 10997월에서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십자군은 6주 동안 싸우면서 이슬람 군뿐만 아니라 주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승리한 십자군은 예루살렘-라틴 왕국(1099-1187)을 건설하였고, 보드 앵 백작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성전 기사단, 요한 기사단 등 기사 수도회를 설립하여 성지를 방어하게 하였다.

 

. 2차 십자군 전쟁(1147-1149)

1144년 이슬람군이 예루살렘 동북방지방을 점령하자, 다시 제2차 십자군(1147-1149)이 결성되었다. 2차 십자군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독일 국왕 콘라트 3세 등이 참여하여 다마스쿠스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병사들이 적들에게 속아 부대에서 빠져 나가는 일이 생기고, 내분까지 겹쳤다. 결국 2차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그 뒤 십자군이 쉽게 출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집트의 술탄 살라딘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공격하였다. 뒤이어 그는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 3차 십자군 전쟁(1189-1192)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들은 서방 세계에서는 다시 제3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3차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 프랑스 국왕 필리프 2, 영국 국왕 리처드 1세가 이끄는 군대가 참전하였다 하여 왕들의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왕들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가장 먼저 출발한 프리드리히 1세는 허무하게도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강에 빠져 죽었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연합으로 예루살렘 포위 작전을 수행하던 중 불화로 먼저 귀국해 버렸다. 혼자 남은 리처드 1세는 끝까지 살라딘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다. 결국 그도 살라딘과 기독교도의 성지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 협정만 맺고 귀국하였다.

 

. 4차 십자군 전쟁(1202-1204)

1198년 새로 교황이 된 인노켄티우스 3세는 다시 십자군 결성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빠지고, 주로 프랑스 기사단을 중심으로 제4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1202년 베네치아에서 집결한 십자군은 바다 건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 이유는 십자군의 수송을 맡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밀린 선박 이용료를 빌미로, 달마티아 연안을 공격해 달라는 요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십자군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같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을 파면했다. 그러자 십자군들은 동로마에서 추방당한 아이작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 4세의 제안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들은 교회의 유물과 보물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을 분할하여 라틴 제국(1204-1261)을 세워 볼드윈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이때 비잔티움 제국의 테오도루스 1세는 다른 비잔티움 지도자들과 함께, 니케아로 후퇴하여 니케아 제국을 세웠다. 니케아 제국은 1261년에야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았다. 4차 십자군 전쟁 이후 종교적인 열정보다는 정치적·경제적인 욕심이 앞섰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이슬람 지역으로 원정을 나갔지만,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지역을 공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 5차 십자군 전쟁(1228-1229)

5차 십자군 전쟁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헝가리 왕의 지휘 아래 이슬람의 근거지인 이집트로 가 다미에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을 바꾸자는 이슬람 군의 제안을 거절하고, 카이로로 진격하다 실패하였다.

 

. 6차 십자군 전쟁(1248-1254)

6차 십자군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예루살렘을 양보받았지만, 1년 만에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 7차 십자군 전쟁(1270-1272)

7차 십자군 전쟁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주도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이슬람 군과 싸우다 크게 패하여 포로로 붙잡혔다. 결국 많은 몸값을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루이 9세는 추락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전쟁에 나섰다. 그는 튀니지로 원정하여 시리아까지 진출했지만 병사했다. 결국 제7차 원정도 무산되고 말았다.

1291년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기독교인들의 도시 아콘이 이집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십자군에 대한 상이한 인식의 변천

십자군에 대한 인식의 평가는 당대와 18세기, 19세기, 오늘날의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 당대 유럽인들의 인식

당대 유럽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성지탈환은 서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종교적 과제였다. 또한 성지순례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심을 고취시키고 인생의 목표를 얻는 것이다. 또한 개개인의 야망인 출세, 신분상승, 경제적 이득을 실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인식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십자군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볼테르와 기번 등의 계몽사상가 들은 십자군을 비이성적 맹신,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망, 교황청의 선동과 거기에 넘어간 무지 등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보고 비난했다. 그리고 십자군은 맹신이 낳은 참혹한 사건으로 간주 되었다.

 

.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인식

계몽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십자군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십자군은 문명의 전파라는 면에서 십자군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한 19세기 후반에는 서유럽 열강의 식민지 경쟁이 점점 더 고조되면서 십자군이 종교적 대의보다는 민족주의적 열망이나,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었다. 비록 폭력을 동원했지만 그것이 문명의 발전과 상업적, 문화적 교류를 강조했다.

