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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중국여행

샹그릴라를 찾아서

by 황교장 2024. 2. 7.

샹그릴라를 찾아서

 

2024년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7박 8일 동안 중국 운남성 일대 여행을 다녀왔다. 2016년 5월에 다녀온 리장 고성과 옥룡설산 그리고 차마고도 트레킹은 큰 감동을 받은 여행지였다. 하지만 당시에 미처 가보지 못한 샹그릴라에 대한 아쉬움이 강하게 남아 있어 이번 여행을 가게되었다.

샹그릴라(Shangri-La)의 어원은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쓴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이다. 샹그릴라는 이 소설에 나오는 티베트의 산맥 속에 있는 라마교 사원 공동체로 신비스런 유토피아로 그려져 있다.

이 책의 첫 장면은 러더포드가 베를린의 템플호프에서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만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다.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에 대학시절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콘웨이(Conway)가 잠깐 화제가 된다. 모임이 끝난 후, 밤이 깊었을 때, 러더포드는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알려진 콘웨이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다른 친구에게 말해 준다.

송찬림사

주인공 콘웨이는 영국대사관에 10년이나 근속한 37세의 유능한 외교관이다. 1931년 5월, 인도의 바스쿨(Baskul) 지방 토착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현지 영사(consul)로서 자국민들을 파키스탄 Peshawar로 피난시킨 후 최후에 남은 3명과 함께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이 탄 비행기가 다른 조종사에 의해 목적지와 다르게 히말라야를 넘어 동쪽으로 한참을 날아가 티베트 어딘가에 착륙한다. 조종사는 그곳이 ‘샹그릴라’라는 곳이고 근방에 라마사원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옥룡설산 운삼평

혼란에 빠진 그들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우두머리인 장(Chang)이라는 사람은 놀랍게도 영어와 영국식 예법을 완벽하게 구사하였다. 이로써 그와 다른 3명의 일행은 외부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고,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샹그릴라라고 하는 신천지에 초대되었다.

옥룡설산 백수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곳으로 기후는 따뜻하고 불편함이 없이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욕심 부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곳, 매일 음식이 풍족하며 평화만이 존재하는 곳, 늙어가는 것도 조절하여 살 수 있는 곳이다. 심지어 라마 교두는 250세까지 살았고, 18세로 보이는 만주 아가씨의 실제 나이는 65세다. 이처럼 샹그릴라 사람들은 평균적인 수명을 훨씬 뛰어넘어 거의 불사(不死)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옥룡설산

샹그릴라시 안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중강이라는 지역은 북인도와 티베트 사이에 있는 히말라야 어딘가라는 주장이 있어 왔다. 그 와중에 중국 정부는 1997년에 윈난성(雲南省)의 중뎬(中甸)이 바로 소설의 배경인 샹그릴라라고 발표하고, 2001년에는 지명을 아예 샹그릴라(香格里拉)로 개명하였다. 샹그릴라는 티베트어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다. 특히 이곳에 있는 송찬림사는 책속에 나오는 ‘신비롭게 빛나는 금빛 찬란한 절’로 묘사되는 곳으로 ‘작은 포탈라궁’으로도 불린다.

송찬림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바라본 송찬림사(松赞林寺)의 지붕과 외곽이 온통 금빛으로 번쩍인다. 송찬림사 입구에 갈단(噶丹)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정문에도 갈단송찬림사(噶丹松贊林寺)라 적혀 있다.

갈단송찬림사

갈단은 兜率天(도솔천)이란 뜻이다. 즉 이곳이 천상의 나라이자 석가모니가 머물렀으며 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송찬림사로 오르는 길은 100여 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 이곳의 해발은 3,300m로 계단을 오르자 고산증 증세가 나타났다. 아주 천천히 힘들게 올라갔다.

숨찬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뒤돌아본 풍광은 완벽한 명당 그 자체다. 사신사가 뚜렷하다. 특히 우리나라 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토산의 형태가 그대로 보인다.

