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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제주여행

한라산 산천단(山川壇)과 제주의 역사

by 황교장 2021. 9. 4.

한라산 산천단(山川壇)과 제주의 역사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매달 제주로 여행을 가더라도 고급호텔 및 골프장과 맛집만 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제주의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것을 공부하고 제주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여행하는 사람들이다.

이 두 부류의 차이는 사주팔자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사주팔자를 보면 여행을 좋아하는 사주가 있다. 지지에 인사신해를 갖고 있는 사주다. 이는 상당히 근거가 있다. 인사신해는 각 계절의 처음 오는 달을 말한다. 즉 봄의 시작은 인월이고 여름의 시작은 사월이고 가을의 시작은 신월이고 겨울의 시작은 해월이다. 이는 계절이 바뀌는 달이다. 이때는 변화가 많다. 그리고 약동하는 에너지가 넘친다. 일반적으로 사주에서 역마살과 지살이 있는 사람은 직업을 자주 바꾸거나 이사를 자주 한다고 한다. 이 역마살과 지살이 바로 인사신해이다.

여행을 더욱더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주는 인사신해가 식신과 상관으로 작용할 때다. 사주에서 인성은 이고 식신 상관은 이다. 그래서 인성과 식상이 있는 사람들은 공부를 잘한다. 그런데 식상만 있고 인성이 없는 사람은 공부는 못하나 돈은 있어 여행을 좋아한다.

인성과 식상이 있어서 여행을 좋아하는 사주와 식상만 있어 여행을 좋아하는 사주와는 차이가 있다. 인성과 식상이 고루 겸비된 사주는 여행을 하더라도 여행지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식상만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여행도 한 곳에 편중되어 있다. 고급호텔 및 골프와 맛집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이다. 어느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가 없다. 각 개인의 타고난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사주를 보면 시주에 인성과 식신이 같이 있어 전자에 속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지리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가 궁금했다. 초중학교 무렵에는 자전거를 타고 고향땅 근처 40리를 누볐고, 고등학교, 대학을 다닐 때는 오토바이를 타고 두루 100리를 헤매고 다녔다. 성인이 되어서는 40년 이상 일 년에 평균 80일을 배낭을 메고 전국 곳곳과 해외로 떠나곤 했다.

 

 

코로나 탓에 해외여행을 갈 수 없게 된 시간이 길어졌다. 그나마 제주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니 해외여행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여름 휴가철이 끝나 조금 한가해질 8월의 마지막날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가을장마가 온다는데 다행히 제주엔 비가 육지로 올라가 버려서 맑고 더워서 아직 한여름 기분이 남아 있다.

 

제주에 가면 자주 찾는 곳이 산천단이다. 제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탐라국 시절부터 한라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라 하여 해마다 2월에 백록담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냈다. 그러나 날씨가 춥고 길이 험해 그때마다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이 얼어 죽거나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1470(성종 1) 목사 이약동이 부임하여 이런 사실을 알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산신제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산천단에 들어서면 먼저 오래된 곰솔 여덟 그루가 풍취를 더해주고 있다. 큰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이 34도까지 올라간 열기를 식혀주고 있다. 이 곰솔들은 천연기념물 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오래된 곰솔이 있는 데에는 고대 신앙과 관련이 있다. 하늘에 있는 신이 인간 사회에 내려올 때에는 제관이 마련되어 있는 근처의 큰 나무에 내려온다고 믿었다. 이곳 곰솔들도 산천단 천제와 관련해서 하늘의 신이 내려오는 길 역할이 부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높이가 가장 높은 나무는 37m이고, 가슴높이 둘레는 6.9m라고 한다. 우리나라 소나무 종류 중에서 가장 높고 굵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소나무로 알려진 단종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 있는 관음송보다 더 높고 굵다. 관음송의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 천제단 곰솔 사이에서 예덕나무, 머귀나무, 팽나무, 쥐똥나무, 뽕나무 등이 자란다.

 

 

그런데 가장 굵은 나무에 철기둥이 있다. 나무가 고목이어서 이를 받히기 위한 철기둥인가 했는데 벼락을 방지하는 피뢰침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피뢰침을 산비탈 위쪽에 있는 나무에 설치하면 표도 안 나고 기능도 훨씬 뛰어나다고 한다. 빠른 시일 안에 이를 고쳐야 될 것 같다.

