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영아리오름
제주도 여행에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외국여행이 금지된 칠팔십 년대에는 제주도가 신혼여행지의 대명사였다. 그것도 상위 20%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때는 해안가 일주도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를 돌면서 용두암, 만장굴, 산굼부리, 성읍민속촌, 비자림,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외돌개, 천지연폭포, 천자연폭포, 용머리해안, 산방산, 추사적거리, 협재굴, 한림공원 등을 보고 간다.
그 다음에 제주에 오면 섬에서 섬으로 가게 된다. 즉 우도, 가파도, 마라도를 다녀간다. 추자도까지 넣으면 좀더 세련된 여행이다. 그리고 이천년 대 이후에는 제주에 수많은 놀이동산들이 생겨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동산 중심으로 관광을 한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것을 하나라도 더 보여 주기위해 성산일출봉, 만장굴, 거문오름, 수월봉, 관덕정, 오현단, 추사관, 대정읍성, 대정향교 등을 다녀간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실과 어리목에서 시작하여 윗세오름을 거쳐 내려간다. 그리고 돈내코 코스가 다시 개방되어 돈내코까지 한라산 등산을 한다. 이어서 관음사에서 시작하여 백록담을 보고 성판악으로 내려오는 코스와 반대로 성판악에서 시작하여 관음사로 내려가는 코스를 다 완주하고 나면 제주도를 다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후 걷기 열풍이 일어나 올레길이 개발이 되어 올레길 중심으로 여행을 한다. 올레길에는 수많은 오름들이 있어 오름에 눈을 뜨게 된다. 제주여행의 마지막 단계가 오름 여행이라고 한다. 가장 인기 있는 오름은 용눈이오름을 필두로 아부오름, 백약이오름, 거문오름, 다랑쉬오름, 새별오름, 따라비오름, 송악산 등이다.
그 다음에는 나름대로 주제를 정하고 제주를 찾는다. 이번 제주여행의 주제는 람사르습지와 물이 있는 산정화구호오름으로 잡았다. 제주에는 람사르습지에 등록된 곳이 다섯 곳이나 된다. 람사르습지는 1971년 2월 이란의 람사르에서 채택된 람사르 협약에서 습지의 보전과 현명한 이용을 촉구하는 국제협약이다. 우리나라에서 람사르 협약에 처음 가입한 곳은 강원도 대암산 용늪이다. 나의 어릴 적 뛰어 놀던 창녕 우포늪이 두 번째로 가입이 되었고, 제주 물영아리오름은 다섯 번째로 가입이 되었다. 제주에는 물영아리오름을 필두로 물장오리오름, 1100고지 습지, 동백동산습지, 숨은물뱅듸 등이다. 이 중에 일반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은 물영아리오름과 1100고지 습지와 동백동산 습지만 볼 수 있다. 물장오리오름과 숨은물뱅듸는 접근 금지구역이다. 그리고 물이 있는 산정화구호로는 백록담을 필두로 사라오름, 물영아리오름, 물장오리오름, 금오름, 원당봉, 물찻오름, 어승생악, 동수악, 세미소 등 총 열 곳이다. 물영아리오름과 물장오리오름은 람사르습지이면서 산정화구호이다.
이번 제주 여행 동안 백록담, 사라오름, 물영아리오름, 1100고지습지, 금오름, 원당봉 등을 가볼 작정이었다. 붉은오름자연휴양림에서 이틀 동안 숙박한 것은 가까이에 성판악과 물영아리오름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6시경에 성판악 주차장으로 향했다. 성판악까지는 20여 분이 걸린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주차장이 이미 만차다. 주차공간이 생각보다 너무 좁다. 관리하는 사람이 10km 더 가면 무슨 대학교가 있는데 그곳에 주차를 하고는 대중교통으로 다시 오라고 한다. 난감했다. 이번 제주여행의 가장 주목적 중 하나는 사라오름을 보고 백록담까지 갔다 오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수미산으로 알려진 티뱃의 카알라스산 둘레길을 가기 위한 기초체력단련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주차를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이미 늦다. 사라오름과 백록담을 완주하려면 최소한 11시간을 필요로 한다. 급하게 걷다가는 무릎과 발목을 다칠 위험이 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바꾸었다. 내일 아침에 가기로 한 물영아리오름으로 먼저 가보기로 했다.
물영아리오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성판악에서 물영아리오름으로 가려면 다시 붉은오름자연휴양림을 지나가야 했다. 시간 낭비인 것 같아 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한 기분을 계속 갖고 있으면 오늘 일정 전체를 망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일진을 보니 신축년 병신월 임자일이다. 물이 아주 많은 날이다. 나의 사주를 보면 물이 용신이다. 그래서 일진을 믿고 오늘 백록담과 사라오름을 가는 것보다 물영아리오름을 가는 것이 더 큰 행운을 준다고 생각하자, 순식간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사주를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진이 안 좋은 날에는 매사에 조심을 하고, 일진이 좋은 날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하는 데 있다.
