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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공부

세계의 역사 2

by 황교장 2021. 6. 20.

2021학년도 1학기 기말시험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두 차례에 걸친 중국 국공합작의 과정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국공합작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이루어졌던 두 차례의 협력을 말한다. 1차 국공 합작(1924-1927)은 청조 멸망 이후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지방에 할거하면서 중국 재건에 걸림돌이 되었던 군벌들을 소탕하기 위해 진행되었다.

쑨원이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1924년 국민당을 개조하고 소련과의 연합 및 공산당과의 합작을 받아들이면서 제1차 국공합작이 시작되었다. 이에 공산당은 국민당 안에서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고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 자신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다. 국공합작 후 쑨원은 통일된 중국을 건설하자는 국민회의운동을 활성화하면서 베이징에 올라갔지만 1925년에 사망하면서 국민회의 방식에 의한 통일방안은 좌절되었다.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는 북벌 중 난징과 상하이를 점령하자 412일 상하이에서 반공적 쿠데타를 감행했다. 4.12정변을 계기로 국민당 내에서 공산당을 몰아내면서 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 이는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대한 경계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공산당은 다섯 차례에 걸친 국민당의 토벌작전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무너지고 살아남은 홍군은 피난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피난의 길이 대장정이다. 87천명이 약 1년에 걸쳐 11개성, 12,500km를 이동한 대행군이었다. 1년 후에는 약 8천 명만 살아남았다.

2차 국공합작(1937-1945)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통일전선을 결성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지방을 점령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일본군보다도 먼저 공산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6차 토벌을 위해 장학량을 독려하기 위해 서안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장학량은 일본군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공합작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서안에 온 장제스를 연금했다. 이것이 바로 시안사건이다.

시안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공산당과 합작을 약속했다. 다음해인 1937년에 중일전쟁의 신호탄인 노구교사건(7.7사변)이 일어나 합작을 약속한 장제스는 중일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에 나섰다. 항일전쟁은 8년간 계속되었다. 국민정부군은 정면 전장에서, 공산군은 일본군 후방 전장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일본이 3국동맹의 일원이 되어 진주만공격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의 항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제2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1946년부터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의 결과 공산당이 승리하였다. 패전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옮겨 중화민국을 건설하고, 승리한 공산당은 1949101일 마오쩌둥을 인민정부 주석으로, 저우언라이를 정무원 총리로 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2.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성격과 전개과정에 대해 서술하시오.

 

막부란 원래 전쟁터에 출정 중인 쇼군(장군)의 진영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뒤에 무사정권의 수장인 쇼군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구조를 뜻하는 의미로 변화되었다. 일본역사에서 무사정권이 통치를 담당하던 막부의 지배시기는 12세기 말부터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까지다. 가마쿠라막부, 무로마치막부 그리고 전국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었다.

1467년 전국의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갈라져 11년간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오닌의 난 이래 일본은 100년에 달하는 내란과 분열의 전국시대에 돌입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지역의 지배자에 머문 다른 다이묘와 달리 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총포를 사용하는 직업군인을 주력으로 삼아 승승장구하였으나 통일을 눈앞에 두고 부하의 배반으로 1582년 자살하였다.

그의 측근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 노부나가를 계승하여 1590년 일본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는 일본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가신에게 영지를 지급하고 조세를 부과함으로써 장원제도의 마지막 잔재를 해체하였다. 그는 대륙정복을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하였지만 실패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의 아들인 히데요리 세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전투인 세키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도쿠가와막부가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지금의 도쿄에 해당하는 에도에 막부를 두었기에 에도 막부로도 불린다. 도쿠가와막부는 250여 개의 번과 직할령, 직할도시를 막부의 법으로 통치하였다.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막번체제가 고안되었다.

막번체제란 지방의 다이묘들을 에도에 저택을 두어 상속자와 가족을 머물게 하고, 다이묘 자신도 몇 년에 한 번씩 쇼군에 인사드리는 산킨코타이를 하게 하는 제도이다. 다이묘들은 에도 행차와 가족이 에도에 거주하는 비용이 큰 부담이 되었다. 심한 경우 번 재정의 3분의 1이 산킨코타이에 소요되었다. 그러나 막번체제의 순기능도 많았다. 지방의 다이묘들이 쇼군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에도에 상경하면서 전국의 도로가 정비되고 상업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최상위 그룹의 가족과 가신단이 에도에 모여 살면서 에도는 거대한 소비도시가 되었다. 이는 도시의 발달을 가져왔다.

