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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제주여행

여미지 식물원 성박물관 송악산 추사적거지

by 황교장 2011. 1. 9.

 

여미지 식물원 성박물관 송악산 추사적거지

- 모라중학교 부장교사연수 3일차-

 

연수 3일차는 마라도 관광으로 예정되어 있다. 첫 배가 10시라 느긋하게 9시에 출발하기로 그 전날 기사분과 의논을 했다. 그런데 풍랑이 심하여 결항이라고 한다. 장소를 변경할 수밖에 없다. 우선 생각나는 곳이 여미지 식물원이었다. 또한 누군가가 성박물관이 좋다고 하여 꼭 한 번을 볼만하다고 강추했다고 한다.

 

마라도에서 자장면으로 아침을 먹기로 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우선 기사분에게 아침식사를 잘하는 식당을 안내를 받았다. 잘 알려진 집인지 아침부터 꽤 많은 분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제 아침에 먹은 전복 뚝배기가 하도 맛이 있어서 내가 전복 뚝배기를 시키자 대부분 선생님들도 전복 뚝배기를 시켰다. 상당히 맛이 좋았다. 값은 만 원으로 어제 아침보다 오천 원이나 쌌지만 맛은 별 차이가 없었다. 단지 전복의 크기가 작다는 것뿐이었다. 맛있게 먹고는 느긋하게 여미지 식물원으로 향했다.

 

 

여미지식물원은 신혼여행 후 한 번도 오지 못했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다. 여미지 식물원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주로 열대식물로 구성된 식물원이었다. 식물원을 한 시간 반 가량 구경을 하고는 성박물관으로 갔다. 비록 오학년이 넘은 나이이지만 남녀가 같이 간다는 것은 좀 쑥스러웠다. 남녀가 간격을 두고 구경을 했다. 개인적으로 1997년도에 독일의 베를린 성 박물관을 보았기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처음 본 단원 김홍도의 춘화도가 너무 야하게 그려져 있었다. 단원은 궁중 도화서의 화원이자 말년에는 연풍현감을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절에 관리가 이렇게도 사실적인 춘화도를 그릴 수 있었다는 점이 의문스러웠다.

 

다음 목적지는 송악산과 주변 올레길이다. 해안가 올레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은 올레길 제10코스로 요즈음 각광을 받는 코스이다. 아침에 숙소에 나설 때는 날이 맑아 화창했는데 여미지 식물원에 있을 때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다가 또 맑아지기를 반복한다. 송악산 올레길에 오니 날씨가 오락가락 하기는 마찬가지다.

 

 

 

 

 

 

 

모 부장선생님 왈 제주도 날씨를 여섯 자로 답해보라는 수수께끼를 냈다. '미친* 널뛰기'가 정답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씨다. 송악산 올레길을 따라서 가면 맑은 날에는 한라산이 다 보여 개인적으로는 제주도 최고의 경관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오늘도 한라산 정상 부분만 빼고는 대부분 다 보인다.

 

올레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가자 마라도와 가파도가 눈 앞에 펼쳐졌다.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이다.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우리 선생님들에게 해 주었다.

 '친한 친구 둘이서 노름은 했는데 한 친구가 돈을 많이 잃었다. 물론 외상놀음이었다. 따라서 잃은 친구가 딴 친구에게 이 노름빚을 꼭 갚아야만 되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말인즉 노름빚이라 갚아도 되고 말아도 된다고 했다.'

가파도와 마라도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그 이야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들도 외워야만 되는 지식은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가르치면 좋겠다.

 

 

올레길은 소문이 많이 났는지 평일인데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 돌아서 송악산 정상으로 향하였다. 송악산은 '절울이 오름'이라고 불린다. 이는 절벽에 파도가 부딪쳐 운다고 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절울이 오름은 오름 중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오늘은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분화구를 한 바퀴 돌고싶었지만 바람에 몸이 날려 분화구 안으로 떨어지면 큰 사고가 날 정도로 세어서 안전한 쪽을 택해서 올랐다.

 

 

송악산 정상에 오르니 삼방산과 형제섬 그리고 마라도와 가파도가 더욱 더 또렷하게 보인다. 송악산 정상에서 바라다 보는 분화구는 특이하다. 다른 오름들과는 달리 분화구가 두 개인 이중 화산체라고 한다. 가장 큰 분화구, 그 안에 또 다른 2차 분화구가 있다. 그리고  이곳의 지질은 붉은 송이층으로 되어 있다. 송이는 '스코리아'라 불리는 붉은 화산재 알갱이를 말한다. 