 

산천단을 백록담에서 이곳으로 옮긴 이약동(1416 - 1493)부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본관은 벽진이다. 1451(문종 1) 문과에 급제, 경사에 밝았으며 여러 번 군읍을 다스렸으나 언제나 청백으로 일관했다. 1470(성종 1)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관청이속들의 부정을 단속하여 민폐를 근절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세금을 감면받도록 했고, 휘하 고을 수령이 사냥을 할 때 임시 거처를 지어 민폐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등 제주목사 재임기간 내내 선정을 베풀었다. 제주에서 목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 오로지 채찍 하나만을 가지고 오려다가 이것도 제주도 물건이라 하면서 관루에 매달아 두었다. 오랜 뒤 채찍이 썩어 떨어지자 읍민들이 그 자리에 채찍을 그려 사모하였다고 한다.

또한 제주에서 오는 도중 풍파가 일어나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한 비장이 "도민들이 당신의 맑은 덕에 감격하여 갑옷 한 벌을 보냈습니다"고 하자 그것을 바다에 던지게 하니 파도가 가라앉았다 하여 사람들이 그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 부르고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했다.

나중에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고, 만년에 금산 하로촌에 살았다. 훗날 제주도에서 영혜사라는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중종 때에 이르러 그의 뛰어난 청렴결백을 들어 자손들을 관리로 등용했다고 한다.

 

 

이약동부사의 이 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제주 오현단에는 그가 없다. 오현단은 제주의 문화와 사상, 교육과 학문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기리는 제단이다. 오현은 제주에 유배 온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과 안무어사로 내려온 청음 김상헌,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를 말하는데, 김정이 1578년 처음 배향되고 송시열이 1695년 마지막으로 배향된 것을 보면 오현의 구성 기간이 100여 년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귤림서원에 위폐가 모셔진 인물들이다. 1871(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귤림서원이 철폐되면서 여기에 배향되었던 오현에 대한 제사도 일시 중지되었다. 그러나 제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하여 1892(고종 29)에 오현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마련되면서 오현단이라 불리게 되었다. 귤림서원이 자리했던 곳이 제주도민들에게 귤림서원 터로서보다는 오현단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귤림서원이 현판을 단 것은 현종6(1665)이다. 이는 소수서원이 처음 연 이후 11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제주에 서원이 세워진 것이다. 서원에는 충절과 학문으로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분을 모시는 게 일반적이다. 귤림서원에 처음 모신 분은 충암 김정이다. 이분은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대사헌,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 때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훗날 조광조와 함께 복관되어 영의정에 오르고 문간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동계 정온은 초계 정씨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자 할복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가 지내다 순절했다. 동계는 곧은 말을 잘해서 제주 대정에 10년간 유배되었다. 지금도 거창 위천면에 동계고택이 남아 있다. 동계고택의 종부는 경주 최부자의 큰 딸이다.

 

 

규암 송인수는 제주목사로 부임했으나 불과 몇 달 만에 육지로 돌아갔고, 우암 송시열은 833월에 제주도로 귀양 와 6월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김상헌도 제주에 머문 기간은 2개월도 안 된다. 이들이 직접적으로 제주를 위해 공헌한 것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약동의 손자 이인 목사는 할아버지인 이약동목사를 귤림서원에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귤림서원에 배향되도록 했다. 그런데 숙종 1(1675)에 제주도를 순무하고 돌아온 부호군 이선이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 중 귤림서원이 충암 김정,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을 배향함은 마땅하나 이인 목사가 유림과 상의없이 자신의 조부 이약동을 3현 위에 모셨는데 이는 철거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년 뒤 귤림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영혜사라는 사당을 짓고 그 위패를 모셨다.

 

 

제주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약동 목사가 가장 제주를 위한 인물이지만 귤림서원에 모셔지지 못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당시는 서인과 노론의 세상이다. 서인의 뿌리는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정암 조광조-휴암 백인걸-율곡 이이-사계 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진다. 송시열 이후 조선의 정치를 주름잡은 노론도 처음에는 사림파에서 출발했다. 귤원서원에 모셔진 인물들도 결국은 당시의 정치적인 힘을 가진 서인과 노론들에 의해 결정된 그들의 사람인 것이다. 귤림서원의 사액을 건의한 김석주는 당시 노론의 실세였다고 한다.

