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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UFC84와 다문화 가정

by 황교장 2008. 5. 25.

UFC84와 다문화 가정

2008년 5월 25일 오전 8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1시 35분까지 장장 5시간 35분 동안 진행된 종합격투기 대회인 UFC84가 방금 끝났다. 어느 대회보다도 감격적이고 감동적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첫 UFC선수로 데뷔전을 당당하게 TKO로 승리한 김동현선수를 필두로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 대부분이 승리를 하였다.

마지막 메인 이벤트인 라이트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한국인 4세로 알려진 타고난 천재 비제이펜 선수가 노력하는 천재인 션셔크 선수를 3회 TKO로 이겨 타이틀을 지켰다.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선수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국인 피가 조금 섞였다는 선수에게도 마음이 가는 것을 보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그냥 헛말은 아닌 모양이다.

비제이펜 선수를 보면 관상학적으로 우리와 많이 닮아 있다.

첫째 얼굴의 골상이 조선족의 형태를 많이 갖고 있다. 그리고 피부색깔이 황인종에 가깝다. 그러나 눈과 눈썹 사이의 거리가 너무 짧다. 이는 서양인의 특징이다. 이 부분을 관상용어로는 전택이라고 하는데 관상에서는 재복(財福)을 나타내는 곳이다.

내 자신의 관상을 보면 전택이 짧고 눈이 깊게 들어가 있다. 나의 관상도 서구인 피를 약간은 이어 받은 상이다. 그리고 머리결을 보면 북방계인 순수 몽고족은 직모인데 반해 내 머리결은 약간 곱슬머리다. 곱슬머리는 남방계의 특징인 것이다. 그리고 눈에 쌍꺼풀도 나이가 들어감으로 생겼다. 이 또한 북방계가 아닌 남방계의 특징이다. 또한 더위는 아무리 더워도 참을 수 있는데 추위는 참지를 못한다.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면 나의 유전인자는 북방계와 남방계가 섞여 있으며 그 중에서 남방계가 더 우세하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은 북방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남방계와 피가 섞였다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남방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나의 호기심이 발동한 부분이었다.

 

우선 2003년 일본 국립유전자협회가 밝힌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의 DNA 미토콘드리아 염기배열 분석 자료를 살펴보자.

이 가운데 한국인의 DNA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21.9% : 중국인 DNA 타입

40.6% : 한국인 DNA 타입

17.4% : 오키나와인 DNA 타입

1.6% : 아이누인 DNA 타입

18.5% : 불분명한 DNA 타입(유래를 알 수 없음)

이 결과만 놓고 볼 때 한국인은 중국 일본 오키나와 심지어 일본원주민인 아이누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어제 보았던 책 「우리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박기현 지음, 역사의 아침, 2007)에서 이에 대한 많은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주요 내용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비운의 망명왕 유구 산남왕 온사도

유구(琉球)국은 지금의 오키나와를 말한다. 우리에게는 미군기지가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구국은 1879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에 귀속되기 전까지는 독립국가였다.

유구국은 신석기시대 이래 한반도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고 한다.

유구국에 대한 기록은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이 중에 “태조 15권 7년 10월 15일/ 산남왕 온사도(山南王 溫沙道)가 죽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정권다툼에서 패배한 산남왕이 조선에 망명생활을 하다가 죽은 것이다. 그의 수행원 15명과 함께 이들이 퍼뜨린 후손들은 아마도 이 나라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오키나와인 타입의 유전자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록 거리는 멀지만 해류의 영향으로 유구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2. 베트남 망명 왕족 이용상 -화산 이씨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의 첫 독립국가인 리씨 왕조(1009-1226)의 8대왕 혜종의 숙부이자 왕자 신분의 군 총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부터 약 10년 전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들이 선조의 고향 베트남에 찾아갔다. 선조들이 고려 고종 13년(1226)에 망명한 지 770여 년 만이었다. 그들은 베트남이 선조의 땅이니 한번 가보기라도 하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에 갔다. 그러나 도착하고 나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국의 보통 시민들을 맞이하기 위해 베트남의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했고, 정부는 베트남인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며 깍듯이 왕손 예우를 했기 때문이다. 현지 언론들은 이 나라의 왕조가 남긴 유일한 왕손이 금의환향했다고 대서특필했다.

‘800년 만에 끊겨버린 리씨 왕조의 왕통이 부활했다’가 당시언론에 보도된 내용의 머리기사였다. 지금도 해마다 리씨 왕조 건국기념식(음력 3월 15일)에는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된다.”

베트남인들이 그토록 환영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자.