물영아리오름 주차장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텅 비어 있다. 성판악주차장과는 너무 대비가 된다. 사람들이 다 백록담에만 목숨을 거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물영아리주차장에서 성판악 출발 한라산 탐방 예약을 취소했다. 만약에 예약취소를 하지 않으면 3개월 동안 입산금지다. 주차장 앞에는 물영아리생태공원이 아주 잘 조성되어 있다.
공원 안 간판에는 물영아리오름에 내려오는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인근 수망리에서 한 청년이 소를 방목했는데 그만 소를 잃어버렸다. 청년은 소를 찾아 수망리 일대는 물론 주변의 오름을 샅샅이 뒤졌지만, 소는 없었고 결국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오름 정상까지 갔다. 그러다가 배고픔과 목마름에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다. 비몽사몽하고 있을 때 백발노인이 나타나 “여보게 젊은이, 소를 잃어버렸다고 상심하지 말게. 내가 그 소 값으로 이 오름 꼭대기에 큰 못을 만들어 놓겠네. 그러면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소들이 목마르지 않게 될 것이고 다시는 소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는 일도 덜어질 것이네. 부디 잃어버린 소는 잊어버리고 다시 한 마리를 구하여 부지런히 가꾸면 분명 살림이 늘어 궁색하지 않을 것이네.”라고 말했다. 눈을 떠보니 갑자기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눈앞에는 큰 못이 출렁거리고 못 가에는 소 한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전설치고는 좀 썰렁하게 느껴졌다.
공원을 지나자 탐방 안내소가 나온다. 이른 시간이라 안내소가 비어 있다. 안내소에서 물영아리오름 초입까지 약 700m의 길이 목초지 옆으로 잘 나 있다. 중간정도 지점에서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보이는 송아지가 서 있다. 길 옆 목장 안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소들은 보이지 않고 우리에서 빠져나온 송아지만 길을 잃고 해매고 있다.
송아지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이 불현듯이 생각났다. 순간적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이 되면 마을 뒷산에서 소먹이를 했다. 어릴 적 같이 놀았던 동무들의 얼굴과 ‘고생받기’라는 이름을 가진 자유형레슬링 비슷한 놀이를 했던 기억들도 함께 떠오른다.
드디어 오름이 시작이 된다. 제주의 오름은 쉬운 데가 잘 없다. 급경사다. 시작부터 가파른 계단이다. 계단길 가에는 삼나무가 울창하다. 숨이 차 더 이상 가기가 힘들어질 때쯤이면 삼나무 숲속에 쉼터를 마련해 놓았다. 쉼터 벤치에 앉아 숲의 정취를 느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쉼터 옆에 시가 적혀 있다. 물영아리오름을 노래한 시다.
그게 뭐 / 큰일이라고 / 벽 앞에서 울었을까 / 물영아리 천 여 계단 / 오르고야 알았다 / 벼랑길 / 한 두 번이야 / 누구나 만나는 것을 …(중략)
김영숙 작가의 <우아한 비행>
이곳에 어울리는 시라고 느껴진다. 이곳 계단이 천여 개라는 사실도 알았다. 맥박이 정상으로 되돌아와 다시 계단길을 올랐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급경사 길은 적응이 쉽지 않다. 서서히 몸에 땀이 밴다. 좀 쉬고 싶을 때 어김없이 쉼터가 나왔다. 나의 체력이 이 나이에도 국민 보통 체력은 되구나 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잠깐 쉬고 다시 출발을 했다. 또다시 숨이 차오른다. 또 쉬고 싶을 때 쉼터가 나왔다. 두 번째 쉼터에서 더 짧게 쉬어도 호흡이 안정되었다. 이젠 내 몸이 걷기에 적응이 되었다는 신호다. 지금부터는 아주 장시간 동안 걸어도 별무리가 없다는 것을 내 몸이 그동안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드디어 하늘이 바로 앞에 보인다. 능선정상이다. 아직 물영아리오름의 속살은 보여주지 않는다. 습지로 향해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있다. 우거진 숲길이 계속되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습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기분은 나의 필력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세로토닌보다 강한 다이돌핀이 분비된 것 같다. 황홀경 그 자체다. 제법 힘들게 올라온 오름의 수고보다 수백 배는 더 보상을 받는 것 같다. 인적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고요한 적막을 새소리가 가끔씩 깨우고 있다. 분화구 안에 수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수초들 사이사이마다 물이 드러나 보였다. 물과 수초가 어울려 더욱 신비롭게 보인다. 습지를 따라 나무 데크로 만든 탐방로가 정비되어 있어 습지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다. 어느 새 가을빛이 수초들에 내려앉아 있다. 무념무상으로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정신이 되돌아오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수화기제다. 수화기제는 주역의 64괘중 63번째 괘이다. 물이 불 위에 있는 형상이다. 물은 올라가고 불은 내려오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을 이루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이 수화기제인 것이다. 물영아리오름의 분화구가 불이라서 불의 기운은 올라가고, 그 위에 물이 있는 물의 기운은 내려오는 형상이 어김없이 수화기제(水火旣濟)를 나타낸다. 수화기제는 삼음, 삼양이 모두 자리가 바르고, 서로 응하여 완전무결함을 나타낸다. 지금의 물영아리오름의 모습이 완벽한 태고의 자연 모습이다.