바람만 불지 않으면 가시거리가 괜찮은 편이다. 모 부장님은 송악산에 안 올라왔더라면 큰일날 뻔했다고 하였다. 어제 한라산도 똑 같은 말을 하더니 다시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번 연수가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다음 코스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배지인 추사적거지이다.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을 읽고 나서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석학은 추사선생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글씨, 그림, 금석학 등에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보다도 더 뛰어난 점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추사 선생이 9년간 위리 안치된 곳이 추사적거지이다. 전에 왔을 때는 박물관이 없었는데 지금은 지하로 된 박물관을 먼저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하로 들어가자 입구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세한도이다. 완당평전을 읽고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세한도와 판전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인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이는 추사 선생이 제주도로 유배를 온 지 5년째 되던 해(1844년)에 그린 작품이다. 선생의 나이 59세 때였다. 세한도는 추사선생의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제자인 이상적은 선생이 귀양살이하는 동안 지극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귀한 책들을 보내 드렸다. 선생이 그 보답으로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다. 선생은 세한도를 그리고 그 발문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 해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 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 주었도다. ......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세한(歲寒)〕 뒤에야 소나무〔송백(松柏)〕가 뒤늦게 시든다〔후조(後彫)〕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

 

이는 유홍준 교수가  번역한 내용이다. 선생으로서 이러한 제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추사선생이 부러울 따름이다. 완당평전에 나와 있는 이러한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박물관 안내표지를 따라서 쭉 가는데 실물 크기의 판전이 있다. 정말 큰 글씨다. 이렇게 큰 글씨를 쓰고 삼일 후에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판전의 낙관에는 "71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즉 '71세 된 과천사람이 병중에 쓰다'라는 뜻으로 추사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글씨에 대한 유홍준 교수의 평을 보면 다음과 같다.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있다. 이쯤 되면 불계공졸도 뛰어넘은 경지라고나 할까. 아니면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천하의 유홍준 교수가 이렇게 겸손한 표현을 쓴 것은 아마도 이 글뿐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시간 관계상 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박물관을 나와 추사선생이 위리안치된 곳을 보고는 제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예약해둔 모슬포에 있는 최남단식당으로 갔다.

 

 

이 집은 10여 년 전 지인의 소개로 간 집이었는데 정말 가격대비 먹거리가 좋은 집이다. 우리 선생님들 모두가 즐거워하신다. 여행의 즐거움 중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먹는 즐거움이다. 회 정식코스에는 돔 모둠회, 전복구이 등 각종 해물이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나와 혀와 눈을 기쁘게 하였다.

천천히 음식을 즐기고 4시가 조금 넘어서 식당을 나왔다. 모슬포에서 제주공항으로 가는 길은 눈이 내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였다. 이젠 아쉬움을 남기고 부산으로 향하면 된다.

부장연수 2박 3일을 무사히 끝마쳤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날씨 때문에 힘들기도 했고, 즐겁기도 하였다. 여행의 의미는 다녀온 뒤에 더 길고 오래 남는 법이다. 2박 3일 동안 축적한 에너지와 주고받은 이야기들은 2011년 한 해 동안 싹을 틔워 행복한 학교만들기로 꽃 피워 나갈 것을 믿는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믿고 따라준 여러 부장선생님, 빈틈 없이 준비하신 교감선생님과, 물심얌면으로 도와주신 행정실장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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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

I see this world has made you sad

Some people can be bad The things they do

the things they say

But baby

I'll wipe away those bitter tears

I'll chase away those restless fears

That turn your blue skies into grey

Why worry

there should be laughter after the pain

There should be sunshine after rain

These things have always been the same

So why worry now  why worry now

Baby when I get down I turn to you

And you make sense of what I do

I know it isn't hard to say

But baby

just when this world seems mean and cold

Our love comes shining red and gold

And all the rest is by the way

Why worry

there should be laughter after the pain

There should be sunshine after rain

These things have always been the same

So why worry now  why worry now

 

  그대여

난 세상이 당신을 슬프게 했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이는 잘못된 말과 행동으로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했었구요

하지만, 그대여

당신의 쓰디쓴 눈물을 내가 닦아 드릴께요.

당신의 푸르른 하늘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그 끝없는 두려움들을 내가 모두 걷어 드릴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기쁨은 고통을 뒤따라 오는 것이랍니다

비가 개이면 해는 뜨기 마련이구요

이건 결코 변할 수 없는 일들이잖아요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힘들때면,당신에게 갈께요

당신은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갖게 해주세요

내게 말해주기 어렵지 않을거에요

하지만 그대여

세상이 그저 잔인하고 냉정하게만 여겨질 때 일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욱 찬란히 빛을 발한답니다

그 외의 일들은 상관하지 말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기쁨은 고통을 뒤따라오는 것이랍니다

비가 개이면 해는 뜨기 마련이구요

이건 결코 변할 수 없는 일들이잖아요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