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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70 청춘 초등 동창생들과 함께 한 중국 여행 4-성도-

by 황교장 2023. 11. 19.

70 청춘 초등 동창생들과 함께 한 중국 여행 4

-성도-

2023년 10월 22일 일요일 아침이다. 어제 늦게 공산당 연수원에 투숙하여 9시에 출발을 했다. 구황공항에서 오늘 비행기가 11시 30분에 뜬다고 하지만 날씨라는 게 믿을 수가 없다. 만약에 또 결항이 되면 오늘 하루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다. 그래서 버스로 성도로 가기로 했다. 아쉽지만 이번 여행의 목적지 중 하나인 낙산대불은 볼 수가 없다. 다시 황룡에서 성도로 향했다.

주변의 풍경들은 낯익은 모습이지만 역으로 가는 길은 또 다른 맛이 있다. 육칠십 년대 우리 친구들과 함께한 어린 시절 놀았던 시골 모습과 많이 닮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차는 민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고 있다. 출발지인 황룡이 해발 2,900m였는데 갈 수록 해발 고도가 낮아지고 있다.

중간에 휴게실에 들러 지방의 특산품인 과일들을 사 먹기도 하면서 성도로 향한다. 그런데 이정표에 도강언(都江堰) 40km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갈 때는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민강

“중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다(中国历史上最激动人心的工程不是长城而是都江堰, 중국역사상최격동인심적공정부시장성이시도강언)”라고 할 정도로 중국에서 만리장성보다도 더 위대한 건축물로 인식되는 도강언이 바로 이곳에 있다. 표지판은 도강언 2km로 가까이에 왔다. 급류로 흐르던 민강이 이곳에 와서는 큰 강으로 변해 있다.

차창으로 도강언을 보려 해도 보이지가 않는다. 장강의 지류인 민강(岷江)은 상류 지역의 눈이 녹으면서 범람하여 자주 주변 지역에 홍수 피해를 일으켰다. 이에 기원전 256년 진(秦)나라 촉군의 태수로 있던 ‘이빙(李氷)’ 부자가 이 지역의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건설한 대형 수리시설이 도강언이다. 도강언 건설로 경작이 가능한 토지가 1만 경에 달했다고 한다.

도강언

“물이 가물어도 사람들이 굶주림을 알지 못했고, 흉년이 없어 천하가 일컫기를 하늘의 곳간이라 한다(水旱從人, 不知饑饉. 時無荒年, 天下謂之天府, 水旱從人, 수한종인, 부지기근. 시무황년, 천하위지천부)” 이 ‘하늘의 곳간’이란 뜻의 ‘천부지국'(天府之國)’은 이후 사천 지역을 뜻하는 호칭이 되었다. 우리가 내린 공항도 성도 천부 국제공항이다.

도강언

도강언 건설로 인한 국가의 富(부)는 이후 진(秦)나라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이빙 부자는 물길을 주류인 외강(外江)과 지류인 내강(內江)으로 갈라지게 한 뒤, 내강에서는 보병구(寶甁口)라는 수로를 만들어 주변 지역의 농업 용수로 사용토록 하였다.

도강언

내강에는 외강으로 연결되는 비사언(飛沙堰)이라는 제방을 하나 더 설치하여 홍수로 내강이 범람해도 비사언을 통해 물과 흙이 외강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수량을 안정시켰다.

이때 치수의 핵심은 강 가운데 서 있는 어취(魚嘴)이다.

어취

이 어취는 강의 중간에 위치해 물을 외강(外江)과 내강(內江)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鱼嘴’ 는 ‘물고기의 주둥이’라는 뜻으로 물고기의 주둥이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도강언은 한나라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보수와 개량이 이루어졌다. 특히 제갈량은 “북벌할 때 이 언(도강언)에서 나는 곡식에 의지했다(諸葛亮北征, 以此堰農本, 제갈량북정, 이차언농본)”고 한다.

도강언을 지나 흘러간 민강의 본류는 낙산대불이 있는 곳에서 칭이강(靑衣江)과 다두강(大渡河)이 합류한다. 이 부근에서 세 강이 합류하다보니 수량이 많아 인명사고가 많이 일어나곤 했다.