 

 

여기서 제주도의 역사를 살펴보자

 

제주도는 고대로부터 중국에서 한반도 남쪽을 거쳐 일본 큐슈[九州]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 지역을 왕래하던 선박들의 중도 기항지가 되었던 것이다. 제주도의 과거 유물·유적의 분포지가 대부분 제주도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의 선진문물의 유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28년 제주항 축항 공사 때에 인근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중국 한()나라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일괄 유물은 과거 제주도가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로 상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지적 조건으로 제주도의 문화는 본토와는 다른 특수성과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제주시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7~8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속칭 빌레못굴유적이 있다. 이 빌레못굴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순록과 황곰·붉은 사슴·노루 등의 뼈가 발견되었다. 순록과 황곰은 오늘날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만주 벌판에서도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주도가 예전에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연륙설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제주 고산리 유적(사적 제412)이 있다. 유물로는 즐문토기·무문토기·석부·마제석도 등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제주시를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초반부터 집단생활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 중 제주 삼양동 유적은 사적 제416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개벽신화의 터전인 제주 삼성혈도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제주 삼성혈(三姓穴)에 얽힌 신화는 선사시대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주 삼성혈은 제주도 사람의 발상지이자 개국의 성지로서 고((()의 세 신인(神人)이 이곳에서 솟아 나와 수렵생활로 연명하다가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맞이하여 이 땅에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문헌상으로 볼 때, 제주도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 기록보다는 중국의 역사서에 먼저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제주도의 경우,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주호(州胡)’에 관한 기록이 그 첫 예가 되겠다. 이 기록은 당시 제주도 사회의 미개상태를 다소 과장해서 서술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호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곳 사람들은 마한인들 보다 조금 키가 작고 언어도 한족(韓族)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鮮卑族)처럼 머리를 깎았으며,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가죽으로 만들어 입었는데, 상의만 있고 하의는 없어서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한()나라에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판다.”고 하였다.

 

탐라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러 제주시는 탐라국(耽羅國)의 중심지이며 관문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76(문주왕 2) 탐라국이 백제에 방물을 바쳤다. 이후 백제를 섬기다가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신라에 입조, 복속되었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660)한 직후에는 바다 건너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음을 신당서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당시 왜와 사신의 왕래와 문물교류의 기사도 보여 고대의 탐라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탐라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랫동안 사신 왕래가 있었으며, 교역도 이루어져서 탐라방포(耽羅方脯, 일명 耽羅脯)와 탐라복(耽羅鰒, 전복) 등의 물품을 일본에 수출하였다. 백제의 부흥운동 때에는 탐라국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함께 백강(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싸웠다.

 

925(태조 8)에 탐라는 처음으로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2년 후인 938년에는 탐라왕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하여 입조함으로써 고려의 조공국이 되었다.

 

탐라국 시대는 제주도가 성주(星主, 탐라국왕왕자(王子)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시기를 말한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성주와 왕자의 호칭은 신라 전성기에 탐라 왕족인 고후(高厚고청(高淸) 등 세 형제가 신라에 가서 왕을 찾아뵈었을 때 신라왕이 그들에게 성주·왕자·도내(徒內)의 작위를 주었던 데서 유래한다. 고려 태조도 신라의 예를 따라 말로(末老)에게 성주·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특히 성주는 국왕을 지칭하며 또 성주는 거의 독립적인 자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태자·세자라 칭하였다.

 

또한 고려에서는 탐라국 왕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무산계를 수여하거나 구당사를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내정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무산계는 무관에게 주었던 품계이며, 구당사는 탐라국 내의 민정을 살피고, 때로는 탐라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을 조정에 보고하고, 처리하게 하는 등 지방 통제를 강화할 필요에서 두어진 관직이었다. 그 뒤 숙종 10(1105)에 이르러 지방 행정구역으로 편제되면서 고려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성주는 군현으로 편성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여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하며 조선 초기까지 내려 왔다. 그러나 조선조 태종 2(1402)에 중앙의 행정력이 제주에 미치게 되면서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하면서부터 전과 같은 대우는 없어졌다.

 

더욱이 고려에서는 탐라국에서 오는 사신들을 중국의 송나라나 여진족·일본 등에서 왕래하는 사신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였다. 탐라국 사신들은 고려의 연중행사인 팔관회(토속신앙)나 연등회(불교행사)에도 참가했다. 또 이 때에는 물물 교역도 이루어졌다. 이 무렵 탐라국에서 진상했던 물품으로는 선박··우황·쇠뿔·쇠가죽·나육(螺肉비자·해조·진주·말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

 

1105(숙종 10)에 이르러 제주는 탐라군으로 개편되어 고려의 직접 관할하에 들어갔다. 1153(의종 7)에 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고종연간에 탐라가 제주로 개명되었고, 부사 및 판관을 두어 행정을 관장하였다. 충렬왕 21년에 가서는 제주목이 설치되었다. 1271(원종 12)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주에서 약 2년 반 웅거하였는데, 김방경(金方慶)이 이를 토벌하였다. 이후부터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다.