토산형국

풍수에서는 산을 형상에 따라 오행으로 분류한다. 토산은 산 정상이 일(一)자 모양을 말한다. 수 km 정도로 보이는 산이 일자 모양으로 달리고 있다. 또한 토산 뒤에는 불꽃이 피어나는 형상의 화산이 안산으로 이중으로 펼쳐져 있다. 이 또한 보기 힘든 형국이다.

화산과 토산의 이중 안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와 미세먼지 하나 없는 최고의 가시거리다. 초등학교 시절 5월 5일 어린이날 맞이 운동회와 가을 운동회 때 보았던 쪽빛 하늘의 모습이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송찬림사에서 보는 풍수와 하늘빛은 샹그릴라로 손색이 없다.

송찬림사

1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3개의 전각이 나란히 있다. 다창대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총카파, 오른쪽에 석가모니를 봉공하는 대전이 있다. 총카파가 만든 종파인 겔룩파의 법왕이 달라이라마다. 마름모꼴로 생긴 노란색 모자를 쓰기에 황모파(黃帽派)라 부른다. 이곳은 청나라 초기 1681년 5대 달라이라마가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세운 티베트 불교 수도원이다. 윈난성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 라싸의 포탈라궁 구조와 흡사해 작은 포탈라궁이라고도 말한다.

라싸의 포탈라궁은 본래 7세기경에 토번왕 손첸캄포가 당나라 문성공주에게 지어준 건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달라이라마 5세가 17세기경에 지은 것이다. 5대 달라이라마는 달라이라마 중 처음으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인물이다.

포탈라궁

그는 토번 제국이 멸망한 후 분열되어 있던 티베트고원을 무려 8세기 만에 통일하였다. 1642년 그가 시가체에서 선포한 간덴 포드랑(5대 달라이라마가 설치한 일종의 정부)은 1959년까지 3세기 동안 티베트의 정치 체제로 이어졌다. 그는 순치제의 초청으로 1653년 베이징을 방문하여 청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겔룩파의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를 티베트의 세속 군주로 부상시킨 그는 역대 최고의 달라이라마라고 평가받는다. 그는 티베트의 주요부(위짱)를 무력으로 통일하였다.

5대 달라이라마, 아왕로쌍 갸초

이곳은 5대 달라이라마가 ‘세 명의 신이 놀다 쉬어가는 곳(三神游息之地)’이라는 의미에서 ‘松赞林寺’라는 이름을 부여했다고 한다.

송찬림사

송찬림사를 나와 샹그릴라시로 향했다. 샹그릴라시는 윈난성 북부의 작은 마을 중뎬이 돌연 2001년에 샹그릴라현으로 변경되었다가, 2014년 샹그릴라시가 된 곳이다. 차마고도의 마방이 티베트로 진입하는 첫 동네이기도 하다.

샹그릴라 시내로 들어서자 티베트 불탑인 초르텐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고성이 하나 있는데 두커쭝(獨克宗)이라 부른다. ‘바위에 세운 성’이자 월광성(月光城)이라고도 불린다.

대불사

고성에는 거북처럼 야트막한 귀산(龜山)이 있고 청나라 초기에 세운 대불사가 우뚝 솟아 있다. 계단 따라 오르는데 해발 3,400m라 숨이 가빠 한 번에 못 오르고 중간에 쉬었다가 갔다. 사찰 담장 뒷길을 따라 한 바퀴 돌며 고성을 바라보았다. 송찬림사의 풍수에는 못 미치어도 명당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다. 날씨가 맑고 공기가 청정하여 마음이 평온해진다.