리씨 왕조는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의 최초의 왕조이다. 그리고 칭기즈칸 시절 세계 최강인 몽골군을 자력으로 물리친 왕조이다. 고려의 무신정권이 60년간 대몽 항쟁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자랑스러운 일인데 리씨 왕조는 세계 최강몽골을 이겼으니 그 자긍심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인 것이다. 이 리씨 왕조의 혈통도 우리나라 고려조의 왕씨처럼 다음 정권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베트남 본국에는 거의 다 사라져버린 혈통이라고 한다. 그러한 리씨 왕족의 순수 혈통이 우리나라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얼마나 가슴 찡한 일인가!

 

3. 흉노족 왕자 김일제 -경주 김씨

추사 김정희가 해동비고(海東碑攷)에서 자신이 문무왕비를 재발굴했음을 상세히 밝혀 고증했다. 문무왕 비문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의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문무왕 위로 신라 왕족의 혈통을 밝혀놓은 것인데,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는 대목은 ‘투후 제천지윤’이라는 말이다. 투후는 중국의 한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된 흉노왕 휴도의 아들 김일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증된다. 이는 신라 김씨는 흉노족에게서 혈통이 이어진 전형적인 한반도 귀화인이 되는 셈이다.

또한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김일제의 자손 중 또 다른 김씨들은 한반도 남부 가락으로 대거 이주해와 김해 김씨의 수로왕의 시조도 된다고 주장을 한다. 만약 이 주장대로라면 우리나라 인구의 20% 이상이 김일제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김수로왕과 김알지계가 어떤 지역에서든 이주해 온 것은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4. 이 외에도 대표적인 귀화인은 김해 허씨의 시조인 ‘인도 야유타의 공주 허황옥’ ,원나라 공주를 따라와서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된 ‘위그르 출신 장순릉’, 이성계의 오른팔인 백전백승의 장수인 여진족 이지란은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외에도 조선을 사랑한 일본 장수 김충선, 소주 가씨, 네들란드인 박연, 평해 구씨 시조 구대림, 거창 신씨, 곽재우장군을 배출한 현풍 곽씨등 우리나라에 귀화한 성씨들이 많이 있다.

 

5. 이상에서 볼 때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반적인 견해는 우리나라의 조상은 주로 몽골 및 동남북 시베리아인 집단에서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유전자형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자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이중적인 집단형태를 보인다.

곧 한국인 집단은 초기 한반도에 먼저 정착한 동북아시아인과 대규모로 이동해 들어온 중국 남부의 농경집단이 혼합되는 복합적인 형성과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이다. 결국 우리민족은 다양한 이주 집단이 귀화한 결과로 태동된 다민족 집단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교육을 통해 단일민족이라는 교육을 많이 받아 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고찰해아 알 수 있듯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단일민족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국민 8명 가운데 1명이 국제결혼을 하는 시대다. 2005년 4월 전국의 여성결혼이민자 수는 66,912명이라고 한다. 이는 전체 결혼의 13,6%를 차지한다. 20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다. 이 중 한국계 여성과 결혼한 귀화한 남성들은 새로운 성의 시조가 된다. 이 새로운 성씨가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앞으로 10년만 지나면 더욱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학교에도 초등학교에는 다문화가정의 학생이 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곧 중등학교까지 이어질 것이다. 학교 안에서 다인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대가 바로 우리 눈 앞에 와 있거나 이미 왔다.

 

그러면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여기에서 선조들에게 한 수를 배워보자

화산 이씨는 고려시대에 베트남 혼혈인으로 살았지만 당시 혼혈에 대한 차별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고종은 그의 처지를 가련히 여겨 식읍을 하사하고 그를 ‘화산군’으로 특봉했다. 조선 태조는 이지란에게 개국일등공신을 주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했다. 우리 나라에 살려고 이주해 온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적대한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혜택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UFC84에서도 한 수 배웠다. 서구인들은 인종의 흑백에 따라 응원하지 않는다. 국적에 따라 응원한다. 영국에서 경기를 하면 영국 국적의 흑인을 응원하지. 미국 국적의 백인을 응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 민족, 다 인종 국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농촌 총각의 약 40%가 국제결혼을 한다고 한다. 앞으로 10년만 있으면 우리 농촌에는 색깔이 다른 피부와 인종이 많이 태어날 것이다. 지금까지 하듯이 단일민족임을 내세워 그들을 배타적으로 대한다면 큰 사회적 갈등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철처히 해야한다.

이 문제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아 이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행청소년이 되어 사회에 해를 끼친다면 이 때 들어가야 할 간접비용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우리 나라 여성 1인 당 출산율이 1.2명으로 세계 최저라고 한다. 인구감소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자리잡을 것이다. 인구감소와 다문화가정은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 인구감소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거나, 또 개선된다하더라도 다문화가정은 이미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우리 학교에도 다문화가정이 있다. 형제간인데 아직 조사통계만 나왔지 직접지도를 못한 실정이다. 내일 당장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담임과 상담을 해야겠다. 작은 관심이 큰 걱정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