 

1276(충렬왕 2)에는 원나라가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몽골의 지배 때는 제주도가 그들의 직할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탐라·혹은 탐라국으로 호칭하였었다. 그러나 1294년에 원나라에 탐라를 돌려주기를 요구하여 고려에 환원된 뒤에는 다시 제주로 고쳤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 관리가 파견되면서부터 수탈이 자행되어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민란의 주된 요인은 관리의 가렴주구와 토호 권세가의 토지침탈, 조세·부역의 가중 등을 들 수 있다. 고려 관군과 삼별초간에 처음으로 공방전이 전개되었을 때, 현지 방어군이 적극 협력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들 또한 삼별초를 도왔기 때문에 관군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제주도 주민들이 삼별초를 도왔다는 것은 단순히 대몽 항쟁을 전개하고 있는 삼별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지금까지 겪어온 관리의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삼별초를 도왔던 것이라 한다.

 

1362(공민왕 11) 목호(牧胡)의 난으로 또 다시 탐라만호라는 관리가 두어져 관할되다가 1367년 고려의 요청에 의해 완전히 고려에 귀속되었다. 1374년 탐라에서 발호하던 목호들은 최영(崔塋)에 의해 완전히 토벌되었다.

 

조선시대

 

1402(태종 2)에 오랫동안 전래되어 오던 성주(星主왕자의 칭호가 폐지되어 성주가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가 우도지관으로 개칭됨으로써 종전의 토관직(土官職)이 없어지면서 제주 지배층이 없어졌다. 1416년에는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이 제주목이라 하여 목사가 두어지고, 산남은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이 정의현(旌義縣), 서쪽이 대정현(大靜縣)으로 구분되어 현감이 두어졌다. 이른바 제주삼읍이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목에는 정3품의 목사와 목사를 보좌하는 종5품의 판관, 그리고 대정과 정의 양현에는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그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609(광해군 1) 김치(金緻)가 판관으로 있을 때 동서 방리를 설치하고 약정(約正)을 두었다. 제주목에는 중면·좌면·우면, 정의현에 좌면·중면·우면, 대정현에는 우면·좌면을 두었다가 뒤에 제주목의 좌면이 신좌면과 구좌면으로 나뉘고, 우면도 그렇게 나뉘었다. 현재의 제주시 지역은 제주목의 중면에 해당된다.

 

인구도 고려 원종 15(1274)1223명이었던 것이 조선 세종 때에 와서는 삼읍의 민호가 9,935, 인구가 63,474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과밀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실업자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이주시키고, 범죄자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인구의 포화상태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게 되자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성종 원년(1470)부터 인조 2(1624)까지 약 150년 동안에 섬 안의 굶주리는 난민들이 도외 각지로 유망해버려 삼읍 인구가 급격이 감소된 것이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국법으로 유망을 금지하는 강경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출륙금지였다. 인조 7(1629)부터 순조 25(1825)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는 바다에 떠 있는 감옥으로 화하여 도민은 폐쇄된 생활을 영위하여야만 하였다.

 