막부가 직접 관할하는 에도, 오사카, 교토 외에도 각 번마다 영주가 거주하는 행정중심지인 조카마치, 항구, 광산, 사찰의 주변에도 작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거주하는 대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이는 17세기 말 전국적인 상업유통망의 형성과 대상인의 등장, 도시문화의 번창으로 이어져 17세기 말에는 일본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때를 겐로쿠 시대(1680-1709)라 하여 지금도 최고의 경기를 상징하는 말로 통하고 있다.

18세기 이후 막부와 번의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쇼군가와 다이묘들은 대상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천하를 지배하는 것은 무사이지만 무사를 지배하는 것은 상인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대상인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화폐경제의 발전은 한편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하층민도 늘어났다. 지배계급의 혹독한 착취와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과 도시빈민의 소요가 급증하면서 막번체제는 내부에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19세기에 걸쳐 러시아와 미국의 국교수립 요구가 빈번해졌다. 막부는 네덜란드를 통한 막부 독점 관리무역을 실시하고 있었으나, 1853년 미국 동인도함대의 군함이 에도만에 진입한 것을 계기로 대외교섭권을 포기하고 미일화친조약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왕인 덴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쇼군의 후계자가 결정했다. 이는 천왕에게 막부 타도 운동의 구실을 주어 존왕양이운동이 일어났다. 존왕양이는 바쿠후의 권력을 왕인 덴노에게 돌려주고, 외국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운동이다.

존왕양이운동의 핵심 세력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철저히 차별했다. 세 등급이란 신반다이묘, 후다이다이묘, 도자마다이묘이다. 신반다이묘는 쇼군과 가장 가까운 다이묘로 도쿠가와 일족들이고, 후다이다이묘는 세키하라 전투부터 도쿠가와에게 충성하던 다이묘이고, 도자마다이묘는 도요토미를 따르던 다이묘들로 세키하라전투 이후 도쿠가와를 따르게 된 다이묘들이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도자마다이묘들이다. 처음에 이 두 번은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1866년에 사쓰마-조슈동맹인 이른바 삿쵸 비밀동맹이 이루어졌다. 사쓰마-조슈동맹과 바쿠후군과의 전쟁에서 삿쵸군이 승리함으로써 이후 바쿠후의 모든 권력을 덴노에게 바치는 다이세이호간 즉 대정봉환을 거쳐 마침내 1867년 도쿠가와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는 주역이 되었다. 이후 이들이 추진한 중앙집권적 개혁을 포함하여 메이지유신이라고 부른다.

 

3. 고대 로마 공화정의 위기에 대해 서술하시오.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 라틴족이 세운 작은 폴리스로 출발하여, 기원전 6세기 말에 공화정을 수립했다. 기원전 3세기 초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했다. 이어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기원전 2세기 중엽에는 서부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다. 기원전 1세기 말에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로마사가인 폴리비우스는 로마의 팽창이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강력한 시민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로마공화정은 팽창의 명분으로 신분 투쟁의 과정에서 평민들의 항의를 달래고, 그들로부터 군사력과 세원을 확보하여 대외적인 위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로마의 팽창 정책은 과두적, 귀족적 구조로 말미암은 사회의 내적인 갈등을 완화시키는 데에도 기여한 측면이 있다. 로마공화정의 정치적 참여권은 초기에는 대지주 귀족들, 즉 원로원에 독점되었다. 대부분 중소자영업자인 평민들은 불만과 항의를 표출했다. 평민들은 2세기에 걸친 신분투쟁으로 형식상으로는 귀족과 평민이 평등한 권리를 획득했지만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복전쟁 중에 황폐한 중소농민의 토지를 겸병하여 라티푼디움의 주인이 된 유력자들과 몰락한 무산자 프롤레타리우스 간의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나타난 인물이 있다. 바로 그라쿠스 형제다.

이들의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였고 어머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였다. 두 형제는 모두 호민관이 되어 로마 공화정 내에서 자작농을 육성하는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빈민, 무산자를 돕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려고 했다. 이를 그라쿠스의 개혁이라고 부른다.

그 주된 내용은 현재 귀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구 소유를 인정하지만 앞으로는 단 한 뼘의 땅도 더 차지해선 안 된다. 현재 놀고 있는 땅은 자기 땅이 없는 가난한 농민에게 빌려준다.’는 것이다. 이는 토지소유 농민을 부활시키고자 개혁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층의 반발로 결국은 형은 살해되고, 동생은 자살했다.

