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송여중 직원연수 - 퇴계종택 이육사문학관 농암종택 조지훈문학관
2013년 여름 방학 직원연수는 경북 북부지방의 선비 문화와 문학기행을 체험하고자 떠났다. 답사의 순서는 재송여중- 신대구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남안동IC- 조탑리오층전탑과 권정생 생가 - 안동간고등어 및 헛제삿밥(중식) - 퇴계종택 - 이육사문학관 -대자연가든(석식) - 농암종택(1박, 조식) -퇴계 예던길 -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 - 서석지 - 봉감모전오층석탑 - 부산으로 정하고 떠났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분 몇 분 외에는 전직원이 참여한 직원연수다. 관리자가 된 후 지금까지 내가 근무한 학교의 직원연수 중 참여율이 최고라고 생각된다.
출발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조금 늦게 차에 올랐는데 표정들이 너무 밝다.
소풍가는 학생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학교를 출발하여 청도 휴게소까지는 화기애애하게 갔다. 휴게소를 지나자 교무부장의 명사회로 바로 개인별 장기자랑을 시작하였다.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가자 평소에 조용하게 지내는 분들도 숨겨둔 실력을 한껏 발휘를 했다.
남안동IC로 나와 첫 답사처인 조탑리오층전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여름햇빛이 강했지만 선생님들의 표정은 일상을 떠나 여행지로 온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탑은 수리 중에 있었다. 사전답사 때 신세동7층전탑이 수리중이어서 이곳 조탑리오층전탑으로 일정을 바꾸었는데 안동의 전탑은 전부 보수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전탑(塼塔)은 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로 쌓아올린 탑이다. 탑의 형태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풍토와 환경에 맞게 변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이 많아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안동조탑동오층전탑(보물57호)은 전탑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전탑 다섯 기 중 하나이다.
전탑을 보지 못하고는 근처에 있는, 동화작가이신 고 권정생선생이 살던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허물어져 가고 있는 선생의 소박한 두칸집은 잡초가 무성했다. 선생은 평생을 욕심 없이 아이들과 더불어 청순하게 살다가 갔다.
선생은 세상을 뜨기 전,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 달라.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또한 자신의 집터를 허물어 다시 자연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도 아직 남겨두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어지지를 않는다.
안동댐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안동지역의 전통음식인 간고등어와 헛제삿밥을 먹었다. 색다른 맛을 보았다고 다들 즐거워한다. 식사 후에는 조정댐에 다리를 놓아 건너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 강을 건넜다. 따가운 여름 날씨지만 강을 건너는 풍광은 일품이다.
다음 여정인 퇴계종택으로 향했다. 퇴계종택은 ‘퇴계 종손은 경상감사보다도 더 좋다’는 퇴계 종손분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종택이 있는 곳의 지명 전체는 토계(土溪 혹은 兎溪)이나 이곳은 조금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상계(上溪)라 한다. 퇴계선생은 ‘토계’의 토를 물러날 퇴(退)로 고쳐 호를 퇴계(退溪)라 했다고 한다. 이 토계의 개울을 건너면 종택이 나온다.
종택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秋月寒水亭(추월한수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을 만난다. 추월한수정 마루에는 먼저 온 연수생들이 연수를 받고 있어 우리가 들어갈 곳이 없었다.
추월한수정은 1715년에 도산서원 원장인 권두경이 이집 종손과 논의하여 영남사림의 모금으로 지었고, '秋月寒水亭'의 편액은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의 '先生之心 如秋月寒水 (선생지심 여추월한수. 선생의 마음은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 )'에서 취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종택의 대문에 있는 정려를 보러 갔다. 종택 대문 위에 烈女通德郞行司 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열녀통덕랑행사 서직장이안도처공인안동권씨지려)란 긴 정려 글씨가 쓰여 있다.
열녀는 퇴계선생의 손부 권씨이다. 즉 이안도(李安道)의 부인이다. 권씨는 남편이 죽은 후 밥을 먹지 않고 좁쌀미음으로 연명했다.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은 채 23년을 띠를 풀지 않았다.
"내가 죽지 못하고 명을 이어가는 것은 다만 후사(後嗣) 때문이다. 만일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이를 대할 것인가!" 했다고 한다.
결국 후사는 조카 억으로 결정되었다. 억이 혼인하여 며느리와 함께 들어오는 날 목욕재계한 후 소복을 입고 자결했다. 열녀 정려는 초상 중에 내려왔고, 부인의 시신은 열녀문을 나와 발인되었다고 한다.