대불사에서 바라본 풍광들

2014년 1월 11일 새벽, 오랜 역사를 지닌 고성이자 차마고도의 쉼터였던 이곳에 불행이 닥쳤다. 한 객잔 주인이 만취 상태로 자다가 난로를 건드려 화재가 난 것이다. 목조건물인 고성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대불사 마니륜

이곳은 사원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마니차가 있다. 티베트불교에서 사용하는 경전이 새겨진 수행 도구로 마니륜(摩尼輪)으로도 불린다. 원통에 경전을 적은 종이가 들어 있는데, 이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다고 여겨, 글을 읽지 못하는 신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높이 21m, 지름 6m에 이르고 무게가 60톤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자랑한다. 15명 정도가 힘들게 돌리고 있다. 나도 참여하여 힘들게 3바퀴를 돌렸다. 3바퀴를 돌리면 소원성취가 된다고 해서이다.

사방가

사원을 나와 골목을 따라 고성의 중심인 사방가(四方街)로 갔다. 과거에는 ‘수많은 말발굽과 마방 무리로 넘쳐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차마고도가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때, 고성이 마방들의 안식처이던 때의 기록일 뿐 지금은 오로지 관광객을 유혹하는 상점들만 늘어서 있다.

고성의 사방가를 천천히 거닐면서 내가 바라는 샹그릴라는 과연 어떤 곳이었으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번 여정을 떠올리니 이런 해답이 떠올랐다.

 

1. 송찬림사와 샹그릴라시가 자리한 풍수와 맑고 깨끗한 하늘

 

2. 대리의 대리고성과 충성사에 있는 대리삼탑을 품고 있는 창산(蒼山)과 얼하이호[洱海]

3. 2,400년의 역사와 지진도 비껴간 사시마을[沙溪古鎭]의 맑고 고운 개울, 그 개울 위 350년 된 옥진교의 단아함

4. 옥룡설산과 운삼평 그리고 설산을 바라보고 걷는 차마고도와 호도협의 거세지만 맑은 물

5. 맑은 물이 마을 안으로 흐르고 담벼락 없이 주변 자연과 조화를 이룬 명당이라, 강진에도 버틴 여강 고성

6. 일년내내 온화한 곤명의 기후와 석림과 구황동굴의 신비로움

이 모두가 한 곳에 있다면 아마도 외형상의 샹그릴라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운남성 여행 자체가 모두 샹그릴라를 이루고 있는 셈이고, 이 여행을 경험한 것 모두가 모여 샹그릴라를 경험한 것이다. 여행을 통해 내가 매 순간 느꼈던 다이돌핀이 바로 마음 속의 해와 달인 샹그릴라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다가 궁금했던 티벳불교에 대하여 공부 삼아 정리해 보았다.

 

티벳불교는 송첸캄포 왕(?~649) 때 네팔 공주 브리쿠티데비와 당나라 문성공주의 두 왕비가 인도계와 중국계의 불교를 도입하였다. 송첸캄포는 문성공주 이전에 네팔의 공주인 브리쿠티데비를 제1황후로 두고 있었다.

브리쿠티데비 공주는 시집올 때 석가모니 8세 때의 모습을 한 불상을 가져와 티베트에 불교를 전했으며, 문성공주는 석가모니 12세 때의 모습을 한 등신 불상과 수많은 경전을 가져와 중국식 불교를 티베트에 전했다고 한다. 불교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티베트에 들어와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의 고유신앙인 본교(bon敎)와 혼합된 형태를 지니고 토착화해 갔다.

그후 8세기 중엽, 파드마삼바바[蓮華座]가 밀교(密敎)를 전한 뒤부터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밀교가 되었다. 인도의 라다크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석가모니와 거의 동격으로 대접받는 분이 파드마삼바바이다. 그는 실존 인물로 오장나국(烏仗那國: 현재 파키스탄 북부지방) 사람으로 범문(梵文) 이름이 파드마삼바바이고, 중국 이름은 연화생(蓮花生)이다. 부처는 자기가 죽은 뒤 ‘파드마삼바바’라는 이름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파드마삼바바는 연꽃 봉우리 안에서 태어난 부처님이라고 한다. 라마교에서는 그를 존경하여 ‘로폰 린포체’ 혹은 ‘구루 린포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녕마파(寧瑪派: 린포파)의 개산조사가 되었다. 또한 신통력과 주술로 더욱 유명해졌다. 804년경에 티베트를 떠나 인도 드라비다로 간 이후의 종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파드마삼바바

그는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여겨지는데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를 말한다.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로도 불린다. 지금도 서방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다. 뭇 생명 있는 자들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통해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정토교가 성립되었다.