 

. 오늘날의 인식

오늘날에는 십자군에 대한 복합적인 인식이 존재한다. 현대인들은 십자군의 폭력성과 비이성을 경계하면서도 종교적 대의를 내걸고 두 세계가 충돌한 것에 주목한다. 종교적 열정에 의거한 전쟁으로 보는 종교적 요인과 종교를 구실로 내세운 지중해 세력 간의 패권 다툼으로 해석한다.

 

5. 십자군 전쟁에서 나타난 다양한 사고방식과 태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양한 사고방식과 태도를 나타낸다. 사자왕 리처드 1세는 포로들을 살려주는 약속을 하고도 살리딘이 촉박한 기한을 지키지 못하자 성문 밖에서 살라딘의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2,700명에 이르는 무슬림 포로를 닥치는 대로 처형했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전투가 아니라 실리적인 협상을 통해 예수살렘 지역의 통치권을 얻어냈다. 성직자 중에서는 성 베르나르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힘으로 구원을 성취하고 신앙을 수호하자고 주장을 한 반면에 성 프란체스코는 작은 형제회를 창설하고, 5차 십자군 원정 때 죽음을 무릅쓰고 술탄인 알카밀과 회동하여 칼이 아니라 말, 즉 설교와 설득을 통한 복음의 전파로 무슬림을 개종시키려고 했다.

십자군에 참여한 일반 농민이나 기사들도 각기 달랐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열정 때문에 참여했지만 출세, 명예, , 신분상승 등을 위해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개개인의 사고방식이나 태도는 다양했다.

 

6. 십자군 시기에 유행했던 이슬람 담론

 

십자군 시기에 유행한 이슬람 담론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 오해와 편견, 왜곡된 인식을 드러내는 담론

이슬람에 대한 무지와 고의에서 비롯되었다. 십자군 전쟁을 겪으면서 쌓인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정확한 이해로 나타나지 않고 전쟁을 겪으면서 고조된 혐오, 분노, 피해의식 등으로 인해 오히려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욱 확산시켰다.

 

. 이슬람에 대한 이성적 접근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고 무슬림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자 했다. 그러나 이성적 접근은 관용이나 평화보다는 그들이 갖고 있는 허점을 드러내는데 활용하거나 무슬림들을 개종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 계시론, 종말론적 관점

유럽의 종교인들은 이슬람의 공격은 곧 종말이 다가올 징조로 여겼다. 그들은 이슬람을 종말의 징조로 여겨 적그리스도의 으뜸 되는 앞잡이가 바로 이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였다. 이는 이슬람의 재흥과 기독교 교회 내부의 부패에 대한 비관 속에서 형성된 비전으로 차후 중세 말의 여러 계시론적 담론 속에서 재현 된다.

 

. 결론

성지를 되찾기 위해 출전한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고, 봉건 영주들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국왕들의 권력은 강해지고 영지를 확장하게 되었다. 결국 서유럽의 각 나라가 중앙 집권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또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의 주축이 되었던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들이 성장 발전하게 되었고, 지중해 무역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지중해 무역권은 뒤를 이은 북유럽, 내륙 무역권 형성과 함께 발전하여 농업 중심이었던 중세 봉건 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비잔티움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접하게 된 서유럽 사회는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비잔티움 문화의 그리스·로마의 고전과 미술, 이슬람의 철학·의학·화학·수학·천문학 등이 전해지면서 서유럽 문화가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물적인적 자원의 투입, 엄청난 파괴와 살육, 그리고 두 세계 사이의 갈등과 원한 등 그 폐해 역시 그에 못지않게 크다. 오늘날에도 십자군이란 말이 종교를 넘어 이념 전쟁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특히 아랍인들은 십자군이라는 표현에 강한 반감과 피해의식을 느낀다. 특히 9.11 이후의 사태들은 전지구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십자군 전쟁이 남긴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서유럽과 이슬람세계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는 기독교사회의 자의식 및 지식인 문화의 속성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슬람의 모습 속에는 기독교세계 자체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역사 속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또한 이들을 통해 오늘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역사의 목적이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21세기인 현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종교가 다름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학살은 지금도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십자군 전쟁이 종교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싸웠듯 지금도 종교라는 깃발 아래서 각기 다른 이익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종교라 하더라도 그 종교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 분열과 갈등이기보다는 사랑과 화합이다.

역지사지를 하지 못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하여 배척을 일삼는다면 비록 21세기에 살면서도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나의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 역시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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