물영아리오름의 뜻은 '산 정상에 물이 있는 신성한 산'이라는 뜻이다. 영아리의 '영(靈)'은 '신령스럽다'는 뜻이고, '아리'는 산을 뜻한다고 한다. 물영아리오름의 정상 높이가 508m, 화구의 지름이 약 220m이고, 호수의 둘레는 약 300m, 깊이는 약 40m라고 한다. 이곳에는 식물(255종), 조류(41종), 포유류(6종), 육상곤충(364종), 양서·파충류(11종), 저서성무척추동물(45종), 동식물 플랑크톤(59종)과 멸종위기 1급(4종) 검독수리, 매, 두점박이사슴벌레, 비바리뱀. 멸종위기 2급(6종) 벌매, 독수리, 팔색조, 긴꼬리딱새, 물장군, 애기뿔소똥구리 등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생명체의 보고다.
주역에서 63번째 괘인 수화기제가 끝나고 나면 화수미제(火水未濟)가 뒤이어서 온다.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로서 불이 위로 타오르고 물은 아래로 흘러 서로 사귀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는 것이 화수미제다. 흔히 신문에서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미제사건이라 한다. 바로 화수미제에서 나온 말이다. 이처럼 완벽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물영아리오름도 관리를 잘못하면 빠른 시간 내에 육지화되어 생명체가 더 이상 살수 없는 땅으로 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 골프장 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습지 보호에 악영향이 우려되고 있다고 한다.
흥분되었던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다시 습지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습지를 나섰다. 다시 능선에 오르자 조금 위쪽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경관 또한 일품이다. 한참을 조망하고는 산 정상 둘레길을 걸었다. 그런데 둘레길이 산 전체를 다 도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일부만 보여주고는 하산하게 한다. 길을 따라 삼나무 숲 사이를 내려오면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중잣성이 눈에 들어온다. 잣성은 조선시대에 제주 중산간 지역에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유물이라고 한다. 지대에 따라 하잣성, 중잣성, 상잣성으로 나뉜다. 물영아리오름에는 목장의 경계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중잣성이 견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오름에서 내려오는 길이 끝이 났다. 바로 오름 둘레길과 연결이 되어 있다. 둘레길을 조금 더 걷자 길가에 벤치가 있다. 벤치를 보는 순간 허기가 졌다. 사라오름과 백록담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준비한 도시락은 햇반과 김치, 그리고 김이 반찬의 전부다. 그런데도 맛은 꿀맛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아무 생각이 없다고들 한다. 지금이 그렇다. 식사 후 너무 퍼지면 더 이상 가기가 싫어진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시 걸었다.
둘레길은 정감이 가는 길이다. 모퉁이를 돌자 큰 목장이 나왔다. 목장을 통과하고는 한 바퀴를 돌았다. 송아지를 만났던 근처에 소몰이길이라는 안내판이 나왔다.
그런데 목장에는 들어갈 때 없었던 수십 마리의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길 잃은 송아지가 목초지 안으로 들어가 풀을 먹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송아지가 아니고 야생노루다. 별로 사람을 겁내지 않고 유유히 풀을 먹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물영아리오름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한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다음 여정은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동백동산 습지로 가려고 계획을 잡았지만 이미 걸음수가 만보가 넘었다. 동백동산 습지도 일주하려면 또 다시 만 보 이상을 걸어야만 되기에 체력을 안배하는 차원에서 조금 멀어도 제주도에서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탑인 불탑사오층석탑도 보고 원당봉의 화구호도 볼 겸 불탑사로 향했다.
'여행기 > 제주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당봉과 불탑사오층석탑의 풍수 (0) | 2021.09.12 |
---|---|
붉은오름 (0) | 2021.09.05 |
한라산 산천단(山川壇)과 제주의 역사 (0) | 2021.09.04 |
여미지 식물원 성박물관 송악산 추사적거지 (0) | 2011.01.09 |
한라산 어리목과 윗세오름- 모라중학교 부장교사연수 2일차 (0) | 2011.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