낙산대불

당나라 현종 개원 원년인 713년에 승려 해통(海通)이 강에 배가 안전하게 지나다니기를 기원하면서 낙산대불을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90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803년에 완성하였다.

낙산대불

손가락 길이가 3m이며 양 어깨의 넓이는 28m이다. 7m의 나무를 깎아 만들어 그 위에 진흙을 씌운 두 귀는 고대 토목 공학 기술의 경이라고 평가받는다. 낙산대불의 높이는 71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이곳은 중국 땅에 불교가 최초로 정착하여 동방 전역으로 널리 퍼진 곳이기도 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낙산대불이 등재되어 있다.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해 계획된 낙산대불을 보지 못한 것은 이곳 성도에 죽기 전에 다시 오라는 부처님의 계시라고 느껴졌다. 우리 친구들을 태운 차량은 성도 시내 중심가를 지나 드디어 무후사에 도착했다.

무후사(武侯祠) 경내에 들어서면 유비(劉備, 161~223)를 모신 사당이 나오는데 한소열묘(漢昭烈廟)라 쓰인 편액이 붙어 있다. 한소열묘 전각 앞에는 業紹高光(업소고광) 이 걸려 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의 제업을 이어받았다는 뜻으로 촉한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입구 벽에는 남송의 무장 악비(岳飛)의 글씨인 후출사표(後出師表)가 있다. 굉장한 필력이다.

악비 후출사표

촉한(蜀漢) 제1대 황제 유비는 ‘반드시 북방을 수복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227년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단행했다. 제갈량이 출정하기에 앞서 촉한의 제2대 황제 유선(劉禪) 앞에 나아가 바친 글이 출사표이다.

출사표는 전후 두 편이 있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곳에 있는 출사표는 후출사표이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진(晉)나라 이밀(李密)이 무제에게 올린 진정표(陳情表)와 당(唐)나라 한유가 쓴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과 함께 중국 3대 명문으로 꼽힌다. 예로부터 ‘진정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고,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충신이 아니다.’라고 했다.

유비상

건물 가운데 유비상이 있다. 유비상은 큰 귀를 강조하고 있다. 큰 귀는 관상학에서 인자함과 장수를 뜻한다. 양 옆에는 유비의 아들인 유선과 손자 유심의 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유심만 남아 있다. 유선은 나라를 망하게 한 군주라서 남송 때 없앴다고 한다. 손자인 유심은 끝까지 위나라와 싸워 전사했다. 그리고 오른쪽 편전에는 관우의 상이, 왼쪽 편전에는 장비의 상이 세워져 있고, 동서 양쪽 낭하에는 촉한의 문관과 무장 28인의 소상이 간략한 소개와 함께 진열되어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장비의 상이다.

장비상

장비를 흑인의 얼굴로 만들어 놓았다.

유비는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재위 221∼223)로 자는 현덕(玄德), 묘호는 소열제(昭烈帝)이다.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皇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다. 관우, 장비와 결의형제를 하였으며,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맞아들였다. 220년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한나라 헌제에게 양위를 받아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漢:蜀漢)이라 하였다. 다음 해 장비가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부하들이 장비의 목을 가지고 오나라로 달아나자 유비는 형주 탈환과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 손권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릉(夷陵) 전투에서 대패한 후 백제성(白帝城)에서 후사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223년 4월 6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소열황제이고, 그해 8월에 이곳 혜릉으로 이장하였다.

유비를 모신 사당 뒤에는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사당인 무후사가 나온다.

무후사

제갈량은 서주(徐州) 낭야(琅琊) 사람으로,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공명(孔明)이고, 호는 와룡(臥龍), 복룡(伏龍)이다.