티베트불교가 융성하게 된 계기는 원(元)나라에 전파되어 국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석탑들이 남아 있다. 특히 공주 ‘마곡사 5층석탑’의 끝부분에 라마탑에 보이는 풍마동 장식을 두었다. 이 외에도 경천사 10층 석탑, 원각사지십층석탑도 원나라 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마곡사 5층석탑

마곡사 5층석탑 풍마등

원각사지 십층석탑

경천사 10층석탑

15세기에 티베트불교는 총카파(宗喀巴, 1357-1419)가 이전의 홍교를 개혁하여 새로운 교파인 라마교 황모파(黃帽派)의 개조가 되었다. 그는 현재의 중국 칭하이성 아무드 지방의 총카 마을에서 태어났다. 총카파는 그의 출생지를 딴 이름이다. 총카파는 수행에 전념한 끝에 독자적인 밀교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때까지 티베트 불교는 밀교의 타락 현상이 심하였는데, 그는 엄격한 규율로 현교와 밀교를 융합한 신교도의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다. 1409년 간덴 대승원을 건립하여 황모파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총카파의 애제자 중 두 사람이 제1대 달라아라마와 판첸라마가 되었다.

차마고도

그런데 초대 달라이라마와 2대 달라이라마는 생전에 달라이라마라고 불린 적이 없다. 제3대 달라이라마 때 몽골의 알탄 칸에게 ‘일체를 성스럽게 아시는 바즈라다라 달라이 라마’라는 존칭을 부여받고, 소급하여 달라이라마란 칭호를 얻은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달라이’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고, ‘라마’는 티베트어로 ‘영적 스승’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달라이라마는 ‘넓은 바다와 같이 넓고 큰 덕을 소유한 스승’이란 뜻이다.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

달라이라마 외에 지도자로는 판첸라마가 있는데 판첸라마는 종교적으로 달라이라마에 다음가는 지위에 있다. 세속적인 권력이 없음에도 판첸라마가 중요한 이유는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를 찾는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판첸’이라는 말은 대학자라는 뜻으로 판첸라마가 어릴 때 달라이라마의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판첸라마는 5대 달라이라마가 서열 2위로 인정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정치 등 세속적인 권력이 있는 달라이라마와는 달리 세속적인 권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본래는 판첸라마도 독자적인 자치권역 내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세속적인 권력을 가졌다. 그런데 달라이라마 13세가 판첸라마 9세로부터 독자적인 자치권역을 몰수하고 앞으로 판첸라마는 종교 지도자로서만 활동해야 한다고 선언하여 이후의 판첸라마는 모두 세속적인 권력이 없는 작위가 되었다.

판첸라마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조선 사절단이 열하에서 건륭제의 명으로 판첸라마를 방문했다. 황제가 판첸라마를 스승으로 삼을 만큼 불교를 존중하던 청나라와 달리 조선은 건국 이래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억제하고 천대해 왔기 때문에 승려에 대한 이미지가 대단히 좋지 않았다.

조선 사신들은 중놈 따위(판첸라마)와 만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 특히 황제의 명으로 판첸라마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게 되자 사절단의 양반부터 하인까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판첸라마를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라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으며, 달라이라마가 죽은 뒤에 차기의 달라이라마가 다시 환생하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의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는 스스로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것을 천명하지 않고 있다. 특히 그는 1959년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반대하여 인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불교의 가르침을 알리는 한편 국제 사회에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환생을 관리하는 중요한 동반자였지만 현대 들어 판첸라마가 중국 정부와 가까워지면서 두 라마의 거리는 멀어졌다. 결국 지금은 달라이라마가 지정한 판첸라마와 중국 정부가 지정한 판첸라마가 티베트불교의 지도자로 다른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