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당봉과 불탑사오층석탑의 풍수
원당봉은 높이 170.7m, 둘레 3,411m로 정상 분화구에 물이 있는 산정화구호이다. 또한 크고 작은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오름이다. 정상에는 삼각점 표지석과 시민 체력 단련 시설이 들어서 있다. 특히 정상에서 한라산 백록담의 봉우리와 주변의 오름들을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푸른 바다와 제주시 일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산 정상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산책로는 시민들의 체력단련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잘 조성되어 있다.
원당봉(元堂峯)은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삼첩칠봉(三疊七峯), 원당칠봉(元堂七峯), 원당악(元堂岳), 원당봉(元堂烽), 원당봉(元堂峰), 삼양봉(三陽峯), 삼양오름, 망오름, 등이다.
원당봉(元堂峯)은 고려시대에 이 오름 중턱에 원나라의 당집인 원당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삼첩칠봉과 원당칠봉은 이 오름이 3개의 능선과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원나라 기황후가 왕자를 얻기 위해 삼첩칠봉을 이루는 이곳에 원당사라는 절을 세우고 빌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삼양봉과 삼양오름은 이 오름이 제주시 삼양동에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여 원당봉(元堂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원당악(元堂岳)'이라 표기했다. 『탐라지』에는 "산봉우리에는 못이 있는데, '거북못'이라 한다. 이 못에는 개구리밥과 말, 거북이와 자라 등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이름은 삼첩칠봉이다. 칠봉은 원당봉 주봉을 중심으로, 북쪽에 망오름, 망오름 동쪽에 도산 오름, 서쪽에 앞오름, 앞오름 남서쪽에 펜안 오름 그리고 주봉과 망오름 사이에 나부기(동서로 나누어져 있어 동나부기, 서나부기)의 일곱 봉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한라산의 지맥이 땅속으로 이어져 기가 응집된 곳에 오름이 있다고 생각된다. 원당봉 풍수를 잘 보려면 비양도에서 보아야 한다. 비양도에서 원당봉을 보면 북동쪽 끝에 우뚝 독립적으로 솟아 있다. 한라산에서 출발한 혈맥이 산천단을 거쳐 마지막으로 맺힌 곳이 원당봉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혈자리는 높은 산에는 없다고 한다. 혈처는 과일나무의 과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과일은 가지 끝에 열리지 나무줄기에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한라산에서 맥이 흘러 동쪽 끝에 맺힌 한 봉우리가 원당봉이다. 따라서 원당봉 자체가 혈장이다. 그리고 원당봉 안에서도 가장 강한 기가 응집된 곳인 불탑사오층석탑이 있는 자리가 혈이라고 생각된다.
원당봉 안에는 절이 세 개 있다. 맨 위쪽 분화구에는 천태종의 문강사가 있고, 그 아래 분화구 쪽에 태고종의 원당사가 있고, 그 옆에 조계종인 불탑사가 있다. 경치는 문강사가 돋보인다.
절 앞 분화구에 연밭을 조성하여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문강사를 한 바퀴 돌아보면 아늑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조금 아쉬운 점은 물영아리오름과 같은 자연스러운 맛은 없고 인공이 가미가 된 점이다.
그동안 여러 답사팀을 모시고 이곳에 왔다. 보물 제 1187호로 지정된 불탑사오층석탑을 보기 위해서다.
“불탑사 오층석탑은 원래 원당사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사찰은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고 1950년대에 이 절터에 새로 불탑사가 들어섰다. 제주도 현무암으로 축조된 이 탑은 단층기단과 5층의 탑신부로 이루어졌다. 기단과 각층의 몸돌이 위로 갈수록 심하게 좁아져 가냘픈 인상을 주며 지붕돌의 네 귀퉁이 추녀 끝이 살짝 들려 있다. 기단은 뒷면을 뺀 세면에 안상을 얕게 새겼는데, 무늬의 바닥선을 꽃무늬가 솟아오른 것처럼 조각하였다.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만들었는데 특별한 장식을 두지 않은 간략한 형식이다. 현존하는 제주도 유일의 고려시대 불탑이다.”
이 내용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에 나오는 내용이다. 제주도에서 보물로 지정된 곳은 보물322호로 지정된 ‘관덕정’과 이곳의 '불탑사 오층석탑' 밖에 없다.
또한 이곳은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의 산세를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어느 승려의 말을 듣고 원나라 기황후가 사람들을 시켜 이곳에서 기도를 하게 한 덕으로 아들을 낳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기황후에 대하여 조금 짚고 넘어가자. 기황후는 기철의 누이동생이다. 기철은 기황후를 등에 업고 친원파 세력을 결집하여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 권세를 부리다가 공민왕에게 제거된 인물이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요사이 나라 풍속이 크게 바뀌어 오직 권세만 추구하게 되었다. 기철 등이 군주를 놀라게 하여 나라 법을 혼란에 빠뜨려 관리 선발, 인사이동을 마음대로 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 명령이 들쭉날쭉하였다. 또 다른 사람의 땅과 노비도 함부로 빼앗는다. 이것이 과인이 덕이 없는 탓인가. 기강이 서지 아니하여 통제할 방법이 없음인가? 깊이 그 까닭을 생각하니 늘 슬프게 되노라.”
‘원사(元史)’에는 기황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황후 기씨는 고려 사람이다. 황태자 애유식리달엽(愛猷識理達獵)을 낳았다. 원래 집안은 미천했으나 후에 귀하게 되어 3대가 모두 왕작으로 추봉됐다.”
