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생공부

세계의 역사1

by 황교장 2021. 6. 18.

한국방송통신대학교 2021학년도 1학기 세계의 역사출석수업 대체 과제물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문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장 칼뱅의 종교개혁을 비교서술하시오.

 

. 서론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200여 년 동안 서유럽의 기독교 군대가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8차에 걸쳐 벌인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떨어졌다. 또한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교황들과 교회 일반은 세속권력을 추구하고 르네상스의 물질주의와 세속 가치를 지향하면서 탐욕과 부패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성당을 신축한다는 구실로 특사들을 독일 각지로 보내 면죄부를 팔아 유럽의 수많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불만을 샀다.

이에 독일의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면죄부 판매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다.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반면에 장 칼뱅(Jean Calvin,1509-1564)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했다.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요청받고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 본론

1.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루터는 1483년 작센안할트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하여 성공해 시민계급이 되었다.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로 인해 함께 가던 친구가 죽었다. 이를 계기로 학업을 중단하고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가 되었다.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95개조 논제가 나왔다.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가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여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후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했다. 구원이 인간의 내면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농민봉기에 대한 단호한 진압을 촉구했다. 이에 농민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으며 이후 루터는 독일 민중에 대한 종교적 주도권을 상실했다. 1555년 독일종교분쟁을 타결했던 아우스부르크 종교화의는 종교 선택의 권한을 세속군주에게 부여하면서 선택의 범위를 가톨릭교회와 루터파교회로 한정시켰다. 이후 독일 연방군주의 권한은 강화되었다. 이는 독일의 분열을 고착화했다.

 

 

2. 장 칼뱅의 종교개혁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 누아용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뮈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을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칼뱅은 인간의 구제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했다. 인간이 스스로의 구제를 확신하면서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직업활동과 엄격하고 도덕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교리는 당시 경제적으로 상승중인 중산층의 지지를 받아 영국,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로 전파되었다.

칼뱅주의는 새로운 상업문명을 받아들여 부의 축적, 자유방임, 직업소명의식의 근거를 제공했다는 주장이 강하다. 부르주아는 경제적 덕의 산출자임을 자부했으며, 17세기 청교도들은 칼뱅의 가르침을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제시되었다. 경제적 문제에 관한 한 프로테스탄트의 태도는 가톨릭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경제적 도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자본주의를 제약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택과 예정의 교의는 절약과 근면, 절제에 입각한 경제적 성공을 신의 호의의 명백한 증거로 믿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호응을 얻었으며, 당시 광범위한 사회집단을 고무했다. 이는 훗날 자본주의 집단의 급속한 성장에 기여한 측면을 부정하기 어렵다.

 

 

3.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 비교

당시 가톨릭교회는 구원이 신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교리에 따라 성사 및 선행, 성직자의 권위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면죄부는 죄에 대한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벌을 성직자가 면해준다는 의미다. 그러나 루터는 평등한 만인이 사제의 중재 없이 내면적인 믿음을 통하여 신과 직접 만날 수 있음을 설파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 가운데서 완전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교황청 권위에 대한 비판으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사회질서를 해친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영주들에게 영합했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루터의 교리는 성경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만 강조하는 원리적이고 고지식한 종교개혁이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율법, 신조, 기도, 성례전, 기독교신자의 자유에 관한 것을 담아 그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또한 칼뱅은 인간의 구제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과 자기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 신을 섬기는 일이고, 이웃을 섬기는 직업소명설은 결국은 근면한 인간을 키워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부자가 천국에 가기 힘들다고 말하며 무소유의 미덕을 주장하던 종래의 가톨릭과는 달리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부자가 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교리를 내세웠다.

 

 

. 결 론

십자군 전쟁과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신을 향한 내면적 신앙에만 입각한 구원관에 따라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친교황파인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황제에 대항하던 독일의 세속제후, 농민과 도시 서민층, 하급 기사층에게는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농민들이 농노제 등 기존 체제의 변혁을 추구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세속제후편에 서서 진압을 촉구해 루터 종교개혁의 한계점이 되었다.

프랑스 출신 칼뱅은 근면하고 금욕적인 현실생활을 통해 신이 선택한 자임이 증명된다는 예정설로 중산계층의 호응을 받았다. 이는 근대적인 직업관과 생활윤리의 형성에 기여했다. 이러한 칼뱅의 사상은 프랑스, 영국, 북유럽의 대중들과 상인계층에게 환영을 받았다. 칼뱅의 제자 존낙스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세운 것이 장로교다.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의 개신교는 거의 칼뱅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갤럽조사 2021년 현재 한국인의 종교 분포는 개신교 17%, 불교 16%, 천주교 6%.

개신교가 가장 많다. 개신교 중에서도 장로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장로교(長老敎, Presbyterianism)16세기 종교개혁 운동으로 형성된 유럽의 칼뱅주의적 개혁파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칼뱅주의 성격의 개신교 교파다. 존 녹스는 칼뱅의 제자로 스코틀랜드로 건너와 칼뱅의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하였다. 1866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가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평양에 입국했다가 순교함으로서 한국 개신교 순교자 1호가 되었다. 본격적으로는 1885년 미국 장로교회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 등의 선교활동으로 시작되었다.

'평생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화의 세계1  (0) 2021.06.20
한국사의 이해  (0) 2021.06.20
세계의 역사 2  (0) 2021.06.20
고전함께 읽기 - 논어  (0) 2021.05.23
유럽바로알기  (0) 2021.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