종택 앞 다리 건너기 전 천 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나오는 계상서당이 있다. 23세의 율곡 이이(李珥)가 계상서당을 찾아와 58세인 퇴계선생과 도학을 논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선생님들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어 강세황이 그렸다는 계상서당도와 지금의 경치를 맞추어 보라고 했다. 그림과 차이가 나는 것은 도로 때문이다. 도로가 없다고 생각하면 같을 것이라고 하자 ‘정말 맞네’라고 하면서 즐거워한다.
다음 코스는 이육사문학관이다. 육사는 퇴계선생의 후손이다. 퇴계종택이 있는 곳이 상계이고, 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1559-1637)가 터를 잡은 곳이 하계다. 퇴계가 상계를 개척했고, 손자 동암이 하계를 열었다. 그리고 동암의 증손자가 원촌을 개척했다. 상계는 16세기, 하계는 17세기, 원촌은 18세기로 대략 100년을 간격으로 열어 나갔다. 따라서 이 일대는 퇴계선생의 후손들이 땅을 개척하고 살아온 동네다.
원촌마을에서 육사가 태어났다. 원촌마을은 풍광이 빼어나다. 낙동강이 청량산을 돌아 원촌에 와서야 제법 강의 자태를 나타낸다. 더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호연지기를 기를 만한 곳이다. 풍수상으로는 오지탄금형(五指彈琴型)이라고 한다. 이는 마을 뒤로 뻗어 내려온 다섯 산줄기와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의 조화는 다섯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 형국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이육사문학관으로 갔다. 문학관에서 육사에 관한 짧은 기록영화를 보았다. 전에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육사시인의 외동따님인 이옥비 여사께서 직접 강사로 나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찬찬히 이야기를 했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몇 분들은 여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문학관을 나와 오늘의 목적지인 농암종택으로 향했다.
종택에 들어서자 종손님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동안 여러 번 종손님과 만나 많은 담소를 나누었다. 매번 찾아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각자 방 배정을 마치고는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식사는 앞강에서 잡은 자연산 물고기로 끓인 매운탕이었다. 농암종택에서 식당이 있는 대자연가든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정도 가야 한다. 이 길도 전혀 개발되지 않는 순수 자연 그대로여서 참 아름답다. 삼삼오오로 걸어가면서 많은 분들이 고맙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곳이 있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경치가 좋으니 밥맛이 저절로 좋다. 저녁 식사를 하고서는 다시 농암종택으로 돌아왔다. 갈 때의 길과 올 때의 길은 같은 길이지만 항상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진다. 주당들은 남아 있고 주당이 아닌 분들은 나를 따라 강으로 나갔다. 이 강은 낙동강 상류다. 인간의 발자국 흔적이 없는 흰 모래와 몽돌로 되어 있는 백사장이다.
우리들은 양말을 벗고 손에 신을 들고는 백사장을 걸었다. 걷다가는 물속에 발을 담갔다. 시원하다. 그런데 물살이 제법 세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 날에는 맑고 푸른 강물의 풍광이 일품이지만 전날 비가 많이 온 관계로 수량이 많고 조금 탁했다. 그런데도 우리 선생님들은 동심으로 돌아가 강가 백사장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었다.
이곳에 오면 항상 질문하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본다. 대부분은 가족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은 옛날 애인이 떠오른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한다. 여성동지들은 옛날애인을 그리워하는 분이 많은 것 같다.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일 게다.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리워진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져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9시에 분강서원 대청마루에서 모두 모이기로 하였다. 대부분 선생님들이 다 참석하였다. 부산에서 출발할 때 총무들이 미리 아이스박스에다 자연산 붕장어회를 충분히 준비를 해 가지고 왔다.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니 아직 얼음이 그대로 남아 있어 회의 신선도가 유지되었다.
이곳은 노래방 같은 시설이 없는지라 미리 장구를 준비했다. 장구로 반주를 못하는 노래가 없다고 해도 반신반의하던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장구를 치면서 박자를 맞추어주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서서히 그동안 미처 몰랐던 각자의 장기자랑이 나오기 시작했다. 열기는 점차 고조되어 간다. ‘장구 치고 노는 놀이가 이처럼 재미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고 다들 입을 모은다. 우리 어린 시절만 해도 놀이 하면 장구였는데 그새 그런 문화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가락에 대한 느낌은 핏속에 전해오는 것인지 다들 즐거워하였다.