이처럼 농민의 몰락은 곧 시민군의 와해였다. 이후 로마의 군대는 유력자들의 사병집단으로 전락했다. 이를 배경으로 등장한 군인 정치가들은 빈민의 지지를 받아 권력투쟁을 한 것이 삼두정치다.

1차 삼두정치를 구축하여 공동으로 독재 정치를 시행한 것이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다. 이 경쟁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여 종신독재관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공화정 수호자인 브루투스 등에게 암살을 당했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은 로마의 정세를 다시금 내란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내란의 마지막 정점이 악티움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고,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최후 승자가 되었다. 이로서 로마의 공화정은 무너졌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로마제정을 수립하였다. 그는 로마 제일의 시민을 자처하면서 공화정을 회복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의 세력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다.

 

4. 중세 유럽 서임권 투쟁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로마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기독교교회다. 기독교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로 분열되었다. 동로마 황제는 서로마교회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732년에 로마가톨릭교회는 동로마제국과 결별하였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은 동로마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적 실력자로 카롤링 왕조의 샤를마뉴를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후 가톨릭교회는 정치적 통합이 미비했던 중세 유럽에 보편적 통합의 개념을 제공했다.

교황을 정점으로 계서제로 조직된 교회는 봉건영주 및 대토지 소유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교회는 군사력과 노동력을 보유하고 정치적 세속적인 권위까지 행사했다. 세속권력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초래했다.

교회 성직자는 모두 독신을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사실상 혼인상태에서 종교적 임무보다는 처자식을 위한 치부와 축재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성직이 좋은 수입원으로 간주되면서 성직 매매가 성직 임명의 통상적인 방법이 될 정도였다.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인 서임권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권한이나 중세 전반기 교회가 세속 군주의 도움과 보호를 받으면서 종속관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세속 군주가 서임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를 권력 남용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추악한 수준에 도달하여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흐름이 수도원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청에서도 있었다. 개혁파 성직자들은 교회 부패의 주요 원인을 세속군주의 서임 관행, 성직자 결혼, 성직매매로 보았고 그중 가장 큰 원인은 교회에 대해 부당한 간섭을 야기하고 있는 세속군주의 서임 관행이라 판단했다.

서임권은 세속군주의 중요 권력 기반이었다. 군주는 측근이나 친인척들을 무자격임에도 불구하고 고위 성직자로 임명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교회가 혼탁해지고 유력 귀족 가문 간에 권력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다. 그레고리우스 7(1020-1085)가 교황에 선출되면서 그는 모든 성직자와 세속지배자들이 기독교세계의 최고 정신적 지도자인 교황의 권위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유럽의 강력한 세속 지도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자 세속 서임에 반대하는 포고를 내렸다.

이는 교황 이외의 어느 누구도 주교나 수도원장을 임명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당시 색슨족 귀족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던 게르만 왕 하인리히 4(1050-1106)가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포고에 반발했다. 하인리히 4세는 왕이 주교 임명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이에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가 폐위되었음을 공포했다.

하인리히 4세는 독일 내 제후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지 못해 교황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1077)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투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지역의 제후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정치적 후원을 얻은 하인리히 4세는 1084년에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교황에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를 대립 교황으로 옹립했다. 결국 기베르는 그레고리오 7세 대신 교황 클레멘스 3세가 되어 하인리히 4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러나 독일 내 황제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꺼리는 귀족들 때문에 여전히 불안했다.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에 이르러 보름스 협약을 맺으면서 서임권 투쟁은 양보와 타협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에도 지속된 서임권을 둘러싼 분쟁은 1122년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사이의 보름스 협약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협약을 통하여 황제는 정치적 권리를, 교황은 서임권을 가질 수 있었다.

 

5. 17936월 자코뱅 독재가 수립된 이후 자코뱅파에 나타났던 제반 분파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프랑스 혁명은 파산 상태의 국왕이 삼부회를 소집하면서 구조적 문제가 폭발하면서 일어났다. 구체제의 모순은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 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구체제는 절대군주가 군림하면서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을 보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소외시킨 체제를 말한다.

프랑스는 가장 전형적인 절대주의 국가였다. 루이 15세 치세 동안 산업 등이 영국보다 뒤처지면서 대외전쟁 및 식민지경쟁에서도 밀려났다. 특히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전쟁 지원으로 프랑스 재정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특권계급에 대한 과세를 시도했으나 고등법원의 반발에 부딪혔다. 남은 방법은 삼부회의밖에 없었다. 삼부회는 중세 때 국왕이 자신의 결정, 특히 과세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열었던 신분제 의회를 말한다. 삼부회의는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았다. 삼부회의를 소집한다는 자체가 절대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자 혁명의 시발점이었다.