제갈량상

이곳 사당에 제갈량 좌우에는 그의 아들 제갈첨(227~263)과 손자인 제갈상이 있다. 제갈량이 죽을 때 제갈첨은 8세였다. 17세의 나이에 후주 유선의 딸과 결혼하여 군사장군(軍師將軍)에 오르는 등 승진을 거듭하여 명망이 높았다. 263년, 위나라 장군 등애가 소도를 통해 촉나라를 공격하자, 군사를 이끌고 면죽에서 맞섰다. 등애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하면 낭야왕(琅邪王)으로 봉할 것을 주청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제갈첨은 크게 노하며 거절했다. 그는 면죽에서 포위당하자 돌파를 시도하다가 장남 제갈상 등과 함께 전사했다.

제갈첨상

손자 제갈상(244~263)은 부친 제갈첨을 따라 선봉장으로 출전하였다. 그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우리 부자는 나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따라서 백성들이 재난을 받게 할 수 없다. 오늘의 실패로 살아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외치며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고 한다.

제갈상의 상

제갈상이 전사할 당시 그의 동생 제갈경(諸葛京)은 아직 어린 나이여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제갈경은 훗날 중원으로 이주해서 진(晉)나라에서 관직을 받았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후손을 남겼다.

무후사는 신하의 사당이기 때문에 유비의 사당 아래에 위치한다. 제갈량의 사당에 걸려 있는 名垂宇宙(명수우주)는 ‘이름이 온 천하에 울린다’는 의미로 두보가 무후사에 들러 제갈량을 기리며 쓴 시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제갈량은 207년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에게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안하게 된다. 당시 유비는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공명의 처소에 직접 찾아가 그 유명한 三顧草廬(삼고초려)의 고사를 남겼다.

이처럼 무후사에는 황제인 유비의 사당과 신하인 제갈량의 사당이 함께 있다. 이런 사례는 중국 내에서도 유일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제갈량의 무덤은 없다. 무덤은 산시(陝西)성 한중 분지의 면(勉)현 정군산 근처에 있다. 제갈량 무덤의 정식 명칭은 무후묘(武侯墓)이다.

제갈량의 묘

무후사는 서진(西晉) 말년에 이웅(李雄)이 세운 것으로, 원래는 성도 성안에 있었으나 뒤에 남쪽 교외의 유비(劉備) 사당인 소열묘 옆으로 옮겼다가 명나라 초에 소열묘와 합쳤다고 한다. 따라서 건물의 앞부분은 소열묘(昭烈廟), 뒷부분이 무후사(武侯祠)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옛날부터 그냥 무후사라고만 일컬어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제갈량이 유비보다도 더 민중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는 유비·관우·장비를 모신 사당 삼의묘(三儀廟)가 있다.

삼의묘

마지막으로 간 곳은 유비가 실제로 묻힌 혜릉이다. 능으로 가는 길의 벽은 온통 붉은색이다.

223년 4월 백제성에서 죽은 유비를 제갈량이 이곳으로 옮겨 8월에 혜릉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유비의 부인 감씨(甘氏)와 오씨(吳氏)의 유골도 합장하였다. 능묘는 높이 12m, 둘레 180m로 마치 작은 산처럼 보인다.

혜릉

혜릉을 마지막으로 삼국지의 성지인 무후사를 나오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한 사람 있었다. 제갈량의 맞수였던 사마의 중달이다. 5차 북벌인 234년에 제갈량은 오장원에 식량을 비축하고 지역 주민들과 친밀도를 높여가면서 주변을 장악하였다. 제갈량과 대치하고 있던 위군 총수인 사마의는 견벽거수(堅壁拒守) 전략을 고수하였다. 제갈공명은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사마의를 자극하려고 여인들이 쓰는 건괵(巾幗)을 보내 조롱하였다. 건괵은 여인들이 머리에 쓰는 쓰개의 일종이다.

하지만, 사마의는 태연히 제갈량이 보내온 건괵을 쓰고 제갈량의 사신을 맞았다. 그 사신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과정에서 공명이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아주 소식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에 사마의는 “食少事煩 安能久乎(식소사번 안능구호, 공명이 그리 적게 먹고 일을 많이 하니 어찌 오래 살 것인가?” 라고 하면서 전군에 “堅壁拒守以逸待勞(견벽거수이일대로)”라고 명령을 내렸다. 즉 철벽 수비로, 막아내기만 하고, 아군은 한가로이 쉬고, 적군은 도발하느라 피로가 쌓여 녹아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이다.