장구 가락에 맞추어 노래 부르며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보니 그 동안 어색했거나 오해와 나쁜 감정들이 말끔히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힐링이었다. 이렇게 구성원들이 자신이 마음을 정화하고 인간애로 뭉치면 교육의 질과 효율성은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그러니 교육의 질과 효율을 높이려면 먼저 구성원 각자가 행복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내일의 일정을 위해서는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 내일 아침에 퇴계예뎐길을 가야 하기에 아쉬움을 남겨두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 5시 반에 예던길로 출발하기 위해 서원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단한 열정이다.
예던길의 ‘예던’ 혹은 ‘녀던’은 ‘걷던’의 고어(古語)이다. 퇴계예던길은 퇴계선생이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걸어갔던 옛길이란 뜻이다.
강물이 너무 많이 불어 있다. 밤 사이에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역에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예던길 가는 길도 비로 인해 많이 젖어 있다. 그나마 길이 잘 닦여 있어 다행이었다.
30여 분 걸어 미천장담(彌川長潭)에 도착하니 물이 많이 불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곳은 수백 평 되는 너럭바위와 공룡발자국이 보이는 곳인데 장마비에 물에 다 잠겨 볼 수가 없다. 불과 사람 몇 명만 설 수 있는 공간만 남겨두고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큰소리가 났다. 몇 분이 벌에 쏘인 것이다. 벌집을 건드린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는 나도 3방을 쏘였다. 땡벌이다. 제법 따끔하다.
벌과 관련된 어릴 때 기억이 난다. 7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동네 친구들을 모아놓고 벌은 주인을 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 집 벌통을 발로 찼다. 그런데 이 벌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 온 몸을 쏘았다. 특히 머리 부분에 집중적으로 쏘았다. 벌은 어두운 곳을 집중하여 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우리집 개처럼 벌도 주인을 알아보는 줄 알았던 것이다. 주인을 알아보는 개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벌을 구별할 수 없었던 나이였다.
벌침에 쏘이면 그 해 겨울에 감기에 안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다. 봉침에 있는 성분이 페니실린의 2만 배의 항생효과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 벌에 쏘인 분들은 정말 행운아라고 말해주었다. 예던길을 계획대로 다 가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좋은 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주어 다행이다.
아침식사는 뷔페식으로 나왔다. 메뉴는 이집 종부가 직접 만든 이집만의 특색이 있는 양반식 식단이다. 종손이 황교장선생님이 오셨다고 집사람이 다른 손님들보다 반찬이 세 가지나 더 마련했다고 우리 선생님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분이 좋아 오랜만에 두 그릇을 먹었다. 아마 어린 시절을 빼고는 난생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종손님이 다른 학교 교장선생님은 우아하고 품위 있게 독방을 쓰면서 혼자 조용히 산책도 하고 책을 보시다가 가는데, 나는 교장이 장구도 치고 가이드도 하고 완전히 무수리 교장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자기는 마당쇠 종손이란다. 그런 점에서 서로 닮았다고 농을 하신다. 종손님은 도산전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유명한 한문학자이시다.
농암종택은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이현보 선생은 가사문학의 효시인 어부가를 지은 분으로 퇴계선생의 도산12곡과 고산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에 영향을 끼친 분이다.
농암종택은 원래 지금의 도산서원 근처인 분강촌에 있었다. 분강촌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다시 이곳으로 옮겨온 곳이다. 이곳의 농암종택은 현재 17대 종손인 이성원님이 수몰된 이후 30년 만에 터전을 잡은 곳이다. 농암종택은 1370년경에 지어졌고, 1526년에 그린 ‘분천헌연도’에도 그 모습이 뚜렷하다고 한다.
종택 가까이에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의 명소가 감싸고 있어 그 자체가 아름다움인 곳이다. 종택의 면적은 만 오천 평이다. 그 주변까지 합치면 10만 평이 넘는다. 아마 내가 아는 종택 중에서는 가장 넓은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 풍수 또한 일품이다. 지금까지 이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완벽한 풍수를 자랑하고 있다. 사신사(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뚜렷하다.