기황후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기황후는 고려가 원나라에 바친 ‘공녀’였다. 원나라로 끌려간 뒤 고려 출신 내시의 도움으로 황제인 순제에게 차를 올리는 일을 맡았다. 타고난 미모와 지략을 활용하여 순제의 총애를 받아 제2황후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만큼 질시와 견제도 많이 받았다. 제1황후한테서 온갖 모욕뿐 아니라 심지어 매질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황후는 황실에서 모범적인 언행을 보였다. 돈을 모아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을 꾸준히 넓혀나갔다.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식량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그러나 이런 선행과 지지세력 확대만으로는 자신의 입지가 확실해질 수가 없었다.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황제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황후가 되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하자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의 산세를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한 승려의 비방을 받고는 천하의 이름난 풍수들을 동원해 천하를 두루 살펴 찾게 했다. 마침내 제주도 동북 해변에서 원하던 자리를 찾았다. 기황후는 사신을 보내 오층탑을 쌓게 하고 극진한 기도를 올리게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1339년 기황후는 원나라 황통을 이을 아들을 낳았다. 바로 소종황제(昭宗皇帝)다. 드디어 기황후는 황제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황제를 낳게 한 명당터의 석탑이 바로 불탑사오층석탑인 셈이다.
그후 불탑사오층석탑은 아들을 못 낳은 수많은 여인들이 불탑에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여 아들을 많이 낳았다고 하는 전설이 이어지고 있다. 아들을 낳고 싶은 분은 지금이라도 이 탑에서 빌면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은 아들보다 딸을 더 귀히 여기는 세상이다.
여기서 풍수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풍수지리의 핵심은 기(氣) 사상이자 자연유기체설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거대한 유기체로 본 것이다. 또한 풍수는 인간의 공간에 대한 전통적 지혜이자 문화현상이다.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은 기본적으로 산과 물과 바람이 주축이다. 따라서 산과 물 그리고 바람의 영향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이 같은 자연을 어떻게 잘 활용하여 인간에게 유용하게 활용하고자 하는데서 그 출발점이 있다.
즉 풍수는 공간의 논리를 염두에 두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주명리는 시간의 논리에 따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간의 흐름 속에 던져진 개개인들의 길흉화복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풍수와 사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활동하는 공간 무대를 연구하는 것이 풍수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것이 사주다.
우리 인간은 유한적인 존재다. 그 유한적인 존재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 살다가 땅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살아있는 동안의 공간을 양택이라 하고, 죽어서 땅속에 묻혀 영원히 잠드는 곳을 음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양택이 집터라면 음택은 무덤이다.
조선시대에는 양택보다도 음택을 더 중하게 여겼다. 심지어 관 송사의 반 이상이 묘지 송사라고 한다. 음택을 중하게 여긴 것은 명당에 묻힌 조상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동기감응이 있기 때문이다. 즉 명당에 묻힌 조상은 후손들을 복되게 하고, 흉지에 묻힌 조상은 후손들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서로가 명당에 조상을 묻으려고 안간힘을 다 쓴 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음택보다 양택을 더 중시한다. 지금은 대부분 화장을 하기 때문이다. 화장을 하면 조상과 자손이 동기감응이 되지 않아 해도없고 덕도 없는 무해무득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풍수는 살아있는 동안 평안하게 살기 위한 양택 풍수를 선호한다. 풍수가 좋은 아파트는 값이 많이 나간다. 풍수를 모를 때는 값비싼 집을 사면 된다는 말이 있다. 즉 살기 좋은 곳은 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풍수와 사주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다. 예를 들면 사주에서 불이 많아 문제가 있는 사람은 물가에 살아야 된다. 반대로 사주에 물이 많아 문제가 있는 사람은 태양이 내려쬐는 언덕 위의 집에 사는 것이 좋다는 논리다. 이는 수천 년의 경험에서 나오는 경험철학이기도 하다.
풍수(風水)는 藏風得水(장풍득수)의 준말이다. 즉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의미다. 장풍득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뒤에는 산이요, 앞은 물이라는 의미다. 풍수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는 사신사(四神砂)다. 사신사의 기능은 바람과 적의 침입을 막고 사람들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갖게 하며, 경관의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신사란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말한다. 북쪽을 등지고 왼쪽이 좌청룡, 오른쪽이 우백호, 남쪽이 남주작, 등 뒤가 북현무이다. 좌청룡은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보여야 하고, 우백호는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보여야 하며, 남주작은 주작새가 날아갈 듯 정결히 춤을 추는 모습으로, 북현무는 거북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는 북풍으로부터 바람을 막아주어야만 최적의 명당조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신사에 포근하게 쌓여 있는 곳이 혈장이고 혈장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혈이다. 혈 앞에 펼쳐진 곳이 명당이다. 한양을 예를 들면 북악산이 북현무다. 북현무를 주산이라고도 한다. 좌청룡은 낙산, 우백호는 인왕산, 남주작은 남산을 말한다. 사대문 안의 땅이 내명당이다. 그 안에서 경복궁이 들어선 자리가 혈장이며, 그 가운데 임금의 용상이 놓인 곳이 혈이 된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에서 흘러나온 물과 민가의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아져 흐르게끔 한 청계천이 명당수다. 또한 종로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풍수는 사람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공간을 만드는데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기황후가 아득히 먼 고려시대 먼 원나라까지 시집가서 아들을 낳기 위해 탑을 세운 곳이 바다 건너 제주의 원당봉이었다니... 그 염원이 무엇이었는가를 가늠해 보면서 불탑사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무그늘이 만들어 주는 시원함에 젖어 제주돌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불탑사오층석탑이 새삼스레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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