삼부회의는 신분별 표결과 머릿수 표결을 두고 타협하는 데 실패했다. 17896월 제3신분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머릿수 표결 관철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선언을 하면서 혁명의 서막이 올랐다. 루이 16세가 외국인 용병부대를 베르사유에 주둔시키면서 피리 민중은 국민방위대를 조직하고 자치를 선언했다. 민중은 국민방위대를 중심으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에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파리민중의 지지를 얻은 국민의회는 교회토지의 국유화 등 개혁을 단행했다. 국왕은 국민의회의 선언을 인가했으나, 오스트리아로 도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의회의 다수는 입헌군주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새로 소집된 입법회의에서 군주정과 공화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혁명정부는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입헌군주제와 자유경제를 추구하는 푀양파, 그리고 공화정을 추구하는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로 나뉘었다. 17924월에 국내외의 반혁명 움직임에 대항하면서 혁명전쟁이 시작되었다. 17928월 혁명전쟁의 전세가 불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피리 민중인 상퀼로트들이 다시 결집하여 왕궁인 튈르리와 감옥과 의회를 기습하여 왕정주의자와 반혁명분자들을 학살했다. 한편으로 혁명군은 패전을 거듭하다 발미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퇴했다. 발미전투의 승리와 동시에 프랑스 제1공화정이 수립되고 공민공회가 시작되었다.

폐위된 국왕에 대한 재판은 중산적 부르주아지 및 소생산자층에 기반을 둔 자코뱅파와 상층 부르주아지에 기반을 둔 지롱드파를 결정적으로 분열시켰다. 지롱드파는 귀족의 전제와 민중의 지나친 개입에 반대하고 중간계급의 확대, 소유권 중시, 경제적 자유 수호, 지방자치 옹호 등을 주장한 반면에 자코뱅파는 소생산자를 중심으로 한 자유롭고 평등하며, 도덕적인 덕의공화국을 추구하면서 구성원 간의 평등, 개인의 독립적 주권 지향,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추구했다.

이에 1793년 민중은 국민공회를 습격하여 지롱드파를 축출했다. 따라서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이 이끄는 자코뱅파가 급진적 혁명을 추진했다. 이로서 자코뱅파 독재가 수립된 것이다. 파리의 상퀼로트는 자코뱅의 파트너로서 직접민주주의의 경험과 활동을 하게 된다. 자코뱅이 주도한 ‘93년 헌법은 보통선거권, 노동권, 생존권을 규정한 민주적 헌법이었으나 실시가 보류되었다.

17939월부터 자코뱅정권은 공포정치를 실시하여 자코뱅 내부에 분열이 일어난다. 격양파, 에베르파의 좌파와 당통을 중심으로 한 우파인 관용파와 중간인 로베스피에르파로 3계열로 나누어졌다. 좌파인 에베르파와 격양파는 상퀼로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상퀼로트의 경제적 요구에 충실했다. 우파인 당통은 민중에 대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면서 공포정치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상퀼로트와 동맹하여 민중의 정치적 권리와 활동을 옹호하고 민생과 평등을 중시하고, 민중의 경제적 요구를 수용하고, 국민공회의 자코뱅 부르주아지 중심의 혁명 주도권을 추구하고, 지나친 경제적 통제나 사회 경제적 체제의 급변에 반대했다.

상퀼로트와의 연합을 담보했던 에베르파와 격양파는 과격한 비기독교화를 시도했다. 이에 로베스피에르는 관용파와 연합하여 좌파를 제거했다. 이후 파리의 상퀼로트는 혁명정부를 불신했다. 이어서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의 관용파마저 체포하여 처형시켜 독재 정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파리민중의 대다수인 상퀼로트와의 연대는 상실되었다.

상퀼로트들에 의한 민중봉기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자 온건파 부르주아의원들 중심으로 자신들도 언제 숙청당할지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여 처형시켰다. 이를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한다.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으로 공포정치는 종식되고 혁명에서 민중의 역할도 소멸되었다. 이어서 1795년 유산계급에 입각한 총재정부가 수립되었다. 총재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과 좌우파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군대에 의존했다. 결국 1799년 혁명군 지휘자인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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