이 집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집은 긍구당이다. 긍구당만은 농암선생이 살아 계실 때에도 있었던 건물로 최소한 600년 이상 된 집이다. 사실은 오늘 내가 이 방에서 자고 싶었다. 그러나 교감선생님에게 양보를 했다. 그런데 정작 교감선생님은 올 수가 없었다. 교장연수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감선생님과 함께 자기로 한 분들의 복으로 돌아갔다.
긍구당(肯構堂)이란 서경(書經) 대고편(大誥篇)에 나오는 구절로, ‘조상의 업적을 길이길이 이어받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긍구당 현판 글씨는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는 신잠(申潛, 1491-1554, 신숙주의 증손자)선생이 쓴 전서체이다. 이곳에 올 때면 늘 긍구당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싶었다. 또다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 자주 오라는 농암선생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움을 남겨두고는 조지훈선생의 고향인 영양 주실마을로 향했다. 농암종택에서 주실마을로 가는 길은 언제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청량산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물을 따라간다. 유홍준교수도 이 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아름다운 길이라고 극찬을 하였다. 강물이 불어 좀 탁한 것을 빼고는 산천이 너무 아름답다.
1시간을 달리자 주실마을에 도착했다. 주실마을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이 마을에 오면 제일 먼저 조지훈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으로 안내를 한다.
이 집과 주실마을에서 제일 많이 거론하는 것이 문필봉이다. 호은종택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앞에 산이 있다. 이 산이 바로 문필봉이다. 풍수에서 앞에 있는 산을 안산(案山)이라고 한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의 봉우리가 글을 쓸 때 붓끝을 닮았다고 해서 문필봉이라고 한다.
즉 정삼각형의 산이다. 삼각형의 산은 오행 중 목형의 산이다. 목은 성장 발달을 뜻하므로 끊임없이 연구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문필봉이 좋은 마을에는 반드시 훌륭한 학자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마을 중 대표적인 문필봉이 있는 마을이 주실마을이고 그 중 호은종택에서 바라보는 문필봉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래서 이집에는 대대로 문장가들이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호은종택에는 370년 동안 내려온 가훈이 있다. 바로 삼불차(三不借)다. 삼불차란 세 가지는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셋째는 문불차(文不借)이다.
재불차란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호은종택 앞에는 논이 만 평이 있는데 370년 동안 그대로 종손들에게 전해져 왔고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인불차는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집안은 대가 끊기면 양자를 데려다가 종손으로 삼는데 이 집은 16대 동안 한 번도 양자를 들인 적이 없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생명력이다. 아마 이 집의 집터와 무관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문불차는 문장을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호은종택에서 문학관까지 가는 마을길은 정겹다. 이 길에 피어 있는 꽃들을 물어본다. 참깨와 땅콩이다. 농촌에서 자라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참깨와 땅콩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게다.
마을길에서 오랜만에 금줄의 고추를 보았다.
아들을 낳으면 금줄을 쳐서 고추를 단 것을 어릴 적에는 많이 보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거의 보지를 못했는데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우리 선생님들은 조지훈문학관을 너무 열심히 관람을 한다. 주실마을을 답사하고 나오는 길에 모 선생님이 내 곁에 와서는 너무 고맙다고 한다. 이육사문학관과 조지훈 문학관을 너무 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이룰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이 말 한 마디에 나도 덩달아 너무 행복했다.
전에 왔을 때에는 주실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개천이 크게 눈에 뛰지 않았는데 이번에 보니까 정말 교과서적인 개천이다. 택리지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형국을 띠고 있다. 마을을 감싸고 흐르면서 마지막 물길은 마을에서 볼 수 없도록 흐르고 있다. 이는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수구가 닫혀 있는 형국이다.
우리 일행은 다시 영남의 최고 정자로 평가 받고 있는 서석지로 갔다. 호남을 대표하는 정자가 소쇄원이라면 영남을 대표하는 정자는 서석지다.
영양읍을 우회하여 서석지로 가는 길목도 아름답다. 서석지가 있는 곳이 입암면이다. 서석지 들어가는 입구에 입암이 있다. 차가 빨리 달리는 바람에 사진 찍는데 실패를 했다.
서석지에 들어서자마자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한다. 연꽃이 절정이다.
경정 마루에 앉으니 연못과 연꽃, 사우단, 서석 등이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 모두가 넋을 놓고 있다. 아무도 갈 생각을 않는다. 모 선생님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가면 안 되는지를 물었다. 혼자 주무시고 내일 오시라고 했다. 다들 한바탕 웃었다. 그런데 누워서 한숨을 자고 갈 수는 있으니 누워도 좋다고 했다. 몇 분들이 정답게 누워 있다. 정말로 한가롭게 느껴진다.