제주도는 육지와는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조선조 약 500년을 통하여 거의 200여 명에 달하는 유배인들이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 신분도 위로는 광해군과 같은 폐왕이나 왕족, 정치인, 학자로부터 승려와 환관·도적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었으며, 사면 후 제주도에 정착하여 입도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대로 넘어오면서 12현의 행정체제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종래 부···현 등으로 번잡하게 나누어져 있던 것을 모두 군으로 단일화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목과 대정현·정의현이 모두 제주군·대정군·정의군의 3군으로 개편되어 제주부의 관할 구역이 되었으며, 목사와 두 현감도 모두 군수로 바뀌어 제주부의 관찰사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제주부의 관청은 제주에 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제주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갑오경장의 여파로 1894년 종래의 지방제도는 모두 폐지되었고 23개의 부로 개편됨에 따라, 제주는 제주부로 독립된 행정구역이 되었다. 제주군·정의군·대정군의 세 군을 제주부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1896(고종 33) 8월에는 전국 23부를 13도로 개정하였는데, 이 때 제주도는 제주목으로 개칭되었고 목사를 두었다.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 제주는 섬으로 육지와의 교통이 곤란할 뿐 아니라 나라에서 특별히 덕화(德化)를 베푸는 특수성으로 인해 목()을 설치하여 대정·정의 두 군을 관할케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주도에는 다시 12군 즉, 제주목과 대정군·정의군이 설치되어 전라도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광무 원년(1897) 11월에 제주군이 신설되면서 13군이 되었다가 동 10(1906) 9월에는 제주목사제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전라도 관찰사에게 이관시켰다. 이리하여 당시 제주도는 제주·대정·정의 3군 체제로 여전히 전라도에 소속되었다. 1908년에 목사가 폐지되고 부가 군으로 개정됨에 따라 제주목이 폐지되고 제주군이 되었다. 1909년에 대정군과 정의군이 폐지되어 제주군에 흡수됨으로써 제주도는 1개 군 12개 면 167개 이의 행정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제주시 지역은 이때 제주군 중면이었다.

 

일제강점기

 

한편 일제강점기인 1913년 중면이 제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15년에는 제주도의 군제(郡制)가 폐지되고 도사제(島司制)를 실시하여 도사로 하여금 경찰서장까지 겸하게 하였다. 1917년에는 환상(環狀)의 일주도로가 해안 마을을 관통하여 개통됨으로써 종래 내륙으로 진출하였던 말단 행정의 중심지가 해안 마을로 이동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1929년 당시의 제주면내의 호구수는 8,013, 35013인이었다. 1931년 제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소속되어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군단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다른 군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으리만치 활발했다.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본토에서의 운동에 호응한 운동도 있고, 또한 제주도의 독자적인 운동도 있다. 한국항일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성격과 비교하여 볼 때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주도민 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자본적, 반지주적 계급투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해방 전 제주도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고 여기에 보충적인 산업으로서 수산업과 목축업이 있었다. 그런데 소작쟁의(小作爭議)가 거의 안 보인다. 물론 1930년대의 가장 큰 투쟁으로서는 1932년의 '해녀항쟁'이 있었지만 이 투쟁도 수산자본에 대결한 해녀항쟁이라기보다도, 일제권력에 유착한 해녀어업조합에 대하여 해녀를 중심으로 결속된 마을공동체의 대결이란 성격이 농후하다.

 

둘째, 제주도 항일독립운동은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는 제주도 사상운동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로 김명식(金明植)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김명식은 한국 최초의 노농(勞農)단체로서 19204월에 창립된 '노농공제회(勞動共濟會)'의 발기인으로서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초창기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도 사상운동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영향이 직접, 간접적으로 매우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현대

 

1946년 제주도가 도()로 승격되었고, 195591일 제주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196211일에 14개 동의 행정동이 설치되었고, 1979523일에 일도동이 일도1·일도2동으로, 이도동이 이도1·이도2동으로 오라동이 오라동·연동으로 분리 되었다. 1983101일에 삼도동이 삼도1·삼도2동으로, 1985101일에 용담동이 용담1·용담2동으로 분리되었다. 20067월 북제주군을 통합하면서 일도1동 등 19, 한림읍 등 4개읍, 한경면 등 3개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8·15 해방으로 자주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1945910일 제주도 건준이 결성되었고, 922일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치안활동에 주력하면서 실질적으로 도내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자율적인 움직임과 함께 제주도에는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기용하면서,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을 키워갔다.

 

미군정의 정책은 도민의 반대에 부딪혔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중첩되면서 3·1사건과 4·3사건으로 도민들의 불만이 표출되었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3만 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제주 사회는 또 한 번 격변하였다. 4·3의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제주에는 엄청난 수의 피난민과 중공군 포로가 밀려들었다. 4·3에 이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제주도민은 권위주의적인 반공국가체제하에서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의식과 함께 국가의 물리력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의 역사 속에서 1990년대부터 제주도 개발의 기본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장기계획을 수립하여 제주도 고유의 향토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자연 및 자원을 보호하고 산업을 육성함과 동시에 관광여건을 조성함으로써 도민의 복지향상과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주의 역사 [歷史]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여러 백과사전을 비교 분석해 보았지만 위의 내용이 가장 알기 쉽고 간결하게 제주의 역사를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잘 정리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