사신이 무심코 던진 이야기로 사마의는 지금 공명이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4개월간의 대치 끝에 제갈량은 더 버티지 못하고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자손들에게 남긴 재산으로는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참고 기다린 사마의가 승리한 것이다.

사마의

사마의(司馬懿,179~251)의 자(字)는 중달(仲達)이다. 삼국시대에 위(魏) 나라의 조조(曹操, 155~220, 武帝로 추존), 조비(曹丕, 文帝 재위 220~226), 조예(曹叡, 明帝 재위 226~239), 조방(曹芳, 哀帝 재위 239~254) 등 4대(代)를 보필하며 공을 세워 무양후(舞陽侯)에 봉해졌다. 239년 명제(明帝) 조예가 임종할 때 조상과 함께 애제 조방을 보좌할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조상은 사마의에게 군권을 빼앗으려고 하여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사마의는 치밀한 계산과 인내로 병을 핑계를 대고 권력의 일선에서 일단 물러섰다. 249년 그는 제왕 조방과 대장군 조상이 명제의 무덤인 고평릉에 간 틈을 타서 모든 성문을 폐쇄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고평릉의 정변’이라 한다. 이어서 그는 황태후의 명령을 사칭하여 조상 형제의 모든 관직을 박탈한 후 모반죄를 뒤집어씌워 조상 형제와 그 무리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로써 조정의 대권이 모조리 사마의의 손에 들어갔다. 그 뒤 상국(相國, 재상) 자리를 받고 안평군공(安平郡公)으로 봉해지는 등 권력을 독단하다가 251년에 73세로 병으로 죽었다.

사마염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을 두 차례 막아내고, 요동을 평정했다. 근검절약에 앞장서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등애, 왕기, 주진 등을 발탁하여 천하를 멀리 내다보고 경략하는 인재 선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둔전을 일으키고 치수사업을 벌여 경제 발전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훗날 삼국통일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차남 사마소가 진왕(晉王)으로 봉해진 후 선왕(宣王)으로 추봉되었고, 그의 손자인 진 무제(晉武帝) 사마염이 즉위한 후 선제(宣帝)로 추증되었다. 묘호(廟號)를 고조(高祖)라 하였다.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두 살이 많으면서도 17년을 더 오래 살았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사마염(司馬炎, 236~290)이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무제는 268년에 제갈량의 손자인 제갈경을 미현(郿縣)의 현령(縣令)으로 임명하였다. 사마염은 그의 조부인 제갈량이 촉한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부친인 제갈첨이 국난에 의롭게 죽은 것을 치하하였다고 한다. 이후 제갈경은 강주자사(江州刺史)에까지 이르렀다. 오늘날 제갈량의 후손은 모두 제갈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이곳에는 승자인 사마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고 소설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각색된 인물들만 숭배하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책인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책이다. 위대한 문학작품은 승패보다는 인간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가치를 주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혜릉을 돌아 나오면 금리(錦里) 거리와 연결이 되어 있다. 금리 거리의 금은 비단 錦(금)이다. 옛날 이곳은 소주, 항주 다음으로 비단 거리로 유명했다고 한다.

금리거리

그래서 아직 이곳의 지명이 비단을 사고파는 거리라는 뜻으로 ‘금리’라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지금은 당시 촉의 문화와 청나라 시대의 양식을 테마로 꾸며 놓은 보행자 거리다. 쓰촨성 전통문화를 테마로 했기 때문에 고풍스러움이 곳곳에 묻어난다. 잠시나마 아득히 먼 과거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금리 거리를 나와 맛사지를 받고 저녁을 먹은 뒤 변금을 보러 사천성 천극원으로 갔다.

변검은 천극지화(川劇之花)라고도 불리며 파촉 공연예술뿐 아니라 파촉 문화의 명물로 알려져 있다. 변검은 천극을 공연할 때 배우가 얼굴에 있는 검보(臉譜)를 극의 분위기에 따라 바꾸는 연출기법을 말한다.