서석지(瑞石池)는 글자를 풀이하면 상서로운 돌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연못 안에 울퉁불퉁 솟아난 60여 개의 서석들이 깔려 있다. 이 돌들은 ‘석영사암’이라서 물속에서도 돌빛이 희게 빛나 보여 기이함을 더해준다. 이 돌들은 다른 곳에서 갖고 와 조성한 것이 아니고 본래 그 자리에 있는 것을 그대로 살리면서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석지는 광해군 5년(1613) 석문 정영방(1577-1650)선생이 조성한 민가의 연못이다. 서석지 경정에 걸려 있는 임천산수도(林泉山水圖)를 보면 이곳은 일월산에서 용맥이 뻗어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이곳에서 혈이 맺힌 명당자리다. 연못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주일재(主一齋), 서쪽에 경정(敬亭), 뒤쪽에는 수직사(守直舍)가 있다. 연못은 자연스럽게 자연석으로 쌓았고 연못 북쪽에는 네모난 단을 만들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서석지'라고 이름을 붙인 데에는 자연석인 서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서석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석간수를 이용하여 연못에 물을 채운다. 이곳은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여 자연과 인간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멋으로 만들었다.
어느 선생님이 서석지가 작년에 갔던 소쇄원보다 못하다고 한다. 이유는 자연미가 없고 마을 한 가운데에 있어 답답하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서석지를 조성할 당시에 작성된 임천산수도를 보면 이 마을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서석지만 있다. 만약에 마을이 없고 앞산과 개천이 보인다면 지금과는 달리 보일것이라고 설명을 하자 이해를 하는 것 같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마지막 답사처인 봉감모전오층석탑으로 향했다. 이곳 역시 아직까지도 때가 묻지 않은 순수성을 갖고 있다. 강가에는 지금도 수달이 서식할 정도로 깨끗하다. 봉감모전오층석탑(국보 187호)은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5층 모전석탑으로 봉감 마을에 있기 때문에 봉감탑이라고도 불린다. 모전석탑은 우리나라 문화가 만들어낸 특이한 탑으로 벽돌모양으로 돌을 잘라 쌓은 석탑이다. 모전석탑의 재료는 돌이나, 쌓는 방법은 전탑을 닮았다. 석탑과 모전석탑의 형식상 차이는 지붕돌의 낙수면 모습이다.
석탑은 처마선이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이지만 전탑이나 모전석탑은 층층이 쌓았기 때문에 계단처럼 층급을 이룬다. 모전석탑은 일종의 과도기적인 형식이다. 모전석탑의 원조는 경주에 있는 분황사석탑이다.
봉감모전오층석탑이 이번 연수의 마지막 코스였다. 내려가는 길에 있는 몸에 좋다는 청송 달기약수로 만든 닭백숙을 먹고는 직원연수를 마쳤다.
젊게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는 사랑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행이라고 한다. 우리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아마 이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번 연수의 가장 큰 의미는 늘 함께하는 분들끼리 1박2일을 같이 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한편으로 외롭고 쓸쓸한 존재다. 누군가 곁에 있어도 외로울 때가 많다. 가까이에 있는 분들과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같이 하는 여행이 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좋은 대안이 된다. 여행은 일상의 고민이나 고통에서 벗어나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유적지가 있는 곳으로의 여행은 더욱더 좋다. 문화유적은 나보다 먼저 살다가 간 선현들의 자취가 배어 있고. 선현들의 아름다운 삶은 시공을 떠나 공감을 형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수백 년을 이어온 종택과 천 년 이상 버텨온 탑은 더 많은 사연을 전해준다.
여행의 기억은 되돌아보면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서 사람 사이의 정이 더 깊어져서일 것이다. 이러한 정으로 남은 학교생활을 더 활기차게 보람되게 행복하게 살기를 빌어본다.
직원연수를 다녀온 이후 한 달여 시간들이 지났지만 당시의 사진들을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늦게나마 여행기를 남긴다.
직원연수에 적극 협조해 주신 교감선생님 실장님 부장선생님 찬조금을 내신 선생님 그리고 친목회장님과 몸 바쳐 일한 총무님, 동참해 준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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