변검은 천극에서만 볼 수 있는 연기기술로 등장인물의 감정변화와 독특한 개성을 얼굴에 나타내는 얼굴분장이다. 변검의 臉(검)은 빰, 얼굴을 말한다. 이 공연기법은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며 변검(變臉)이라는 배우의 서스펜스를 통해 관중을 극 속으로 몰입시키는 역할을 하여 오락성과 재미를 한층 고조시킨다.

천극은 예로부터 ‘촉의 배우는 대부분 문장에 능하며 박학다식하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내용이 다양하고 대사가 세련되며 문학적이다. 동시에 천극은 사천방언과 노래를 이용한 사천인 특유의 유머감각에서 나온 재치 있는 말과 연기로 대중의 웃음을 끊임없이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아주 재미있게 크게 웃는데 외국인인 우리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잘 보았다. 자연경관도 좋지만 이처럼 여행지의 문화 예술을 보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다.

이것으로 4박 5일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2023년 10월 23일 무사히 인천공항에 잘 도착하였다.

 

유어초등학교 38회 동기생들의 칠순 잔치 여행을 2023년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2박 3일간 삼척 솔비치 리조트에서 하고 또 4박 5일 중국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이러한 여행이 가능한 데에는 두 친구의 리더십(leadership)과 잘 따라준 우리 친구들의 폴로우십(followship)이 잘 조화된 덕분이라 생각된다.

리더십은 리더의 인간적인 매력에 의존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Charismatic leadership), 구성원들의 가치와 신념, 욕구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 구성원들을 인간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줘 상호신뢰를 형성하는 데 역점을 두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친구가 이번 여행에서 리더와 마당쇠와 무수리의 1인 3역을 다 했다. 이는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과 서번트 리더십을 모두 보여준 완벽한 리더십이다. 20명 총경비의 반을 혼자 부담하면서도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사를 섭외하고 여행에서 친구들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시장까지 혼자 다 보아온 친구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구들아 응원해주어 고맙다~ 우리 나이가 적지 않고 죽음이 저 멀리 가물가물 다가오고 있지만 그래도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뭐가 됐던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항상 깨어 있을려고 노력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다 보면 삶이 더 윤택해지고 주위 인연 닿는 이들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고 도울 일이 반드시 있을거니까"

그리고 이번 여행에 친구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 무슨 말씀을!!! 회장님과 총무님이 중심을 잡아주고 친구들의 호응과 협조가 있어 가능했지 내가 잘나서 할 수 있었던 행사는 결코 아니네요 ~ 서로 이해하고 챙겨주는 우리 동기 간의 우정이 그저 자랑스러울 뿐이네."라고 말한다.

또 한 친구는 동기모임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원동력으로 그동안 말뚝 총무와 지금은 회장으로 묵묵히 동기회의 기둥으로 일해왔다.

이 두 친구의 리더십이 바로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고 생각된다. ‘헬퍼스 하이’는 정신의학 용어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사람 이상으로 행복해지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들이 남을 도우면서 혹은 돕고 나서, 신체적 정서적으로 포만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지속되면서 행복감과 자존감이 높아지고, 혈압과 콜레스트롤 수치도 낮아져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를 달리 ‘마더 데레사 효과’, ‘슈바이처 효과’라 이르기도 한다.

그리고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때 행복해진다.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행복의 마지막 단계’라고 하였다.

이 두 친구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인생은 기나긴 여행이다. 줄곧 순탄하기만 한 인생은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고통과 상처,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좋은 친구가 없다면 이 여행은 굉장히 쓸쓸하고 고독할 것이다. 좋은 친구는 각박한 이 세상을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함께할 친구가 있으면 어렵고 고단한 인생도 훨씬 살 만한 것으로 변한다. 좋은 친구는 반드시 소중하게 여기고 진심을 다해야 한다. 잃고 난 뒤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늦다. 한 번 틈이 벌어진 우정은 빛바랜 사진처럼 시간이 갈수록 더욱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소식을 전하고 자주 보아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에너지가 떨어져 만사가 귀찮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힘을 내어 일어나야만 한다.

이번 칠순 중국여행에 참석한 20명의 친구들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친구들도 다음 모임에는 꼭 참석하여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